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은인
파리 피카소 박물관
시어머니는 K가 사업을 하다 사기당한 게 아니라고 확신하며 이를 갈았다. K 사무실을 가봤던 너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하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돈 전부 가난한 너의 집에다 갖다 바쳤지? 느 엄마가 마음 약한 우리 K를 꼬드겨서 못나 빠진 딸년을 비싸게 팔아먹은 거지 뭐. 귀신은 속여도 나는 못 속인다!”
너는 어이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떡하니 딸을 낳더니 도둑질까지 하고. 한마디로 너는 우리 집에 살 자격이 읎어!”
너는 무언가 해 보겠다고 열심히 뛰어다니는 K가 집에서 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 돌아오고 있었다. 설 연휴였다.
설날 아침 떡국을 끓였다.
K가 말했다.
“어머니 떡국엔 후추가 들어가야 제맛이 나요. 후추 좀 주세요.”
시어머니가 코웃음을 쳤다.
“처자식까지 끌고 와서 늙은 에미 피 빨아먹는 주제에 후추 같은 소리 하고 자빠졌네.”
시어머니의 잔소리와 욕설로 귀에 딱지가 앉은 K는 쩝쩝 입맛을 다시며 허허 웃어넘겼다.
너는 설 연휴 마지막 날 윗방에 있는 K를 불러 시어머니 옆에 앉으라고 했다. 아무리 들볶아도 말없이 견디던 네가 왜 저러나 싶은지 시어머니가 불안한 표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너는 시어머니가 입에 달고 살던 이야기를 낱낱이 폭로했다.
K가 화를 내며 어머니! 하고 소리쳤다.
시어머니가 띄엄띄엄 말했다.
“그동안 내가 심했던 모양이구나. 이렇게 사과하마.”
너는 시어머니의 미안한 마음이 사라지기 전에 서둘렀다.
“어머니 저희 곧바로 살림 내주세요!”
시어머니가 펄쩍 뛰었다.
“세 식구가 워디서 살라구?”
“자취방 있잖아요.”
“뭐여? 그래 좋다. 방은 그렇다 치고 뭐 먹고살라구? 호랭이보다 더 무서운 게 살림인디!”
호랑이보다 시어머니가 더 무서운 너였다.
“K가 돈 벌면 되지요. 그보다 출산 때 찢어진 생채기가 곪아서 걸을 수도 없고 악취가 진동해서 얼른 치료해야겠어요.”
시어머니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더니 말했다.
“말은 안 했다만 진즉 큰집에 느덜 전세금 백만 원 맽겨 놨어야. 이참에 방까지 구해놓고 오니라.”
K의 형 집과는 아주 멀고
K의 누나 집과 가까운 곳에 방을 얻었다.
이사는 두 달 뒤에 하기로 했다.
이사가 결정되자 너의 호흡곤란 증세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시어머니는 당신이 직접 받아서 같이 산 손주는 처음이라며 아기와 헤어져 어떻게 살아야 할지 이루 말할 수 없이 섭섭하다고 했다. 백일 안 돼서부터 영특한 아기는 시어머니가 말을 걸면 간이 녹을 만큼 예쁜 옹알이로 대답했다.
옹알이는 간드러졌지만
아기는 절대 웃지 않았다.
그늘진 네 마음이 담긴 젖을 먹어서 그럴 것이다.
아기에게 젖 먹이는 엄마는 무조건 행복해야 했다.
치료가 끝나고 시댁으로 돌아온 며칠 뒤였다. K의 형이 교회에서 시어머니와 같이 예배를 보고 와서 너한테 무조건 살림 나면 어떡할 거냐고 다그쳤다. 뚜렷한 대책이 없었던 너는 우물쭈물했다.
“K는 사업한답시고 헛바람이 잔뜩 들어서 취직도 물 건너갔어. 있는 돈 날리기 바쁜 허풍선이지 돈 버는 위인이 못 된다고. 우리 집 문간방 비울 테니까 그리 와. 거기 살면서 우리 애들 셋 돌보고 우리 학교 학생들 모집해 줄 테니까 제수가 과외해서 돈 벌어!”
