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김범순 -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바르셀로나
한 사장 집을 소개한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가 말했다.
“친구가 하도 부탁해서 특별히 연결해 주는 거야. 앞 못 보는 부부 집이니까 잘해봐.”
한 사장 부인은 침대에 누워 라디오를 한참 듣다 일어나 볼록 새김한 상아 큐브를 돌리기 시작했다. 기둥에 묶인 것처럼 꼼짝하지 않는 시간 보내기에 큐브만큼 좋은 건 없을 것이다.
김 여사는 편안한 자세로 느긋하게 한 사장 부인을 지켜보았다. 감히 말을 걸기 어려울 만큼 표정이 경건하고 진지했다. 앞 못 보는 사람의 일상은 평면적이라 무척 지루할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얼마 후 한 사장 부인이 다 맞추었다며 활짝 웃었다.
“김 여사!”
밝게 웃는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소름 돋게 날카롭다. 상당히 기분 나쁘다.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손 하고 큐브 안 씻어요?”
“네? 아, 네!”
첫날이라 얼떨떨해서 늦게 알아차린 김 여사가 발딱 일어나 한사장 부인 팔을 잡았다.
"왜 이래요, 누가 팔 잡아 달랬어요?"
한사장 부인은 진저리를 치며 뿌리치고 천천히 세면대로 걸어갔다. 김 여사가 조심스럽게 따라가 손을 씻고 수건으로 정성껏 물기를 닦았다. 한 사장 부인이 또 소리쳤다.
“세정제로 깨끗이 씻어야 세균이 박멸될 거 아녜요?”
그만 일로 필요 이상 신경질을 부린다. 더럽게 아니꼽다.
“라디오하고 이어폰도 소독하고 마른 수건으로 뽀드득뽀드득 소리 나게 닦으란 말이에요. 이 정도는 기본이니까 척척 알아서 해야지 왜 일일이 잔소리하게 만들어요?”
시각장애인의 집이라 마냥 편할 줄 알았던 김 여사는 예상과 달라 저절로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2. 보배
사진 : 고은별 인스타그램
늦게 결혼했다는 한 사장 부부의 고등학교 1학년 딸이 학교에서 돌아왔다.
한 사장 부부는 세상에 남긴 자신들의 유일한 흔적인 딸이 고맙고 소중해서 이름을 보배라고 지었다.
세인들은 쉽게 말한다. 제 앞가림도 못하는 주제에 자식은 뭐 하러 낳느냐고? 시작 장애인은 자식에 대한 의미가 정상인과 차원이 다르다.
부부는 후천적으로 앞을 못 보게 되었는지 딸은 아주 예쁘고 건강했다.
한 사장 부인이 보배에게 김 여사를 소개했다. 보배는 김 여사를 힐끗 쳐다보더니 인사는커녕 대뜸 이렇게 말했다.
“뭐 해요, 얼른 가방 받지 않고?”
사람 부리는 솜씨가 고단수다.
영락없는 그 엄마에 그 딸이다.
보배는 어렸을 때 알았다. 앞 못 보는 부모가 해줄 수 없는 부분까지 알아서 챙기는 도우미는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결코 간과할 수 없었다.
매의 눈으로 꼼꼼하게 살피며 하나하나 지적하고 참견했다. 그러다 보니 말투가 강경하고 명령조로 변했다.
보배 눈 밖에 나면 안 되겠구나! 감 잡은 김 여사가 상냥하게 웃으며 말했다.
“맛있는 간식 만들어줄까?”
보배는 눈길도 주지 않고 잠깐만요 하더니 친구들한테 전화를 걸었다.
“우리 집으로 다 모여!”
“먹을 거 있냐고?”
“당연하지!”
“야, 생각해 봐라. 우리 엄마 아빠 앞도 못 보는데 냉장고 텅텅비우면 되겠냐?”
잠깐이지만 버릇없다고 흉봤던 보배였다. 그런 보배가 앞 못 보는 부모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아 깜짝 놀람과 동시에 죄책감으로 가슴이 먹먹했다.
어릴 적 김 여사는 심하게 다리를 절룩이는 아버지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부끄러웠다. 차라리 죽어버려 눈에 안 띄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아버지를 만나면 못 본 척 장난치며 지나쳤다.
아버지는 김 여사가 간절히 바라서인지 열한 살 때 세상을 떠났다.
보배는 부모 중 누구라도 화장실에 가면 얼른 불을 켰다. 김 여사가 말렸다.
“보이지도 않는데 뭐 하러 불을 켜?”
보배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반문했다.
“안 보일수록 밝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김 여사는 부모를 위하는 보배의 깊은 마음에 다시 한번 감동했다.
김 여사는 이 집에 들어서면서 놀라느라고 입 다물 새가 없다.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한테 부자라는 말은 들었다. 시각 장애인의 집이니 좀 넓은 아파트겠거니 했는데 잘 가꾸어진 정원에 수영장까지 딸린 펜트하우스였다. 더 놀란 건 드넓은 집안이 무균 실처럼 청결한 것이었다.
