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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루문 Dec 17. 2022

내 감성은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내가 그린 나의 어린 시절

내가 광목이라는 소재를 선택하기에 앞서, 나는 왜 광목이어야 했는가?

그리고 나는 어떤 마음으로 광목을 통한 소통을 시작하려 했는가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과거로 가고 싶었다. 아니 과거를 동경했다. 

그 이유란, 나 스스로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느끼는 불안감과 어른이 되어 갈수록 느껴지는 두려움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 부적응자인가?라고 자문해보지만 오히려 나는 현재의 주어진 환경에 정말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장소, 어느 환경에 던져놔도, 그곳에서 나는 잘 지내곤 했다.

그러므로 부적응자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사회가 두렵고 불안할까?






그것은 아마도 속도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뜬금없이 이유가 속도라니? 의아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이 속도감은 내 속에 잠재되어 있는 두려움을 건드리는 가장 큰 요인이 되고 있다.

처음 운전을 배우면서 느끼는 불안요소 중 하나는 고속도로에서 다른 운전자들과 속도를 반드시 맞추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었다. 나는 아직 시속 70km로 가는 것이 편안한데, 다른 운전자들은 90km로 가고 있고, 나는 나의 속도를 벗어나 그들과 속도를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 너무 불안하고 두려운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빠른 속도 속에서 돌발상황에 맞닥뜨릴 때, 속도에 이기지 못하고 결국 사고를 내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라고 할 수 있다. 준비가 덜 된 상태에서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나를 맞추어야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편안한 속도에서는 여러 가능성을 계산하고 그릴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속도를 따라가기 급급하다 보면 속도가 주는 두려움에 눌려 마음의 여유가 없어질 테니까 말이다.


나에겐 세상이 그랬다.

나는 아직 뛰어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세상은 너무 빠른 속도로 전진하고 있었다.

그 속도 속에는 누군가와 함께라는 유대관계를 느낄 수 없을 정도의 자본주의적 본질만 남아있는 것 같아서 더욱 그랬다.

흙은 사라지고, 바람은 자원이 되고, 물은 흐릿해져 갔다. 모든 것은 자기만의 속도가 있는데, 속도를 거스르는 행동 속엔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제원리만 존재했다.

진짜 두려움은 그것이었다. 내가 맞추고 싶은 속도는 순환과 흐름이라는 것에 있지만, 우리는 순환도 흐름도 강제하며 규율과 법제 안에 넣고 나를 그 속에 욱여넣는 기분이 들고 있었다.


알고 있다. 그런 두려움을 느끼는 이유란, 나 역시 그 속도가 맞다고 느꼈고, 나 혼자만 도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이 만들어 낸 것이라는 걸.

누가 뭐라고 해도, 나만의 속도를 찾아 살아가면 그만 아닌가 하는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그래도 된다고 배운 적이 없었다. 내 엄마는 언제나 오늘보다 내일 더 잘 살아야 하는 이유만을 가르쳤고, 학교에서는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 다른 친구들보다 앞서서 더 나은 대학을 가야 하는 이유만을 가르쳤다. 

하루에 7~8시간 잔다는 것은 사치와도 같은 우리의 어린 시절. 도시락 2개씩 싸 가지고 다니며 아침 7시에 등교해서 밤 10시에 하교해야 하는 속박의 시절.

너는 뭐가 되고 싶니?라는 질문보다, 너는 서울대를 가야지!라는 압박이 당연했던 슬픈 시절.

그 시절의 우리들에게 속도는 그저 맞춰가는 것일 뿐이었다.

두려움을 느낄 시간은 없었고, 사회로 내 던져졌을 때, 우리는 각자의 속도가 시속 몇 km인지 생각할 생각조차 하지 않으며 다시 승진, 월급, 보너스에 매달려 하루하루 살아내는 어른이 되어갈 뿐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아팠다.

흔들려서 아픈 것이 아니라, 흔들려 볼 줄 모르던 사람이라 더 아팠다.

그런 우리들은 작은 미동에도 큰 아픔을 느꼈고, 어느 날 목적지가 사라지면 그 자리에서 마냥 허우적댔다. 그것이 우리들이었고, 내 모습이었다.

허우적대던 덜 자란 어른. 

그런 어른이 나라고 느꼈을 때부터는 나는 내가 가장 행복했던 그 시절.

과거의 나를 동경하곤 했다.