너는 싫다고 딱 잘랐다.
K의 형은 집과 먹고 살길까지 해결해 주면 고맙다고 인사는커녕 싫다는 게 말이 되냐고 화를 냈다.
K의 형이 왔다 간 뒤 시어머니 태도가 급변했다. 동생을 저렇게 위하는 형은 세상에 다시없다고 감동하며 선언했다. 큰집으로 가지 않으면 살림을 내주지 않겠다고.
너는 아기 예방 접종하러 시내 나가는 날 K의 누나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지혜롭고 통찰력이 뛰어난 K의 누나였다. 말없이 너의 이야기를 듣더니 걱정하지 말고 얼른 집으로 가라고 했다.
이튿날 시골집에 온 K의 누나가 시어머니한테 딱 두 마디 했다.
왜? 작은며느리를 큰아들네 종살이시키지 못해 안달하느냐고.
백만 원 내놓기 싫어서 수 쓰는 데 왜? 그걸 모르느냐고.
너는 무사히 분가했다.
구겨진 은박지 같은 6개월여의 시골살이였다.
무얼 먹고 살아갈 거냐고?
시어머니가 준 쌀 한 가마니!
실력 있는 K를 믿는 너는 조금도 두렵지 않았다.
분가한 지 열흘 만에 K는 학교로 첫 출근을 했다.
K의 매형이 주선한 것이다.
K의 누나는 하늘이 내려준 너의 은인이었다.
20. 롤러코스터
2019년 11월 23일 촬영
K가 학교에 근무하는 10년 동안 저축한 돈으로 너희는 번듯한 내 집 마련이 코앞에 있었다.
그때부터 K의 형은
너에게 반말을 하지 않았다.
변한 사람은 또 있었다.
시어머니였다.
시어머니가 은근히 너를 구슬렸다.
“야이, 니가 해주는 밥 먹다 죽고 잡다. 시골에 있는 논밭 전부 줄 텡께 나도 느덜하고 같이 살자!”
너는 대답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시어머니를 잘 아는 너였다.
누구보다 K의 형과 형수를 잘 아는 너였다.
시집온 지 한 달도 안 됐을 때 K의 형수는 이를 윽물며 말했다.
서방님 몫은 논 서 마지기 있으니까
어머니 재산은 전부 우리 거야!
시어머니가 같이 살자고 한 지 한 달 만에 K가 쓰러졌다.
시어머니 간청을 듣지 않아 벌을 받았나?
너는 고개를 저었다.
더 큰 벌을 받는다고 해도 아닌 건 아니었다.
K는 퇴원 후 석 달 만에 걸었다.
K의 형수가 낮에 아기를 돌봐주는 연말까지 너는 무조건 K의 회복에만 전념하기로 했다.
K는 너와 같이 계단을 내려가 택시를 타고 대학병원과 한의원을 오갔다.
마비된 왼발은 잔뜩 오그라들며 뒤집혀 K의 걸음은 지켜보기 민망할 정도로 절룩거리고 느렸다.
하지만 그게 어딘가?
“다른 사람 같으면 병난 날 죽었어. 기적을 일으킨 사나이라 이렇게 걸어서 병원에 가는 거야. K 참 대단해. 혹시 당신 불사신 아니야?”
낙망하고 비관해서
너는 칭찬에 약한 K를 계속 부추겼다.
K는 뇌출혈 당시 솟구친 피가 시신경을 덮어
시각 장애 2급이었다. 시각 장애 중 시야 장애는 눈앞이 흐리고 군데군데 안 보여 퍼즐 맞추듯 한동안 눈동자를 굴려야 사물을 알아볼 수 있다. 그래서 지나가는 사람이나 자동차는 전혀 몰라본다.
