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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솔 Jul 27. 2022

공무원스러운 일처리에 당한 날

기다림은 손해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지난주에 일어난 일이다. 회사에서 모 정부지원사업을 신청하려 공고문을 읽어보는데, FAQ에 '자세한 건 운영기관에 문의하세요'라고만 나와있고 답변을 제대로 달아놓지 않은 문항이 있었다. 정부기관에서 사설 협회에 위탁해 진행되는 사업이라 나는 운영기관인 사설 협회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사설협회의 담당자님은 내가 궁금해하는 것에 대해 전혀 모르고 계셨으며 정부기관에 문의를 해야할 것 같다고 답을 주셨다. 이건 공조직에서 일해본 짬이 있는 내가 봐도 사업을 맡은 정부 부처에서 답변을 해야할 사항이라 우선은 '1차 넘어감'을 했다.


 정확히는 중앙행정기관이 아닌 지방청에 문의를 해야 했다. 지방청이 먼저 공문을 작성해 사업에 지원하는 회사들에 전달을 해야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의 회사가 속한 ㅇㅇ부 서울청 사이트에 들어갔지만 조직도가 없어 담당직원의 전화번호를 찾을 수 없었다. 나와있는 것은 사이트 하단에 작게 실린 대표 상담번호뿐.  일단 이 번호에라도 전화를 걸어 상담사님께 내가 궁금한 사항을 말씀드렸다. 돌아온 상담사님의 대답은, '운영기관인 협회에 전화를 하셔야합니다~ 연락처를 알려드릴까요? 02-...' . 나는 이미 거기에 전화를 걸고 여기에 전화를 거는 거라고 말씀드리고 싶었지만 매뉴얼대로 응대할 뿐인 이 분께 무슨 잘못이 있을까. 나는 감사합니다라고 말한 후 전화를 끊었다. 여기까지가 '2차 넘어감'이다.


 직통번호를 찾을 수 없으니 인터넷에 문의글을 남기기로 했다. 마침 지방청 사이트에서 바로 국민신문고 민원을 접수할 수 있었기에 나는 아주 예의있게(마지막에 '천천히 회신 부탁드립니다' 까지 붙였다!) 질문글을 작성했다. 그런데 몇 시간 뒤에 내가 접수한 민원이 중앙기관으로 이관되었다는 문자가 날아오더라. 내가 지방청에 접수한 민원을 왜 '친히' 중앙기관으로 넘기는 거지? 민원 접수가 완료되니 중앙기관의 담당자 직통 연락처가 띄워졌으나 나는 민원 처리 기한인 일주일 동안 기다려주기로 했다. '그렇게' 여유를 부려도 될 일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었기에, 담당자에게 연락해 빨리 답변을 달라고 재촉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3차 넘어감'이자 나의 작은 배려였다.


 6일이 지났다. 내가 접수한 민원의 처리기한이 끝나기까지 하루가 남은 날의 오후 5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그러나 딱 봐도 전화번호가 정부기관의 것처럼 생겼기에 나는 바로 사무실에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ㅇㅇ부의 ㅇㅇㅇ라고 합니다.' 사실 나는 여기에서부터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내 경험상 담당공무원이 국민신문고 민원에 전자 서면으로 답변을 주기 전에 전화를 한다는 것은 안 좋은 징조가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의 직감은 통했다. ㅇㅇ부의 ㅇㅇㅇ님은 본인에게 민원이 배정된 것은 맞으나 관련 사항은 지방청의 소관이므로 본인이 답변을 할 수 없기에 이 민원은 지방청으로 이관을 하겠다고 했다. 나는 이런 대답을 들으려고, 6일을 기다렸던 것이다. 이 공무원 분이 하시는 말씀에 안타깝다는 뉘앙스가 담겨있기는 했지만 6초 동안 훑어보고 바로 이관할 수도 있던 내 민원을 6일이나 지체시키게 한 점에 대한 사과는 한마디도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를 내가 감히 추측하건대 이 분은 이게 진심으로 본인의 책임은 아니라 생각하시기 때문일 테다. 애초에 국민신문고 담당자가 엉뚱한 사람에게 민원을 배정해 일어난 사달이고, 너무 바빠서 이제야 내 민원을 확인했을 뿐인데, 이걸 본인의 잘못이라 인정하기엔 억울하셨던 거겠지. 나는 여기서 화내봤자 달라지는 게 없겠단 생각에 '3차 넘어감'을 했다.


