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퇴사의 가벼움
퇴사, 안되면 뭐 비슷한 거라도 #에필로그
퇴사는 절대 가볍지 않다.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을 때 하고 싶었던 말이다. 난 입사할 때만 해도 길어야 여기서 3년을 넘기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할 줄 알았다. 하지만 월급이 굴리는 쳇바퀴에서 뛰어내리는 일이 정말 쉽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원래 가진 돈이 많고 적고의 문제를 넘어선다. 우리 모두가 입만 열면 퇴사를 얘기하지만 언제나 푸념에 그친다. 퇴사하면 뭐 할 건데? 돈은 있고? 꿈은 꿈이고, 퇴사는 그렇게 가볍지 않았다.
후배들이 회사를 떠나 로스쿨에 진학하고 파이어족 열풍이 몰아칠 때도 나는 퇴사를 선택하지 못했다. 다음 시작이 어려울 것 같아서? 그것도 반은 맞다. 근데 밥벌이는 원래 어렵다. 누군가에게 시간을 주는 대신 돈을 받는 일 아닌가. 근로자라면 지금 이 사람이 아니더라도 결국 다른 누군가에게 어차피 시간을 주고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그 시간은 돈을 준 사람의 것이니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본업은 적당히 하고 자투리 시간을 잘 사용하면서 원하던 일을 할 수도 있었다. 시도를 안 해본 것은 아니지만 나는 천성이 일과 삶을 분리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본업을 대충 하겠다는 마음가짐으로는 하루 8시간을 허비하는 느낌이 들었고 그런 식으로는 만족과 행복을 지속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든 내 이름을 걸고 하는 일인 만큼 본업을 대충 하고 싶지도 않았다. 게다가 자투리 시간에는 할 수 있는 재밌는 일이 너무 많다!
나는 다르게 접근하기로 했다. 꿈을 향해 훨훨 날아가지도 못하고 가진 것을 내려놓지도 못하니 이 안에서 최대한 발버둥을 쳐보기로. 고상하게 얘기하자면 경제력과 고용안정성을 유지하면서도 분야를 바꿔가는 방식을 택했다. 회사 안에서 조금이라도 좋아하는 영역과의 연결고리가 있는 일을 찾은 뒤에 과감히 지원해 경험해 보고 거기서 파생된 기회를 엿보는 방법이었다. 어차피 한 치 앞도 모르는 인생, 그렇게 새로운 일을 하다 보면 결국은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았다. 하고 싶은 일과 본업이 같지 않으니 그런 식으로 시간이 걸리더라도 본업을 내가 하고 싶은 일로 만들고 싶었다.
처음 영업사원으로서 내가 던져볼 수 있었던 카드는 품목 혹은 시장 변경이었는데 품목을 바꾸려면 아예 조직을 떠나야 했다. 게다가 다른 품목이래 봐야 결국 영업사원노릇을 하는 것은 같았고 여기서 쌓아온 걸 생각하면 조직을 바꾸기는 득 보다 실이 많았으니 담당시장을 바꿔보기로 했다. 기왕 회사를 다니기로 했으니 그만두기 전에 교환학생으로 지냈던 독일 시장을 담당하면서 몇 달 출장이라도 다녀오자는 생각이었다. 물론 그냥 '독일이 좋으니 독일영업 시켜주세요'는 회사에서 통할 리 없었다. 나는 중남미 영업을 하고 있었다. 시간이 필요했다.
기회를 엿보던 차에 입사 3년 차 들어 두 달 합숙 과정인 중국어 교육을 다녀왔다. 표면적인 명분은 커리어를 위한 역량 강화였지만 실상 그동안의 고생에 대한 보상 차원으로 마침내 얻어낸 기회였다. 당시 우리 조직은 회사의 캐시카우 역할을 했지만 직원들이 회사의 양성프로그램의 혜택을 받기가 어려웠다. 막상 모두가 바빠서 자리를 장시간 비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3년 차였던 해에 약간 기조가 바뀌었다. 좋은 성과를 계속 냈으니 주니어들을 키워야 한다는 여론이 생겼다. 나는 그 수혜를 받은 첫 케이스가 됐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그만두기 전에 앞으로 언젠가 중국으로 삼국지여행을 떠날 때 유용히 쓰겠다는 마음으로 합숙을 떠났다. 그런 마음으로 교육을 받으니 더할 나위 없이 즐거웠다.
교육에서 돌아와서는 곧바로 파견을 떠났다. 교육을 가기 전 연말 인사카드에 물류팀에 가면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고 써냈는데 알고 보니 조직에서 지원자가 나뿐인터라 돌아오자마자 자리를 옮기게 되었다. 별 볼 일 없는 조직이라 생각했거나 눈치 때문에 인사카드에 뭔가를 써내기가 부담스러워 사람들이 망설인 덕분이었다. 항구도시와 지도를 좋아했던 나는 거기서 합법적으로(?) 실컷 배의 제원과 항로를 공부했다. 언젠가 유럽의 바닷가 마을에서 항로 관련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대항해시대 덕후가 덕업일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상상의 즐거움이 있었다.