인체의 생리는 위기에 닥치면 생명 살리기에 집중한다고 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K의 인체도 피부 면역력까지 생명 살리기에 동원되었다. 그래서 피부 면역력이 없다. K는 평생토록 피부 방어기제가 없어 병균이 침투할 때마다 고생해야 한다. 상처가 잘 낫지 않고 검버섯과 기미와 물사마귀와 잡티가 온몸에 돋아났다. 가장 두드러지고 심각한 부위는 두피였다. 약을 보름만 안 바르면 바짝 가문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며 피가 나고 진피층까지 팥시루떡 켜처럼 들고일어났다.
심각한 후유증을 보니 K가 살아난 게 기적이라는 의사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시어머니는 텃밭에 심은 부추를 베어 다른 찬거리와 함께 목이 꺾일 정도로 이고 왔다.
“정구지는 금방 물릉께 거실에다 신문지 깔고 넓고 얇게 펴 널어라!”
시어머니는 부추를 냉장고에 보관하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저녁 숟가락을 놓자마자 실컷 자고 밤중에 일어나 너에게 밤새워 부추를 뒤집으라고 종용했다.
부추!
부추!
끝없이 뒤집어야 하는 부추!
그것으로 모자라 K 관절 운동을 해주면 몸서리를 치며 뜯어말렸다.
“야가 야가 시방 뭔 지랄이랴. 즈 서방 팔다리를 마디마디 비틀어 몽땅 잡아 빼놓고 자빠졌네. 니가 가만히 놔뒀으먼 걸음걸이가 반듯했을 거 아녀?”
시어머니는 이틀에 번씩 와서 장독을 열어보고 잔소리하며 어김없이 부추 다발을 꺼냈다.
너는 극도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렸다.
고소공포증 환자가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21. 두 번째 첫 출근
2023년 암스테르담 스키폴공항
K는 9월 1일 첫 출근을 했다.
2개월 병가와 1년 휴직이 끝났기 때문이다. 병난 뒤의 첫 출근이니까 두 번째 첫 출근인 셈이었다.
너는 온종일 설렜다.
K는 5시에 퇴근해 힘없이 보조기를 벗고 방으로 들어가 8시까지 목을 놓아 통곡했다. 수업을 맡기지 않았다고 했다. 명분만 그럴싸한 출근이었던 것이다.
거동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하고 말도 어눌한 교사한테 학생을 가르치라고 할 학교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는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출근했다. 학교에서 무얼 하며 시간을 보냈냐고 물었더니 교무실에는 자리가 없어 혼자 체육실에 있었다고 했다.
K도!
학교도!
서로가 못 할 노릇이었다.
K는 4개월 출근하고 권고사직을 당했다.
시어머니는 누군가가 오리 피를 장복하면 낫는다고 했다며 그날로 달려와 얼른 구해다 먹이라고 종용했다.
그 말을 듣고 K가 소리쳤다.
“어머니, 제발 좀!”
주변에서도 유명한 기도원을 찾아가라, 침술이 최고다. 금방 마비가 풀리는 중국 약을 먹어라, 갓 낳은 쥐새끼 열 마리를 먹으면 멀쩡해진다 등등 병 하나에 검증되지 않은 처방이 수십 가지였다.
누구보다 빨리 낫고 싶었을 텐데
K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너는 그런 K가 고맙고 존경스러웠다.
시어머니는 밤낮없이 땅이 꺼지게 장탄식을 늘어놓았다.
"니가 지지리 재수 없고 복이 없어서 K가 병신 됐고 이제 머잖아 느덜 다섯 식구는 거지가 되어 땅에다 입을 질질 끌고 다니다 끝내는 굶어 죽고 말 거다!"
이대로 더는 살 수 없었다.
너는 막내 업은 포대기 끈을 바짝 묶으며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 그렇게 복 많은 어머니는 왜 서른넷에 아버님을 땅에 묻으셨어요? -
이 말이 혀끝을 유혹했지만 차마 밖으로 내보낼 수는 없어 이렇게 바꾸었다.
