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여행 중의 산책
이동시간의 독서를 좋아한다. 지하철, 버스, 택시, 기차, 비행기, 가끔은 빌딩 숲 사이를 걸으면서 책을 읽는다. 자투리 시간을 아껴보자는 열정은 아니다. 가끔은 읽기 위해 이동하기도 했으니까. 독서는 어딘가로의 이동이다. 목적지가 분명한 이동, 혹은 우연한 이동. 한 인간이 독서하는 방식은 그가 이동하는 방식과도 닮아있다. 인생의 청사진이 그려지지 않아 막막했던 20대 초반에는 그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해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공원, 도서관, 도시의 한복판, 강가, 바닷가..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장면들은 어떤 중대한 질문을 안고 있는 시처럼 느껴졌다. 독서도 배회와 다를 바 없었다. 직관으로 책을 고르고 떠돌아다니듯이 읽었다. 우연이 가득했던 길과 문장들에는 어딘가 신비로운 힘이 있었고, 그것들은 인생의 청사진에 작은 흠과 빛깔과 약간의 스케치를 남겼다. 나는 이동하며 책을 읽었고, 책을 읽기 위해 이동했다. 서로 비슷한 진동을 가진 이동과 독서가 중첩되면 크게 공명하기 시작했다. 한 번은 책을 읽기 위해 2호선 내선순환 열차에 올라타기도 했다.
지하철에 밀집되어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철썩이는 파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면 한 명의 인간은 옅은 소금기가 느껴지는 자그마한 물 한 방울 정도일까. 엉겨 붙은 수많은 물방울 속은 아늑하고 외롭다. 외로운 개인은 스스로를 비로소 인식하게 된다. 무수한 익명들 사이에서 나는 더 홀로 서있다. 수많은 발걸음과 말소리가 어지러이 혼재되어 형성되는 소음 덩어리는 또 다른 고요이다. 그래서 이동하는 시간은 새하얗다. 그 공백 속에서 마주치는 문장들은 더욱 메아리치고, 그 공백은 줄곧 나에게 필요했던 문장들에 의해 각인된다. 그 각인은 나를 파고 넓혀 상처를 냈고, 그것이 아무는 과정에서 더 나아진 나를 만났다.
가장 새하얗고, 오래 지속되는 공백은 비행기에서의 시간들이다. 핸드폰은 먹통이 되고,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며, 자고 자도 끝나지 않는 비행기의 시간. 이동을 즐겨하는 나에게도 비행기에서의 시간은 지난하다. 그럼에도 되돌아보면 그 광활한 공백을 그리워한다. 평소 즐기지 않는 마블 영화 한 편을 끝내도 목적지까지는 몇 시간이 남아있다. 심심함과 권태로움이 커져갈 때, 그러나 졸리지는 않은 그때가 내부 구석구석 숨어서 엉켜있던 수많은 고민들을 펼쳐보기에 적합한 때이다. 굳이 들여다보지 않았던, 그래서 표현되지 못한 채 응어리져있던 나의 고민들은 심심함을 타고 하나둘 밖으로 나오기 시작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 흩어져버릴 지경에 이르렀던 고민들은 비행기 안에서 다시 생명력을 얻는다.
기내에 들고 가는 배낭 안에는 일기장과 신중하게 고른 책 두 권을 챙겨 넣는다. 깊은 공백 속에서만 정체를 드러내는 고민들을 낚아채기 위함이다. 일기장은 줄이 없는 백지를 선호한다. 몰타로 가는 그 비행기 속, 내가 겨우 적을 수 있었던 문장은 많지 않다. ‘소중한 순간’ ‘여행의 이유’ ‘나만의 언어로 나타내기’.. 그저 단어와 구 정도로 나타낸 것이 대부분이지만 그때의 일기장을 펴보면 여전히 무거운 설렘이 느껴진다. 책은 여행 전 고심한 그 책이면 된다. 그 책이어야 하는 이유는, 당신이 어제 내린 선택 속에 들어가 있다. 그 책엔 모호하게 떠돌아다니던 고민들이 명료하게 적혀있다. 해답지를 보는 것만 같다. 그러나 우연은 아니다. 비행기에서 나는 항상 해답지를 펼쳤으니까.
"우리 모두에게 저녁은 다가올 것이다. 우편마차는 도착할 것이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산들바람을 마음껏 즐긴다. 그리고 산들바람을 즐길 수 있도록 나에게 주어진 영혼도 마음껏 즐긴다. 나는 더 캐묻지 않는다. 나는 애쓰지 않는다."
[불안의 서] 페르난두 페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