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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UMIN HYUN Oct 11. 2021

아오모리의 겨울

소리마저 부재한 순백의 공백

나는 겨울을 좋아한다. 두터워진 옷차림만큼 늘어난 타인과의 거리도, 인적이 뜸해진만큼 정숙함이 늘어난 골목도, 폐부 곳곳에 스며들어 온몸의 경각심을 세워주는 건조하고 매서운 한기까지도 어느 하나 빠짐없이 내 취향에 꼭 들어맞는다. 마음이 어지러워 도망치듯 여행을 떠났던 2014년, 일본 본섬의 최북단 아오모리에서 나의 이상향에 다다랐다.


JR 아오모리역의 역사 / Epson R-D1s, Leica Summitar 50mm

도쿄에서 아오모리행 신칸센에 올라탄 뒤 책을 읽으려다 깜빡 잠이 들었는데, 잠에서 깨니 이미 열차는 종착역인 신아오모리역의 플랫폼에 진입하고 있었다. 원체 대중교통에선 쉽사리 잠들지 않는 타입이라 내리 세 시간을 깨지 않고 잠들어 있었다는 사실에 놀랄 겨를도 없이, 나는 눈 앞에 펼쳐진 설경에 압도당하였다. 눈이 많이 오는 동네라는 것은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었지만, 고개를 사방 어디에 돌려도 하얀색만 눈에 들어올 정도로 눈이 쌓여있는 시나리오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 키를 거뜬히 넘기는 눈의 장벽이 마치 요새의 성벽처럼 모든 도로를 둘러싸고 있는 경관은 가히 장관이었다.


다음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완행열차로 갈아타려는데 웬걸, 열차도 철로도 눈이 덕지덕지 묻어있어 도무지 열차가 운행을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뭐 북한의 미사일 발사 뉴스를 보는 우리의 표정처럼, 늘상 있는 일이라는 양 지루한 표정으로 사람들은 열차에 올라탔고 이내 열차는 출발하였다.



아오모리역에서 버스를 타고 굽이굽이 난 눈의 성벽을 따라 예약해두었던 온천장으로 향하였다. 약 1주일간, 명상과 글쓰기를 할 요량으로 속세와의 단절도가 커보이는 곳을 일부러 선택하였으나, 예상외로 온천장은 요양을 위해 장기 투숙중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많은 곳이었다. 도착했을 때의 실망감은 꽤 컸지만, 첫날 밤을 보내고 그 실망감이 대단한 기우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든 투숙객은 모여서 아침드라마를 보는 시간을 제외하면 정말 쥐죽은 듯이 조용히, 기척 조차 없이 지내는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바깥에는 쉬지 않고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어 눈이 쌓이는 소리 외에 그 어떤 것도 없는 정적이 계속되었다. 그야말로 명상과 글쓰기를 하기에 이 보다 더 적합한 장소를 찾을 수는 없을 정도인 최적의 공간이었다.

핫코다산(八甲田山) 어느 곳인가의 나무 / Epson R-D1s, Leica Summitar 50mm


온천장에 지내는 1주일은 정말 무미건조하게, 아무런 일 없이 지나가버렸다. 성격이 성격인지라,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새로운 사람들과 만나 인사를 하고 친해진다든가 하는 일도 일절 없었기에, 매일 아침 일어나 명상을 하고, 온천욕을 한 뒤 밥을 먹고, 책을 읽다가 낮잠에 들고, 다시 일어나 날씨가 괜찮으면 산책을 다녀온 뒤 온천욕을 하고 밥을 먹으며 새로운 영감이 떠오를 때까지 주구장창 시간을 보낼 따름이었다.


그 어떤 자극도 없는 기간이었어서 그럴까, 이때의 기억은 대부분 사건이 아닌 소리로만 남아있다. 옆 방의 미닫이 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 다다미방을 거닐 때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대욕실의 온천수가 참방거리는 소리, 채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나무에서 눈무더기가 떨어지는 소리, 30인치가 될랑말랑하는 TV에서 들려오는 아침드라마 소리와 숨죽여 웃는 사람들의 소리, 어둠이 깔리면 찾아오는 정적의 소리와 같은 그런 소소한 소리들말이다.


핫코다산(八甲田山) 어느 곳인가의 등산가 / Epson R-D1s, Leica Summitar 50mm


때때로 날이 좋아 (말이 좋아 날씨가 좋은 날이지, 실제로는 '눈, 바람이 덜한 날' 정도일 것이다.) 산책이라도 나가면, 커다란 적막 위에 내 숨소리와 눈밟는 소리만이 얹어져 비할 데 없는 호젓함에 위화감마저 느끼고는 했다. 


생각할 거리의 종류도, 깊이도 그 때와는 사뭇 달라진 지금에서야 그 순간순간 느꼈던 지루함과 위화감이 얼마나 내가 간절히 바라왔던 것들인지 알게 된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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