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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춤 May 06. 2024

애쓰지 않아도 잘할 수 있는 일

퇴사, 안되면 뭐 비슷한 거라도 #3

그해 여름 나는 과감히 칼을 들어 8년 간 쌓아온 영업사원으로의 커리어를 끊어냈다. 머지않아 해외주재원이라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다. '나만 조금 고생하면' 여덟 글자만 받아들인다면 모든 일이 순탄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나만 조금 고생하면'에 더 이상 끌려 다니지 않고 스스로를 구원하기로 결심했다.


보내지 않으려는 조직과 3개월을 씨름했다. 겪어보니 회사를 떠나는 것과 조직 내의 다른 부서로 향하는 것은 분명히 양상이 달랐다. 그만둔 사람은 곧 잊히고 미화되지만 조직에 남은 사람은 계속 회자되기 때문이다. 나를 보내야 하는 기존 조직은 아무 일 없이 현상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다. 당장 충원해야 할 인력 수급과 남은 직원들의 사기 관리 외에도 조직과 조직장에 대한 인사팀의 평가까지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정을 훤히 알기에 나를 원하는 조직은 무리하지 않는다. 일찌감치 후보군을 마련해 상황이 꼬이면 언제든 더 쉽게 빼올 수 있는 플랜 B로 전환할 태세를 갖춘다. 결국 판이 열리고 나면 스스로 장기말이 되겠다고 나선 당사자의 강력한 의지만이 이적을 성사시킬 수 있었다.


이제부터 당사자는 매사 섬세한 감각으로 일을 처리해야 하는데, 향할 곳과 떠날 곳의 관계를 모두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기껏 판만 벌이고 원래 부서에 남게 될 수도 있다. 여기가 힘들어서 도저히 안 되겠으니 다른 곳 어디든 보내달라는 명분이라면 차라리 다. 개인이 평판을 내려놓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나는 어디든 가고 싶은 것이 아니었고 힘들어서 나간다는 것은 꼬리표는 더욱 원치 않았다. 나는 당당하게 임하고 싶었다. 그러려면 더 많은 노력과 함께 '기술'도 필요했다. 그래서 3개월이나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그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 비로소 홍보팀에 도착했다. 해외출장을 다니면서 다큐멘터리를 찍으면 되겠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며 입사한 지 여덟 해가 지났다. 그동안 목적지를 향해 부단히 키를 돌려왔는데 드디어 경도(經度)라도 맞추게 된 것이다. 부사장에게 했던 말은 진심이었다. 나는 분명히 퇴사를 결심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딱 한 군데 더 경험해보고 싶은 곳을 꼽는다면 바로 이곳이었다. 나는 기어코 기회를 만들어냈고 그것을 잡았다. 성취감보다 안도감이 컸다. 결국 여기까지 잘 왔구나. 다시 시작이었다. 나침반을 들고 이제는 위도를 맞추기 위해 항해를 떠나야 한다.




홍보팀 첫 해 나는 사내 온라인사보 편집장이자 인트라넷 관리자 업무를 맡았다. 매주 한 두 편의 글을 직접 썼고 연재 시리즈물을 기획하기도 했다. 재밌는 기획을 만들어보겠다며 발로 뛰며 취재를 하기도 했다. 몇 년간 미뤄왔던 회사 인트라넷을 개편하고 시스템을 도입하는 업무도 맡았다. 그 해 나는 콘텐츠 기획자이자 잡지 에디터였고 기자이자 에세이스트였으며, 웹디자이너이자 IT 개발자이기도 했다.


일은 계속해서 일을 불러왔지만 나는 기꺼이 그 일들을 했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냥 그 모든 일을 쉽게 할 수 있었다. 그러자 마음대로 해도 되는 일이 점점 많아졌다. 일을 즐기게 됐다. 왜 그런 기분 있잖은가, 너무 빨리 달리다 보니 어느 순간 양발이 모두 떠있다고 느끼는 기분, 전혀 힘들이지 않고 있는데 맨 앞서 달리는 기분. 그 해 나는 처음으로 그런 기분을 느껴봤다.