물류팀에 계속 있을 수도 있었지만 나를 원하는 부서가 있어 거절하지 않고 영업사원으로 조기 복귀했다. 물류팀 생활도 나쁘지 않았지만 지내보니 결국 그곳의 경험으로 덕업일치를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조직으로 돌아와 드디어 유럽 시장을 맡게 됐다. 곧 독일 출장도 갈 계획을 세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방콕으로 1년 미만의 단기주재를 떠나게 되었다. 태국은 모두가 가고 싶어 하던 주재지였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내가 하마평에 올랐다. 나는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다가 열심히 해보겠다며 수락했다. 기간은 짧지만 어쨌든 그만두기 전에 주재생활까지 해보는구나! 태국에서의 생활은 참으로 다채롭고 즐거웠다. 외국에 살면서 고객을 만나고 관계를 쌓아가며 비즈니스를 하는 경험도 뜻깊었다.
주재생활을 마치고 본사에 복귀한 이후로도 여러 차례 담당 시장을 옮겼다. 끝내 독일은 아니었지만 유럽 출장도 제법 다녀왔다. 그렇게 거의 10여 년 동안 옮길 수 있을 때마다 옮기다 보니 더 이상 이 회사에서 궁금한 업무도 없었고 내 몫으로 부서에 배부될 인건비가 높아져 무작정 옮기겠다고 손들기도 어려운 시기가 왔다.
이만하면 직장인 주제에 최대한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다. 다른 회사를 다녀봐야 진정 뜻깊은 경험이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서 아예 이참에 은퇴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고향의 아파트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게 바로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던, 2022년 2월이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가 없다는 말이 꼭 맞다. 발버둥 친 끝에 비로소 회사의 무게를 이겨냈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던 꿈을 다시 시작하게 되다니.
이렇게 자주 업무를 바꾸다 보면 전문성도 없고 커리어도 사라질 것 같겠지만 내 경우엔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많이 돌아다닌 만큼 많은 것이 쌓였다. 니-하오 성조조차 몰랐던 중국어는 5분짜리 스피치를 해낼 정도가 됐고 기초 수준이긴 하지만 태국어도 익혔다. 외국에서 집을 구하고 차를 운전해 고객을 만났고, 손님을 모셔보기도 했다. 홍보팀으로 향하기 전 나의 사회적 정체성은 세일즈맨이었다. 그러려고 한 게 아닌데 돌아보니 세일즈맨에게 득 될 경험을 잔뜩 하게 됐다.
모든 게 '그만두기 전에 이건 해보고 그만두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해 얻은 것들이다. 만일 내가 처음부터 만족했다면 이런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고, 만일 한 자리에 10년간 머물렀다면 한 가지 일만 할 줄 아는 대기업의 부품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연차가 쌓인 뒤에 다른 일을 맡게 되면 부품은 바보가 되어 버린다. 때가 되면 회사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퇴사를 종용할 것이다.
사실 직장인 커리어라고 해봐야 회사 밖에서는 'A회사에서 B직무 N년'이 쓸 수 있는 내용 전부다. 그런데 영업사원의 능력은 결국 직접 말을 섞어봐야 알 수 있다. 포트폴리오에 누구나 알만한 대표 작품이 없다면 다양한 일을 두루 할 줄 아는 게 더 도움 되지 않을까?
물론 직장 안에서 원하는 대로 부서와 환경을 바꾸려면 노력이 필요하다. 상황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가는 곳 어디서든 환영받을 실력이나 사람들과의 좋은 관계가 필요하다. 적응이나 능력 문제로 자리를 잡지 못해 떠돌아다니는 저니맨이든 가는 팀마다 반지를 얻어대는 우승청부사든 옮겨 다니는 것은 매한가지지만 사람들은 그 차이를 안다. 당연히 운도 필요하다. 아니, 어쩌면 이 모든 게 다 운빨이다. 여러분! 운빨이 최고이며, 존버는 승리합니다! 그러니 언젠가는 반드시 다가올 대운을 기다리며 이토록 무거운 퇴사 대신 바꿀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바꾸며 준비를 해두자.
오래 열어두었던 글을 마침내 마무리 지을 수 있어서 좋다. '퇴사, 안되면 뭐 비슷한 거라도'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했지만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갈 수도 있었다. 직장인이 아니라 직업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직장인으로 생활에서 의미를 찾기보다는 직업인으로 일에서 의미를 찾고 싶다. 홍보팀에서 겪는 일들을 앞으로 쓸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글을 쓰다 보니 지나치게 자세하게 쓴 부분도 있어서 회사의 누군가가 나를 특정할 수도 있겠다 싶지만 여기까지 쓴 마당에 어쩔 수 없다. 까짓 거 누가 뭐라 하면 퇴사하지 뭐, 다행히 지방인 고향의 집값은 2년 전보다 더 떨어졌다. 뭐, 안되면 퇴사 비슷한 거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