 결국 나의 민원은 처음에 접수된 지방청으로 다시 이관되었다. 그 다음날 아침 바로 지방청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그거는 이렇게 이렇게 하시면 됩니다.' 한 줄짜리 설명이었다. 이어 이런 부탁이 따라왔다. '그래서 말인데, 민원 취하해주실 수 있을까요? 민원처리하는 과정이 복잡해서.' 나는 알겠다고 대답하곤 전화를 끊었다. 나 빼곤 모두가 행복한 결말을 맞았다.


 나는 이 일을 겪은 후 '내가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던 몇 번의 순간들'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지방청에 접수한 민원이 왜 중앙기관으로 이관되었냐고 전화를 해 물어볼 수 있었고 민원 접수한 지가 N일짼데 아직도 답변이 없냐고 재촉할 수 있었고 민원을 넣은 지 6일 만에 전화를 해서 나에게 할말이 그것밖에 없냐고 화를 낼 수 있었다. 이 순간들을 자의로 놓친 건 나의 얄팍하다면 얄팍한 공감능력과 배려심이었다. 안 그래도 나 말고도 다른 민원 많아서 힘드실 텐데 나까지 짐을 얹어드리지 말자, 하는.


 그러나 내가 6일을 기다려 한 줄짜리 답을 받아낸 것을 회상하면 나의 의사결정에 심각한 하자가 있었나 고민하게 된다.


 의미없는 가정을 해보겠다. 내가 만약 민원을 넣은 당일에 담당자의 연락처에 전화를 걸어 난리를 피웠다면 나는 하루도 우습고 한 시간 만에 답변을 얻어낼 수 있었을지 모른다. 실제로 전화를 하든 직접 찾아가 난리를 피우든 공무원을 괴롭히면 '공무원의 업무에 없던 일도 해주고' '없는 법령도 유권해석을 해주는' 마법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조금 손해를 보면서 살더라도 내가 소중히 여기는 가치는 꼭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이렇게 최악으로 나오는 날에는, 누구 좋으라고 이러나 싶은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내가 공무원으로 일할 때 가장 답답함을 느낀 부분도 이와 일맥상통한다. 비슷한 사례여도 떼 쓰면 해주고 조용히 돌아가면 안 해주고, 같은 공무원인데 민원인이 소리 지르면 꼼짝도 못하다가 행동거지나 말투가 순해 보이는 민원인에게는 같은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안 된다고 으름장을 놓고. 이게 딱히 공조직만의 문제는 아니겠으나 개선의지가 없는 것은 분명 문제다. 오죽했으면 내 이전 근무지에 공공근로를 하러 왔다가 나랑 안면을 튼 3살 아래의 동생이 이런 평을 남기더라. '소리지르면 다 되네요.'


 소리를 지르고 덤비는데 끝의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은 기대도 안 한다. 다만 '공무원을 힘들게 하지 않는'(=상식적이고, 소리를 지르거나 욕을 하지 않으며, 공무원과 대화를 할 준비가 되어있고, 모든 업무처리 방식은 법에 근거를 둔다는 사실을 아시는 분) 민원인에게 코딱지만큼의 보상도 없이 외려 손해를 보게 하는 관행은 사라지길 기대해봐도 되지 않을까. 그러니까, '강강약약'까지는 못하겠으면 적어도 '강약약약'은 해달라는 뜻이다.


 기다림이 미덕이 되고 모든 미덕이 손해로는 이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좀 더 개인적으로는 내가 한 '담당자 분이 많이 바쁘신가 보다. 기다려드리자.'라는 생각이 '뭣하러 6일이나 기다리고만 있었냐. 전화를 해보지'라고 바보취급받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다. 진심으로 그런 세상이 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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