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죽을 권리 05화

죽을 권리

9. 1985년 5월 17일

by 글마중 김범순
KakaoTalk_20250828_153655314.jpg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페


계단참에서 자고 일어나니 아카시아 꽃잎이 눈처럼 휘날리고 있었다. 중환자실 창문을 활짝 열었다. 아카시아 향기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바야흐로 계절의 여왕 5월이었다.


K는 며칠 전부터 혈압이 정상으로 돌아오고 가끔 눈을 떴으며 가래 제거하는 너의 팔을 살며시 잡고 하지 말라는 듯 화내는 표정을 지어 보이기도 했다.


학교 주변에도 아카시아꽃이 만발했을 것이다.

K는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 있을까?


갑자기 울컥했다.

너는 그런 너를 나무랐다.

기적을 일으킨 K에게

지나친 욕심을 부린다고.


주치의가 K의 몸에 붙어 있던 심전도 검사 기기 줄을 제거했다. 너는 또 K가 다 나은 것처럼 기뻐했다. K의 어머니도 한시름 놓고 농사일이 바쁘다고 시골로 갔다.


스승의 날 국내 굴지의 신문사 세 곳에서 K 기사가 대서특필 되었다. 너는 K가 그런 대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고 인정했다.


K가 근무하던 중학교의 학군은 시내 일부와 광범위한 시골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 학기가 시작되면 일주일간 버스를 타고 산을 넘고 들길을 걸어 가정 방문을 했다.


집집마다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는 지금과 달리 1970년 무렵에는 대부분 없었다.


K는 가정 방문을 통해 학생을 온전히 이해하고 성적 높이는 포인트를 찾아냈다. 일주일 동안 한 집도 빼지 않고 방문하고 나면 K 얼굴은 새까맣게 그을고 구두코가 해졌다.


학교 일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던 K

돈이 될 만한 학생 집만 방문하는 일부 선생과 달랐던 K

육성회장이 고액을 제시하며 의뢰한 과외를 단칼에 거절한 K


너는 그런 K를 존경했다.


5월 19일은 일요일이었다. K는 자주 눈을 떴고 눈빛이 조금 맑아졌다. 너는 큰맘 먹고 오전 일찍 병원을 나섰다.


딸과 큰아들을 데리고 백화점에 가서 옷을 사주고 맛있는 점심도 먹었다. 아이들은 너와 온전히 하루를 보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너는 그러지 못했다.


너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불안하고 병원에서 보이지 않는 끈으로 자꾸 잡아당기는 것 같아서였다.


병원으로 돌아와 K 옆에 섰다.

너는 그제야 괜찮았다.


막내가 생후 4개월 되는 날이 밝았다.

막내가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밤새 불은 젖을 유축기로 짜며 울었다.


5월 22일 새벽 5시. 밤새 한 시간 간격으로 가래만 뽑고 K 침대 발치에 엎드려 잠들어 버렸다. 그랬는데도 또 졸렸다. 계단참도 좋고 K 발치도 좋고 어디서든 실컷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K가 살았다는 확신 때문에 긴장이 풀려서 그럴 것이다.


K가 눈을 말갛게 뜨고 있다.

“나 졸려서 계단 참에 가서 한숨 자고 올게. 당신이 가지 말라면 안 가고.”

K는 자고 오라는 듯 너를 떠밀었다. 처음으로 묻는 말에 응답한 것이었다. 너는 환호하며 K 손을 잡고 흔들었다.


낮에 K가 또 눈을 뜨고 있기에 네가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K는 어제까지 모른다고 고개를 젓더니 확실히 안다는 듯 조금 웃어 보이기까지 했다.


K는 그날 자주 의식을 되찾았다.


저녁 8시. 네가 물었다.

“어디 불편한 데 없어?”

“흥헝.”

기도가 뚫려있는 상태라 웅얼거리는 소리로 대답했다.


너는 어이라고 들었는데 옆에 있던 시숙이 말했다.

“분명하게 아니라고 했잖아요.”


이대로 회복한다면

7월 7일 아침 화분에 물을 주고 학교로 출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밤 2시 30분

너는 또 돈을 헤아려 수첩에 적었다.

은행에 가서 모은 돈을 저축해야 하고

K 5월분 봉급을 찾아야 하고

5년짜리 농협 적금은 두 번 더 넣으면 끝나고

7년간 부은 주택청약 저축은 만기가 되었다.


내년에는 분양받아 놓은 땅에 집을 지어야겠다.

너는 가슴에 돛을 단 것처럼 부풀었다.




10. 욕망의 단계


크로아티아.jpg

크로아티아 류블랴나 성 니콜라스 성당 측면 출입문 부조


5월 23일 K의 눈빛이 점점 맑아졌다.


K의 눈빛과 의식이 맑아지면서

기쁨 대신 두려움이 성큼 다가왔다.


오른쪽 팔과 다리가 이상하리만치 무거웠기 때문이다.


너의 두려움이 맞았다.


K는 뇌출혈로 반신불수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살아만

있으면

된다던

너는

절망했다.


이래서 신은 욕심 많은 인간과 약속을 하지 않는다.


K가 회복할수록

너는 막내가 못 견디게 보고 싶고

밤낮없이 졸렸다.


독한 약을 복용하며 젖 뗀 지 열흘이 넘었는데 마르지 않고 배꼽까지 흘러내렸다.


너는 입원 병동 화장실에 가려고 문을 나섰다. 중환자실 화장실은 걸레 썩는 냄새가 심하게 나서 발 들이기 싫었다.


화장실에서 훌쩍거리며 유축기로 젖을 짜는데 어떤 아기 엄마도 젖을 짜서 버리며 울었다. 너와 아기 엄마는 울면서 짧은 근황을 주고받았다.


우리 막내는 아빠가 아파서 젖을 못 먹고

그 아기는 병에 걸려 젖을 못 먹고


너는 가슴이 너무 아파 간절히 기도했다.

그 아기도 얼른 회복해서 젖을 먹게 해달라고.


간호사들은 모든 일을 잘할 줄 알면서 성의껏 하지 않았다. 네가 외출한 사이 간호사가 석션을 하면 K 앞섶이 축축하게 다 젖고 석션기 줄도 배배 꼬여 대롱거렸다.


젊은 외과 의사는 뇌수술로 의식불명이 된 환자 머리에서 피 묻은 붕대를 벗겨내며 감정을 제대로 잡고 노래 불렀다.


J 스치는 바람에 - ♪♬

J 그대 모습 보이면♪♬


너는 그 외과 의사를 칭찬해야 할지, 흉봐야 할지, 이해해야 할지 감정이 복잡했다.

keyword
이전 04화죽을 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