소년, 안녕 (2012년)


이 책은 그런 내가 나에게 보내는 소설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시절의 내가 투영되어 있는, 아직 성장하지 못했던 나를 다시 성장하는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책.

이 소설을 쓰며 나는 많이 행복했었다.

대놓고 그리워했고, 대놓고 추억했으며, 이제는 흔적도 남지 않은 내 어린 시절의 그 마을을 이 책 곳곳에 그려 넣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소설 속에 나의 행복을 박제시킨 후에야 비로소 다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우리가 살아가야 할 방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사람을 너무 사랑해도 사랑하지 않아도 되는 만큼은 얼마만큼이어라?"

.......

그녀는 다시 비를 보았다. 비의 파편이 그녀의 뺨에 부딪혔다. 뭔가를 생각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프지 않을 만큼."

그녀는 잠깐의 여유를 두고 이런 대답을 했다. 나는 대답을 바르게 들었는지 고민했다. 그녀가 그런 나의 고민을 알아챘는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내 가슴에 손을 올려놓으며 다시 말했다.

"여기! 마음이 아프지 않을 만큼."


본문 중에서...



나는 이 책에 사랑을 담았었다. 사춘기 소년의 사랑과 앞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들에 대한 질문들을 담았었다. 그것은 나에게 하는 말과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순환과 흐름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 속에 있었다.





지상아, 너는 이 농작물들처럼 살아야 한다. 또 이 농작물들처럼 사람을 대해야 한다. 너에게 사랑을 준 사람들을 잊지 말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지 말고, 사랑을 받았으면 돌려주고 돌려주었으면 다음 사랑을 준비하고. 살면서 배신하지 말고, 알았지?

멀리 석양이 눈부시던 어느 날, 아버지는 논둑에 서서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보다 훨씬 전 어느 날, 그녀가 한 말 또한 생각났다.

가슴이 아프지 않을 만큼만.......

그 말들이 어떤 연관성을 갖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말을 떠올릴 때마다 마치, 그 두 사람의 말이 하나인 양 바로 뒤를 이어서 생각이 났다. 의도한 바도 아닌데, 그저 오랜 시간을 거칠수록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멀리 이어지는 석양이 논 구석구석을 물들여서 석양과 하나의 물결을 이루듯이.


본문 중에서...



나는 생각했다. 

조금 느려도 괜찮지 않을까?

사람들이 요구하는 속도대로 살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이 책을 탈고하고 난 후, 나는 그래도 괜찮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런 결론에 이르러서야 나는 상처를 덜 받는 사람이 될 수 있었다.

나를 바로 보고, 내가 원하는 방향을 정하는 일이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삶을 찾아가는 날들이, 조금 느린 속도로 펼쳐진다고 해도 

그것이 삶의 성패를 결정할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것들은 내가 과거로 돌아가 나의 행복한 날들을 온전하게 떠올리고, 현재로 돌아온 후의 깨달음이었다. 나는 우리가 왜 아픈지 알기 때문에, 때로는 그들에게 잠시 쉬어도 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이 가장 기뻤다. 나 스스로에게 진정으로 관대할 수 있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정의 내릴 수 있는 내가 되고서야 나는 행복이라는 말을 할 수 있었으니까.


내 책은 그렇게 나 스스로를 치유해주었고, 나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소통의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나는 내가 알아냈던 나를 보듯이, 내가 할 수 있는 소통의 방법을 찾아냈다.

느려도 괜찮다는 그 말을, 나의 상황에 맞는 방법으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할 수 있는 최상의 선택을 한 것이다.

광목이라는 원단이 내게 소통의 수단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직장생활을 할 때 늘 광목으로 이불을 만들기만 했던 내게, 이 원단으로 옷을 만들면 사람들이 참 편안해하겠다는 어렴풋함으로 시작해 누군가에는 반드시 필요한 소재가 될 수 있다는 확신으로 바뀌면서, 어느새 내겐 이 소재야 말로 나를 위한 최상의 소통 도구라는 것을 믿게 된 것이다.


표백처리를 하지 않고, 하얗게 염색하지 않았기 때문에 늘 은은한 미색으로 시작하는 광목은 시간을 보태고, 세탁을 반복하면서 하얗게 된다.

이것은 어쩌면 힘들고 지친 마음이, 편안한 시간을 더할수록 뽀얗고 새로워지는 마음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약을 통해 급격하게 안정을 찾는 과정이 아닌, 생활 속에서 삶 속에서 서서히 상처가 낫는 과정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더 단단해질 것이다. 순간 개선되는 것에 중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치유되는 과정을 겪은 사람들은 다시 상처가 온다 해도, 치유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상처의 강도는 점점 약해질 것임을 믿었다. 광목은 바로 그런 소재였고, 그래서 치유를 닮은 것이었다.