“어머니, 당분간 저의 집에 오지 마세요!”
시어머니는 아이고 댐을 놓으며 돌아가 발길을 끊었다. 너의 집에 보낼 찬거리는 K의 형 집으로 이고 가서 가져다주라고 했다.
집은 다시 낙원이 되었다.
앞으로 무엇을 할까? 너는 K와 머리를 맞대고 직업을 모색했다.
K는 너에게 한의대에 진학해 한의사가 되라고 했다.
아주 멋지고 장대했다.
그 꿈을 이루기에는 큰 걸림돌이 있었다.
너는 공부를 잘할 자신이 없었다.
대학교 근처에 집을 지어 하숙을 칠까?
K와 함께 있을 수 있고
아이들도 마음껏 보살펴 정서적으로 안정될 테고
아주아주 좋았다.
하지만 너는 음식 솜씨가 없었다.
손해사정인 시험을 볼까?
피투성이가 되어 이성을 잃은 남자들한테 밤중이나 새벽에 연약한 여자 혼자 교통사고 현장에 나타나는 건 위험하다고 시숙이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 말은 옳았다.
문구점을 할까?
시숙은 당신 학교 부근 문구점을 강력하게 추천했다. 누구의 간섭 없이 독립적으로 살고 싶었던 너는 얼른 문구점을 제외했다.
공무원 시험을 준비할까?
이번에는 발길 끊었다 서너 달 뒤부터 슬금슬금 드나드는 시어머니가 펄쩍 뛰었다. 바닷가나 먼 시골로 발령 나서 몇 년 동안 집에 안 오겠다는 거나 마찬가지 아니냐고!
K는 업무상 재해 인정을 받았다.
매월 연금을 받게 된 것이다.
후유!
너는 한시름 놓았다.
K 대학 선배가 너에게 일자리를 주선했다. 상담센터 직원인데 근무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라고 했다.
너와 K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22. 너 없는 사이
크리노이드 : 2025년 10월 8일 컴퓨터 바탕화면
너는 비로소 사회인이 되었다.
6.25 전쟁으로 폐허가 된 불모지에서 급성장한 우리나라였다. 단기간에 선진국이 되면 몇 가지 후진국 특성이 남는데 그중 하나가 우리나라의 상담문화였다. 상담은 정신과 병원에서만 이루어진다는 편향적 사고가 사회 전반에 깔려 있을 정도였다. 상담학이 학문적으로 자리 잡은 건 19780년대에 이르러서였고 그때부터 전문 상담가를 양성하고 상담센터 등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불타는 투지에 비해 상담센터 업무는 지극히 단순하고 한가했다.
융통성 없고 성실하기만 한 너는 한가하면 책을 읽고 글도 썼다.
근무한 지 두 달이 지났다.
사정이 급변했다.
상담사가 시간 맞춰 오지 않으면 센터장 대신 네가 상담 전화를 받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었다. 가끔 있는 일일 테니 받아들이기로 했다.
문제는 가끔이 아니었고 센터장한테 긴급하다는 전화를 받으면 늦은 밤이나 주말에도 몇 시간씩 근무했다. 근무 외 수당 한 푼 없이.
네가 그만두려고 주춤거리면
K가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내담자의 성별과 연령대와 직업과 고민의 내용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다양했다. 연장근무가 대다수가 돼버리자 몸이 힘들고 의도적으로 상담사를 괴롭히는 내담자가 많아 마음은 더 지쳤다.
하루에 한둘
희망을 찾는 내담자가 있었다.
그 벅찬 보람이 너의 발길을 센터로 이끌었다.
너는 몰랐다.
너 없는 사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네가 밤늦게까지 내담자의 고민을 들어줄 때 K는 아이들을 주먹으로 때리고 발로 차서 공포에 떨게 했다.
명분은 언제나 좋았다. 올바른 사람 만들기와 성적 향상이었으니까.