새로운 일을 하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지만 그런 기분을 느끼게 된 것이야 말로 비할 바 없는 소득이었다. 나는 어떠한 기술도 배우지 않았지만 이미 모든 것을 숙련된 솜씨로 해낼 수 있었고, 심지어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쳐줄 수도 있었다. 누군가가 미로 속에서 출구를 찾아 헤맬 때 저 위에서 미로를 내려다보는 사람이 바로 나였던 것이다. 이 경험을 통해 언젠가 몸담은 곳을 떠나게 된다면 어떤 방향을 보며 길을 나서야 할지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애쓰지 않아도 잘할 수 있는 일. 그렇게 일을 대하는 새로운 기준을 세웠. 애쓰지 않는다는 건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먼저 자신의 본성에 알맞은 일이다. 나는 주로 직관을 사용한다. 그러니까 MBTI로 치면 N이다. 관습을 따르기를 꺼려하고 독창적인 시도를 좋아한다. 일의 목적부터 먼저 따져본다. 그래서 시켜서 일을 하더라도 누구를 위해 어떤 이유로 하는지를 알아야 착수한다. 전체 상황을 통제하고 싶어 한다. 바로 일에 돌입하지 않고 어느 정도 규모의 업무인지 먼저 계산을 해보는 타입이다. 소외되었거나 박수받아 마땅한 사람을 조명해 박수를 받게 만들고 싶어 한다. 거꾸로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도 나 잘났네요 하는 꼴은 못본다. 종합해보면 '내가 주도할 수 있고 만기와 목적이 있으며, 실험을 해도 되는 프로젝트성 업무'를 할 때 시간 가는줄 모르고 몰입할 수 있다. 반대로 일상적이고 시켜서 하는 업무는 금방 질려버린다. 타고난 본성을 거스르는 일을 하려면 무척이나 애를 써야 한다. 그렇게 계속해서 억지로 하다 보면 종국에는 나 자신을 의심하거나 혹은 일 자체를 의심하거나, 여하튼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의심할 수밖에 없게 된다.


두 번째로, 오래 전부터 해와서 저도 모르게 실력이 쌓인 일을 하면 애쓰지 않아도 된다. 글쓰기는 내 오랜 관심사이고 웹디자인에 쏟은 시간은 갓 대학을 졸업한 디자이너와 비교해도 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을 맡아했더니 일에 막힘이 없었다. 가장 좋은 상황은 그런 일을 하면서도 받는 기대가 적을 때다. 전공자의 경우 불과 대학 4년 배운 것이 전부인데도 당연히 잘해야 한다는 기대를 받는다. 하지만 취미로 한 일은 아무도 기대하지 않아 부담이 없다. 특별한 기술이 아니라도 원리는 같다. 나는 여행을 좋아하고 세계 곳곳을 다녔다. 여행한 장소와 관련된 일, 여행한 방식과 관련된 일, 여행하며 만난 사람과 관련된 일, 여행하며 본 좋아 보이는 것들과 관련된 일, 내가 여행을 떠난 이유와 관련된 일... 상상해 보면 이 가운데 어떤 일을 하게 되더라도 난 이미 지금부터 잘할 준비가 되어 있다.


돌아보니 홍보팀에서 일한 지도 벌써 만으로 2년이 다 되어 간다. 2년 전 글을 쓸 때는 후속 편을 이렇게 늦게 발행하게 될 줄 몰랐다. 일부러 쓰지 않으려던 것은 아니고 이후 몇 달 동안 상황이 진전되지 않아 멈췄던 것인데, 정작 홍보팀에 온 뒤에는 매일 기고할 글을 쓰느라 뒷 이야기를 쓸 수가 없었다.


지금 다시 개인적인 글을 쓸 수 있는 건 이제 매일 기고할 글이 없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올해부터는 예전처럼 신나게 콘텐츠를 기획하고 글을 쓰는 대신, 매일 기자들과 밥을 먹으며 건조한 보도자료를 기계적으로 손보고 있다. 뭐가 더 좋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일이 본성과 꼭 맞지는 않는다. 그래도 괜찮다. 여전히 나는 위도를 조정하고 있는 중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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