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지독이 Jun 26. 2023

오늘도 발치에 사랑이 치인다 2

엽편, PART 01

나름 서두른다고 했지만, 결국 5분 지각. 일도 못하는 인턴 나부랭이가 오늘은 지각까지 했다며 개념이 없다는 둥 집에서 교육을 못 받은 것 같다는 둥 대리님이 내뱉으시는 온갖 막말을 하루 종일 들으며 일까지 하다 보니, 오후가 되자 진이 다 빠져버렸다. 지각했으니 오늘 일 마무리 다 하고 가라며 먼저 퇴근해버리는 직원들의 뒷모습에 대고 인사를 하다 울컥 눈물이 나올 것 만 같았다. 


‘할머니 병원비 40만 원. 월세 20만 원. 점심으로 먹은 김밥 3천 원. 편의점에서 산 새 양말 2천 원.’ 


입 밖으로 금액들을 중얼거리다 보면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가 버린다. 내 입으로 말한 가혹한 현실들을 내 귀가 들어버린다. 슬퍼하는 것조차 사치라며, 귀로 타고 들어온 현실의 소리가 달팽이관을 타고 눈물샘까지 들어가 눈물이 나올 틈까지 메꿔버리는 듯하다.


정신 차리자며 양쪽 뺨을 손바닥으로 툭툭 치고 나서 책상에 어지러이 놓여있는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데 옆에 놓여있던 핸드폰이 울렸다. 할머니였다. 내게 잔소리를 들을 기력이 남아있을 리 없었다. 힐긋 핸드폰 화면만 잠깐 본 뒤 하던 일을 계속 했다. 요새 할머니 전화를 무시하는 일이 많아졌다. 나중에 전화 드리면 되지, 뭐. 일을 어느 정도 마무리 짓고 보니 시간은 어느새 저녁 10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느새 비가 그쳐 있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창밖 한번 볼 틈도 없이 일했던 것 같다. 퇴근하다 보면 집에 가는 걸음이 천근만근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입구 쪽엔 오전에 있던 종이박스가 거의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본래 모습을 잃어 있었다. 비에 흠뻑 젖어 악취를 풍기며 축 처진 채 늘어진 물먹은 종이의 모습이 마치 지금의 나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괜스레 기분이 나빠져서 그나마 남아 있던 종이들도 발로 짓이기며 화풀이를 해 댔다. 누군지 걸리기만 해봐, 아주.


집안으로 들어왔는데도 퀴퀴한 냄새가 가시질 않았다. 하루 종일 내린 비로 벽지에 물이 스며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집에 와서도 쉴 수 없다는 현실에 한숨을 깊게 내쉬며 가방을 한쪽에 벗어두고 걸레를 빨아 와 바닥청소를 시작했다. 좁은 집에 치울 건 왜 이렇게 많은 건지. 혼자서 구시렁대며 거실 청소를 마치고 나니 문득 할머니 방문이 눈에 보였다. 할머니가 입원하시면서 방을 비우신 후로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신경을 못 쓰고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치워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열었다.

방문이 반쯤만 열리다 말길래 확인해 보니 이불이 바닥에 펼쳐져 있어서 문이 열리는 공간을 막고 있었다. 할머니 방이 이렇게 좁았던가. 왠지 찡해지는 마음에 얼른 이불을 접어 장롱에 넣으려는데 무언가가 툭- 하고 이불 사이로 떨어졌다. 뭔가 싶어 확인해 보니, 얼마나 만지작거린 건지 원래의 하얀 모습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누렇게 변색된 봉투가 하나 떨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봉투에 의아한 마음으로 속을 열어 뒤집자 천 원짜리 몇 장과 꽤 많은 동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어지러이 쏟아진 돈 사이로 종이 한 장이 껴 있는 게 보였는데, 꺼내 들어 펼쳐보니 서투른 글씨로 삐뚤빼뚤 쓴 문구들이 적혀있었다.


5월 2일 상자 3박스 140원 / 5월 3일 비 손녀 / 5월 7일 상자 5박스 230원 / 5월 12일 비 손녀 / 5일 18일 상자 2박스 90원 / ...


아... 볼펜으로 꾹 꾹 눌러쓴 듯한 글씨들이 종이가 아니라 마음에 생채기를 내며 새겨지는 듯했다. 적힌 내용을 살펴보니 할머니께서 폐지를 주워 파신 걸 기록해 두신 것 같았다. 설마 발을 삐끗하신 것도 박스를 주우시다 그러신 건가. 팔순이 훌쩍 넘으신 나이에 동네 구석구석을 다니며 가뜩이나 오르막길이 많은 곳을 힘들게 걸어 다니셨을 모습을 상상하니 무언가 마음 한구석이 꽉 막힌 것처럼 숨이 턱 막혀왔다. 들숨 날숨을 크게 내뱉으며 감정을 추스르는데 하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이 눈에 들어왔다. ‘비 손녀’는 뭐지?


나와 연관이 있는 날인 것 같은데 도대체 뭘까 싶어 고민을 하던 찰나에 번개가 번쩍하더니 비가 요란하게 창문을 두드리며 빗소리를 내었다. 살짝 열려있는 창문 사이로 혹여나 비가 들이칠까 깜짝 놀라 얼른 창 쪽으로 다가갔다. 밖을 내려다보니 빌라 현관 보조등 조명 사이로 비가 내리고 있는 모습이 선명하게 보였다. 문득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 설마.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 창문을 스르륵 닫고 이불 더미 앞에 힘없이 주저앉아 읽던 종이를 바라보았다. 앞면에 공간이 부족했는지 종이를 뒤집어보니 뒷면에 글씨가 이어져 쓰여있었다. 


오늘도 넘어지지 말아라, 내 새끼.

지선이 운동화 4만 5천원, 남은 금액 2만원.


달랑 두 줄. 그 두 줄을 한참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을 살짝 열자 비가 얼굴로 들이치며 비릿한 비 냄새가 얼굴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비가 오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하염없이. 창 너머, 길 너머, 건물 너머 병원에 있을 할머니의 모습이 왠지 보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할머니 병원비 40만 원. 월세 20만 원. 점심으로 먹은 김밥 3천 원. 편의점에서 산 새 양말 2천 원.” 


입 밖으로 중얼거려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세게 내리는 비가 차갑게 뺨에 닿았지만 타고 흐르는 느낌은 뜨거웠다. 핸드폰을 꺼내 부재중 통화 목록에서 할머니를 찾아 전화를 걸어 본다. 수신음이 두 번도 채 가지 않았는데 기다렸다는 듯 할머니께서 전화를 받으셨다.


“으응, 지선이냐?”

작가의 이전글 오늘도 발치에 사랑이 치인다 1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