밤 10시 퇴근해 늦은 저녁을 먹으면 아이들이 수저를 들고 밥상에 둘러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너는 그 시간이 사무치게 행복했다. 그때마다 K가 소리쳤다. 아까 저녁 먹었으면서 공부는 하지 않고 쓸데없이 시시덕거리며 앉아있다고. 이루 말할 수 없이 속상했지만 물러터진 너 때문에 성적이 오르지 않는다는 말에 반격도 하지 못하고 K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이웃들이 조심스럽게 너에게 말했다.
K가 아이들을 너무 심하게 때린다고! 네가 격분해서 아이들 때리지 말라고 하면 기분 나빠하면서도 조심했다. 하지만 네가 없으면 더더욱 심한 폭행을 가했다.
너는 질 높은 상담을 위해 대학원에 진학했다. 30년 근무한 너는 수많은 상패와 자서전을 안고 영광스럽게 퇴직했다. 직업인으로도 성공했고 가정도 잘 이끌었다며 너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가끔 K와 소풍 가고
부부 동반 모임 네 군데 참석하고
친구들과 만나 식사하고
한 달에 두 번 봉사하고
본격적으로 상담에 관한 책을 집필하고
너는 이상적인 노후를 보내고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낯선 가족 상담사인 네가 나타났다.
낯선 상담사인 너는 날카롭게 너한테 질문했다.
“K가 병난 뒤 너를 한 대라도 때렸다면 어떡했겠니?”
너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K와 당장 헤어졌을 거라고.
낯선 상담사인 네가 비웃었다.
“그런 주제에 아이들은 죽을 만큼 얻어맞아도 가만히 있었다고?”
너는 흠칫 놀랐다.
낯선 상담사인 네가 거침없이 말했다.
"물론 몰랐다고 핑계 대겠지. 몰랐다고 용서받을 수는 없어. 모르는 게 죄일 때가 훨씬 많으니까. K는 심적으로 힘들거나 너한테 불만이 생기면 무조건 아이들한테 화풀이를 했던 거라고. "
너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너는 입만 열면 아이 셋 낳은 게 자랑스럽다고 떠벌이더라. 낳기만 하면 뭐 하니 잘 키우지도 못했으면서? 이 세상에 너처럼 이기적인 엄마는 없을걸? 폭력은 살인이나 다름없는 거야. 너는 엄마가 아니라 살인 방조자였다고. 오죽하면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어머니를 세상에 보냈다고 했겠니? 어떤 이유로든 아이들한테 손댄 그 자리에서 K와 이혼했어야지!”
너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몇 달 동안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K 병나고 40년 지난 뒤에
상담사인 너를 통해 겨우 깨닫게 된 것이었다.
세 아이는 영혼까지 상처투성이가 되어 장년층에 이르렀다.
다 너 때문이었다!
23. 죽을 권리조차
2023년 영국 거리에서
2025년 7월 9일. K와 50년 동안 살았다. K는 유난히 먹는 걸 좋아했고 언제나 잘 먹었다. 그랬던 K가 열흘 전부터 밥을 먹지 않았다. 밥과 국을 입에 넣으면 욱하고 헛구역질부터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유와 과일은 잘 먹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기운 없다고 밤낮없이 잠만 잤다.
네덜란드 사는 딸과 사위와 두 손녀가 1년 만에 왔다. K는 무척 반가워하며 사위와 같이 밥을 먹겠다고 했다. 큰아들 도움으로 간신히 휠체어를 타고 나와 식탁에 앉았다.
K는 딸네 가족과 먹은 아침을 끝으로 다시는 식탁까지 나오지 못했다. 식탁에서의 마지막 식사가 된 것이었다.
딸이 너한테 말했다.
“아빠 이제는 진짜 요양원으로 모실 때가 되었네.”