광목옷을 만드는 과정은 결코 서둘러질 수 없었다.

옷을 만들기 전에 세탁을 하고, 풀기를 빼내고 대형 건조기에서 먼지를 날리는 과정을 거치고

곱게 접어서 둘둘 말아둔 후 옷의 재단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소비자들은 세탁 후 옷이 줄어드는 불편을 겪게 될 것이고, 민감한 피부를 가진 분들은 옷 먼지에도 간지러움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소비자들은 더욱 부드러워진 광목옷을 체험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옷은 늘 이 과정을 반복하며 느리게 만들어지고 있다. 그래서 나는 느린 쇼핑몰로 소문이 났다.

옷을 미리 만들어두지 않고, 소비자가 원하는 옷을 그때, 그때 만들어서 보내기 때문에 배송은 늘 느렸다. 하지만 자신만의 사이즈를 원하는 분들에게 불편한 옷을 입힐 수 없다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주문 하나에도 자신의 요구를 전하는 분들의 마음을 무시할 수 없기도 한 이유에서이다.

또한 옷을 미리 만들어두면, 재고가 되고, 재고는 바로 만든 옷의 신선함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는 절대 옷을 미리 만들어두지 않는 습관이 생기고 말았다.

옷이 생선도 아닌데, 무슨 신선함 타령이냐고 묻는다면, 옷걸이에 걸려 있는 옷은 옷걸이 모양이 잡히기도 하고, 그 사이 먼지들인 옷에 붙어 먼지 냄새도 나는 것이, 정말 신선하지 않는 느낌의 옷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늘 빠른 것에 길들여져서, 기다리는 것은 불편해진 것 같다.

그런 분들에게는 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소비자의 속도에 맞춰서 사는 사람이 아닌, 내가 가진 속도에 맞춰서 옷을 만들고 전달하는 사람임을 꼭 이야기해 주고 싶다.

누군가의 정성, 누군가의 진심을 알아보고 이해할 때 그 속도가 답답하지 않은 것처럼

나의 쇼핑몰에 머물러 옷을 고르는 분들의 마음엔 광목이라는 소재를 향한 제작자의 진심과 그 옷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편안함과 치유가 함께 함을 이해하길 간절히 바란다.


나는 늘 자연 속에서 뛰어놀던 아이였다. 길가에 핀 들꽃을 꺾어 친구들과 반지를 만들고, 풀을 뽑아 맛을 보고, 산에 핀 진달래와 아카시아를 따 먹으며 자란 아이였다.

그 아이가 커서 어른이 되었을 때, 물을 사 먹는다는 사실에 경악했고, 공기를 맘 놓고 마실 수 없음에 한 없이 슬펐다. 다시 산으로 들어가 살 수 없는 현실과의 타협에 슬퍼하다가도, 내 마음의 속도를 찾아가는 어른으로 성장한 나였다.

그 사실은 결코 변하지 않을 일이었고, 내 안에 각인된 역사였다.

그런 내가 만드는 옷엔 가끔 그리움이 담기고, 가끔은 당신을 향한 위로가 담기기도 한다.

나를 향한 기도가 담기기도 하고, 많은 사람을 향한 외침이 담기기도 한다.


나의 감성은 내 어린 날의 그곳에서부터 자라났다.

멀리 있는 석양이 내 마음 구석구석을 향해 들어와 나를 물들이듯, 어린 시절부터 시작된 감성은 지금의 나를 물들이고 자라게 했다. 

성장과정에서 느낀 불안과 두려움의 실체는 내 안의 본질을 알아채지 못한 나로 인한 것이었다.

그러니 이젠 흔들릴 이유도, 아프다고 침잠할 이유도 없다.


여러분도 잠시 진짜 자신을 보고 그곳으로 돌아가, 상처를 치유할 수 있길 바라본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흔들리고 아플 것이므로, 그것이 무엇이든 상처에 바르는 약을 찾아 오늘로 돌아오길 진심으로 바라본다.

혹시, 찾지 못하겠거든, 내가 만든 광목옷으로 그 상처를 감싸 안아보는 시도를 추천한다.

당신이 원하는 그리움이, 위로가, 기도가 그리고 공감이 그 옷에 담겨 있을지도 모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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