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미니멀리스트가 되는가
적게 소유하기 #2
성수동 팝업스토어가 뜬다거나 와이드 팬츠 등 복고풍 패션이 다시 대세가 됐다거나 하는 좁은 의미의 유행의 경우 인간이 거부하거나 선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반면 특정한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는 사람들에게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적 유행은 불어오는 솔바람과 같아서 저도 모르는 사이 스며들어 잔향을 남긴다.
전 세계적으로 미니멀라이프 열풍이 분 지 10년이 지났다. 포틀랜드의 킨포크나 덴마크의 휘게와 같은 라이프스타일이 진부한 단어로 전락한 웰빙과 웰니스의 바통을 이어받았다. 스티브 잡스나 마크 저커버그 등 내가 팔로우한 슈퍼리치 '이웃'이 생산성을 위해 의복을 제복화하는 모습은 미니멀라이프라는 단어에 성공이라는 환상까지 불어넣었다. 여기에 동일본 대지진으로 소유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는 일본 에세이들이 호응을 얻으면서 텅 빈 방에 홀로 앉아 있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스트의 이미지가 형성된다. 미니멀라이프라는 단어는 누군가에게 사상이자, 누군가에게는 자기 계발의 촉매이며, 누군가에게는 구원이 된다. 한번 시도해 볼 만한 삶의 양태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미니멀라이프를 바라보는 관점이 다양하기에 행하는 방식도 제각각이다. 27만 명 회원을 보유한 네이버 미니멀라이프 카페나 각종 블로그, 국내외 유튜브를 보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미니멀라이프인가요?', '내가 생각하는 미니멀라이프'와 같이 자신의 카테고리를 정의하는 일에 진심이다. 재밌게도 모두가 이 주제의 결론은 '각자의 미니멀라이프를 실천하면 된다'로 귀결된다는 것을 예감하는 듯 하지만 중독적인 공감과 위안의 릴레이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십수 년 넘게 미니멀라이프 콘텐츠를 가까이하며 매일같이 적게 소유하는 것에 대해 생각해 왔지만 나는 바로 이 대목에서 스스로 미니멀리스트라고 칭하거나 미니멀라이프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기 망설이게 된다.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미니멀라이프' 그 자체를 정복하려는 이들의 마음과 게임을 잘 수행해내고 있음을 확인받고자 소유물의 숫자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하는 욕망을 본의 아니게 엿볼 때면 영화 '매트릭스'의 기묘함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어쩌면 나 역시 시대와 사회가 교묘하고 은근하게 설계한 유행을 좇을 뿐인데 마치 대단한 결심으로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다고 믿는 것은 아닌지, 그 단어를 입에 올릴 때면 떨칠 수 없는 의심이 드는 것이다.
새롭게 제안된 삶의 양식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 원리는 무엇일까? 자연법칙에 따르자면 인간의 가장 큰 목표는 생존일 것이다. 이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우리 스스로 그것을 좋다고 받아들이도록 뇌의 신경세포들이 그것을 좇으라고 명령했을까? 현대사회의 복잡함에 대항하느라 생명력을 소진하고 있으니 이제 그만 산만해지고 단순함을 찾으라고 말이다.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이 제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소구 하는 이유는 당연히 그게 좋아 보이기 때문일 것이다. 무언가가 좋아 보이려면 안 좋은 것 혹은 덜 좋은 것이 있어야 한다. 뇌과학과 심리학을 깊이 이해하지 못하는 점을 미리 말해두면서, 나는 본질적으로 미니멀라이프의 씨앗이 '소란'이라는 안 좋은 것을 인지하는 지점에서부터 발아한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소란함은 엔트로피처럼 계속 증가해 왔다. 경쟁하고 비교하는 삶, 과도한 책임이 주어진 삶, 현재를 즐기기보다는 미래를 위해 모으거나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삶. 좋은 것과 나쁜 것, 더 좋은 선택과 그 선택의 가능성, 평가와 판단으로 끊임없이 가동되어야 하는 뇌, 해야 한다와 하지 말아야 한다를 넘어 무한히 반복되는 선택의 갈래. 자기주장과 경청 사이,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과 예의를 지키는 것 사이, 불합리한 일에 나서는 것과 못 본 척 지나치는 것 사이, 세상이 인간에게 끊임없이 던지는 무수한 선택지는 어느 순간 필요임계점을 넘어 폭력적인 소음이 되어 버렸다.
피로한 소음사회에서 사람들은 고요함을 갈망한다. 우리 일상의 수많은 사람과 물건 가운데 오직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과 필수적인 것만을 남겨두자는 마법 같은 메시지는 그 이외의 것을 소음으로 여길 마음의 태세를 갖추게 한다. 아무것도 없는 집, 배낭 하나면 충분한 삶. 고요함 그 자체다. 우리는 왜 미니멀리스트가 되는가?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나를 둘러싼 소란을 벗어나 자유를 누리고 싶기 때문이다.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 향하는 길은 무척이나 어렵다. 엔트로피는 역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기실 인류는 언제나 소유를 늘려오는 방향으로 진화해 왔다. 남의 것이라도 좋아 보인다면 빼앗아서라도 갖고 싶은 것이 DNA에 기록된 인간의 본성. 본성과 다른 것을 기어이 내재화하려면 필연적으로 괴로워진다. 예쁘고 좋은 것을 사고 싶은 본능과 그것을 사는 순간부터 싫증이 찾아온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이성이 다투는 과정은 지난하다. 무엇이든지 사라고 부추기는 사회와 시시때때로 다투는 통에 간소한 삶을 살며 신경 쓸 일을 줄이겠다는 지향점에 이르지 못한다. 오히려 새로운 걱정거리와 불필요한 수많은 생각을 '소유'하게 되고 만다.
많은 미니멀리스트들이 이러한 자기모순을 극복하지 못하고 좌절하거나 타협한다. 일반적으로 새로운 주장이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을 때 사회는 정반합의 과정을 거쳐 그것을 판단한다. 반짝이는 말들 가운데 결국 살아남는 것은 인간의 본성과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에 미니멀라이프가 메이저리티로 올라설 수 없는 이유는 자본주의 사회의 우수한 생산력과 고도로 발전한 마케팅의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인간사회가 본질적으로 소유를 통해 생존하고 무소유가 그 본성을 이겨낼 수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렇게 보자면 미니멀라이프는 디톡스의 일종이다. 물건을 버리는 일은 디지털 디톡스고 방을 비우는 일은 도파민 디톡스다. 본성을 이겨내는 일이고 자신을 통제하는 것이다. 사실 제로 웨이스트와 갓생 살기의 작동 원리도 다르지 않다. 미라클 모닝은 어떤가? 경제적 자유는? 그리고 이 모든 개념은 대체 어디서 왔는가? 결국 이 모든 것을 온전히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되는 순간부터 그것을 추구한다고 말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이러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겐 적게 소유하는 삶을 향한 열망과 그곳에 닿기 위한 충분한 연료가 있다. 이 글을 불쏘시개로 쓰면서까지 불씨를 이어가는 셈이다. 미니멀리스트라고 자칭할 수 없지만 여전히 그런 삶을 추구한다니. 유행을 따르면서도 불나방 대접은 싫은 걸까. 허영이 아니라면 오만이다. 대답해보자. 나는 왜 여전히 적게 소유하는 삶을 열망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