“질펀하게 오줌 싸고 성질내면 화가 치밀어서 요양원 생각 안 한 거 아니야. 몸집이 커서 기저귀 갈기도 힘들고 약을 한 주먹씩 먹으니까 오줌 묻은 시트에서 냄새가 진동해서 미치겠더라.”
“그러니까. 왜 사서 고생하냐고요. 엄마라도 건강해야지.”
“일주일 정도 지나니까 요령도 생기고 완벽하려던 욕심을 버리니까 편해지는 거 있지.”
“엄마 큰아들이 무거운 아빠 들어서 힘겹게 휠체어로 옮길 때 얼마나 아슬아슬했는지 알아요? 저러다 크게 다치면 어쩌려고? 엄마 마음 하나 편 하자고 큰아들 고생시킨다는 생각은 안 해? 우리 집 희생양이야. 그만 좀 부려 먹어요!”
“아빠가 요양원 가기 싫다니까 이러지. 힘 닫는 데까지 내가 다할게.”
“이 상태가 아주 오래 지속될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겠어요?”
“감당하지 못할 정도가 되면 그때 요양원에 모시자.”
기적 같은 4년 전으로 사무치게 돌아가고 싶다.
네가 여행 가고 없을 때 K의 하루다.
시야 장애로 앞이 잘 안 보이고
편마비로 보행이 매우 불편했으나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신문 보고
냉장고에서 반찬 꺼내고
레인지에 밥 데워 먹고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현관 의자에 앉아 보조기 신고
엘리베이터 타고 내려가
복지관 차를 탔다.
K는 매일 복지관으로 갔다.
사람을 좋아하고 친화력이 뛰어나
복지관 다니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
오후 4시 반이 되면
복지관 차에서 내려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와
비밀번호 눌러 현관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 보조기 벗고
옷 갈아입고
저녁 먹고
빈 그릇 세척기에 넣고
이 모든 걸
혼자 해결할 수 있는
건강한 사람이었다.
2025년 7월 9일의 K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와상환자였다.
2030년 3월 13일 아침이 밝았다. K의 생일날이다. 너는 미역국을 끓이고 K가 좋아하는 전을 부치고 딸기와 오랜지를 씻어 상을 차렸다. 그 아침 K는 눈을 뜨지 않았다.
너와 55년을 살고 여든다섯에 훌쩍 떠난 것이다.
주변에서는 네가 희생했다고 하지만
K는 언제 어디서든 이렇게 말했다.
너를 위해 산다고.
K가 없으면 하늘이 무너질 줄 알았다. 세상이 텅 빈 것 같아 눈물은 났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소화가 안 돼서 병원을 찾았다.
위암 말기라 9개월밖에 못 산다고 했다.
너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고통은 지나치게 두려웠다.
딸한테 전화가 왔다.
"엄마 어떻게 지내?"
선뜻 입이 안 떨어져 더듬더듬 상황을 설명했다.
딸이 선선하게 잘 아는 의료기관 있으니까 얼른 네덜란드로 오라고 했다.
너는 부지런히 주민센터와 병원과 법원을 오가며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서류를 갖추었다.
2030년 9월 1일 오후 4시 비행기가 인천공항 활주로를 벗어나 이륙했다.
너는 몹시 아까웠다.
사후 장기 기증을 유전자가 같은 한국인에게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는 장기 기증률이 매우 낮아 기증자를 기다리다 생명을 잃는 환자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보건복지부는 2025년 10월 16일 심정지 상태에도 장기 기증이 가능하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하겠다고 발표했고 이듬해부터 시행되었다. 그랬음에도 장기는 여전히 부족했다.
그때였다.
구름밭에서 낯익은 가족사 상담사인 네가 나타났다.
“너는 끝까지 이기적이구나. 아이 셋을 산지옥에 빠트려 죽을 권리조차 없는 주제에 안락사하러 네덜란드까지 가시겠다?”
너는 아이 셋에게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사과하며 참회의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또 너를 조롱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 진즉 깨달았어야지!"
2035년 너의 고국 대한민국도 안락사가 합법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