김 여사는 차마 오염된 발을 집 안에 들여놓기 황송해서 한참 머뭇거렸다.
3. 시간문제
사진 출처 : 양지안 인스타그램 - 성심당 롯데백화점 대전점
한 사장 집에는 김 여사 말고 출퇴근하는 오 여사도 있었다.
오 여사는 한 사장 부인 지시 대로 설거지가 끝나면 싱크대와 수전에 베이킹 소다를 뿌려 살균하고 거름망을 꺼내 배수구 속까지 솔로 닦았다. 가구는 물론 유리창과 창틀 홈까지 매일 닦고 속옷과 양말 심지어 수건까지 다리미로 다렸다.
열심히 일하는 중에도 한 사장 부인이 침대 커버에 먼지가 있다면 얼른 뛰어와 바꾸고 자외선 살균기를 돌리고 방바닥을 닦느라 근무하는 열한 시간 동안 눈코 뜰 새가 없었다.
남의 집 도우미는 사람 아닌가? 자기가 직접 하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면서!
반감이 치솟았지만 괜히 오 여사 편들다 미운털 박힐까 봐 찍소리 하지 않았다.
“김 여사!”
“네 사모님.”
“오 여사가 정원으로 빨래 널러 나갔으니까 하는 말인데.”
김 여사는 또 놀랐다.
앞도 못 보면서 한쪽 귀에 이어폰 꽂고 라디오를 들으며 복층 펜트하우스 안 모든 사람 움직임을 감지하다니! 저렇게 예민하니까 살이 안 찌고 요양보호사가 자주 바뀌는 모양이었다.
“우리 식구는 오 여사한테 불만이 많아!”
“저렇게 깔끔하고 부지런한데요?”
“옥에 티가 있거든 운전기사 박 씨 있잖아?”
김 여사는 촉이 뛰어난 것을 자랑하기 위해 냉큼 넘겨짚었다.
“보기와 달리 겁나게 남자를 밝히나요?”
한 사장 부인은 손뼉을 치면서 숨이 넘어갈 정도로 웃었다. 실컷 웃고 나더니 그게 아니라 먹성 좋은 박 기사도 인정할 만큼 음식 솜씨가 형편없다고 했다.
오호~!
전라도 출신 어머니한테 호되게 두들겨 맞으며 음식을 배운 김 여사였다.
식당에서 찬모로 일할 때 한식의 지존이라 자부했고 근무하는 곳마다 그만둘까 봐 마음 졸이는 식당 주인을 들었다 놨다 배짱껏 일했던 김 여사이기도 했다.
한 사장 가족 입맛 사로잡는 건
그야말로 시간문제였다.
4. 모두 나보다 낫구나
사진 출처 : 고은별 인스타그램 - 옛 빨래터 밀라노
한 사장 부인이 손을 내밀며 큐브를 달라고 했다.
김 여사가 침대 머리맡에 있는 큐브를 들려줬다. 한 사장 부인은 큐브가 손에 닿자 징그러운 벌레라도 건드린 듯 오만상을 찌푸리며 제대로 씻어 오라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그만두겠다고 박차고 나가버리고 싶었지만 큰 꿈이 있었으므로 공손하게 알았다고 했다.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오 여사한테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김 여사는 하도 복잡해서 종이에 받아 적었다.
1) 물 1리터에 소독제 10그램을 희석한다.
2) 큐브 전용 수건을 3분 간 담근다.
3) 수건을 건져 꼭 짠 다음 큐브와 큐브 받침을 닦는다.
4) 햇볕 잘 드는 곳에 널어 보송보송해질 때까지 말린다.
5) 흐린 날은 적외선 멸균기에 30분간 넣는다.
미리 그렇게 하라고 시키던가?
낙이 없으니 사람 들볶는 재미로 사는 모양이지?
계속 자극하면 가만두지 않을 것이었다.
적개심을 품은 김 여사가 다시 손질한 큐브를 건네며 조롱하듯 물었다.
“사모님은 사는 게 즐거우세요?”
한 사장 부인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대답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그러면 그렇지!
얼마나 답답하고 사는 게 힘들면 저러겠어?
김 여사는 원하는 대답을 들어 아주 흐뭇했다.
한 사장 부인이 가볍게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숨 쉴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데요.”
뜻밖이었다. 김 여사는 장애가 있는 사람은 모두 자기 아버지처럼 불쌍하고 불행한 줄 알았다.
“불행할 때도 있었지만 보배 아빠가 마음잡으면서 세상이 천국으로 바뀌었어요. 벌이가 시원치 않아 보배 옷 한 벌 제대로 못 사 입혀도 하루하루가 마냥 소중하고 행복하더라고요.”
김 여사는 한 사장 부인이 죽지 못해 산다고 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그러면 입에 발린 말로 갖은 위로를 다하려고 했다.
세상사람 모두 나보다 낫구나!
김 여사는 김이 팍 새면서 강한 열패감에 휩싸였다.
어렵사리 알게 된 언니가 신신당부했었다. 인정에 끌려 분별력을 잃으면 일도 그르치고 망신만 당하니까 조심하라고.
이 집은 그 당부가 소용없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