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르디우스의 매듭
퇴사, 안되면 뭐 비슷한 거라도 #2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를 퍼 먹도록 진짜로 원하는 게 뭔지 그거 하나 모르느냐고 묻는 신해철의 목소리가 귀에 때려 박힌다. 매번 주위를 뱅뱅 맴돌기만 하는 듯했던 말이 어느 틈엔가 끝이 뾰족한 화살이 되어 눈앞으로 날아온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지? 무의미의 축제의 한복판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다. 헤매다 보니 또 훌쩍 시간이 몇 년 지나버렸다. 거울 속의 내 얼굴에는 기미와 주름이 가득하다. 스무 살의 사진을 꺼내어 본다. 지금과 달리 밝고 맑다.
아, 그리하여 슬픔과 회한에 잠기거나 어딘가로 훌쩍 떠나는 뻔한 전개.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지금의 내 얘기는 아니다. 스무 살의 사진이 지금보다 훨씬 밝고 맑은 것은 부정할 수 없겠지만 말이다. 진짜로 원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오히려 또렷하다. 나에게는 하루 반나절 동안 쉬지 않고 얘기할 진짜로 원하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하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고, 그보다 더 원하는 것이 있다.
고르디우스의 칼을 생각하는 자는 매듭을 끝까지 풀어보려 하는 사람일 것이다. 마침내 부사장이 나를 호출했을 때, 오늘이 바로 매듭이 풀리는 날임을 깨달았다. 드디어 이 소란스럽고 괴로웠던 긴 겨울의 끝에 그야말로 미루기의 천재에게 꼭 맞는 전개가 펼쳐지겠구나. 이제 원하는 것보다 더 원하는 것, 그리고 그중에 제일 원하는 것을 얘기할 때가 되었다.
다른 지원부서에서 너를 보내 달라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내 입으로 얘기하기는 그렇지만 회사에서 지금 우리가 제일 돈을 잘 벌고 있고 조직에서도 너를 믿고 끌어주니 당연히 안 갈 것이라고 생각은 하는데, 그래도 공식적으로 인사팀 통해 연락을 받았으니 면담을 한다고 웃으며 음료수를 건넸다. 결혼한 지 벌써 얼마나 됐냐며, 아 그래, 그러면 집도 샀냐며. 이제 과장이 되었으니 주재원도 곧이네. 나 때는 선배들이 주재 나갈 때 집을 한 채씩 사고 나가서 진작 강남에 사는데 나는 이제 겨우 마누라 말을 듣고 반포에 집을 겨우 한 채 마련했다고... 너도 지금처럼만 하면 탄탄대로라고... 아, 역시 합리와 효율 씨, 기회와 위기 씨, 발전과 미래 씨가 여기 다 모여 계셨구먼. 본인 얘기가 끝났으니 면담도 끝나갈 무렵, 나는 한 손으로 책상에 놓인 두꺼운 줄을 잡고 한 손에는 칼을 들었다.
원하는 것을 얘기했다. 주재원도 괜찮은 미래라고 생각했었다고 말했다. 애초에 이 회사에 들어왔을 때 가장 큰 고려사항은 주재 생활을 하는 것이었고, 말씀하신 대로 지금처럼만 하면 이르면 내년에 내 이름이 명단에 오르리라는 것도 예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익숙한 환경에서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은 부서에서 일을 하는 것도 복이라고 생각하고, 나의 능력을 믿어주는 부서장과 임원까지 만나는 일은 어쩌면 조직 생활에서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운임을 잘 안다고 말했다. 회사에서 제일 잘 나가는 조직에서, 물론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는 꽤 괜찮은 흐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고 말했다. 부사장은 내가 정돈된 어조로 또박또박 정답을 토해내자 그럼, 그럼 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더 원하는 것을 얘기했다. 회사에 들어오기 전 방송국 PD를 꿈꾸었었다 말했다. 우수한 실적을 기록하고 그 보상으로 주재원이 되거나 승진을 하는 것도 보람되지만 정말로 가치 있다고 믿는 것은 작지만 나의 가치관이 담긴 작품을 남기는 일이라고 했다. 영업사원으로서 늘 돈을 벌기 위해 애썼지만 정작 내가 회사에 벌어들인 돈을 계산해본 적 없었다고 말했다. 심지어 우수 실적상을 받았을 때 조차도 그랬다고. 우리 조직의 미래는 실적이 잘 나오거나 계약이 성사되었을 때 진심으로 기뻐할 줄 아는 그런 사람들이 이끌어 가는 것이 맞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나는 <팩트풀니스>나 <초격차> 같은 책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그동안 열심히 해왔던 이유는 어디서든 잘하는 사람이고자 했기 때문이었을 뿐이라고. 속사포랩을 쏟아내듯 숨도 쉬지 않고 말을 했다. 말을 할수록 점점 손이 차가워지고 긴장이 되는 느낌이었다.
이제야 음료수 뚜껑을 따고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은 올해까지만 일을 하고 연말에 퇴사를 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고향에 내려가서 부모님이 더 나이 드시기 전에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이직할 생각은 없고 그냥 그만두면 그만두는 대로 앞으로의 삶은 적게 쓰고 그동안 미뤄왔던 것들을 하고 싶었다고, 내 인생의 실험을 해야 할 적기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뜻하지 않게 병을 얻고 문득 남은 인생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보다 짧을 수도 있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파이어족이 유행이라지만 그런 것은 아니라고, 그런 단어조차 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 같은 매뉴얼을 강요한다는 측면에서 저는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원의 표정에는 당혹스러움이 역력했다. 내가 뱉은 것들은 사무실에서 거의 느낄 수 없는 온도의 단어와 문장이었고, 어쩌면 이런 방식으로 자신에게 얘기하는 직원을 보는 것이 처음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평소에 주니어 직원들과 잘 소통한다고 알려진 부사장은 내 대학교 과 선배이기도 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회사에 입사해서 해외를 돌아다니며 지금까지 쌓아 올린 커리어와 그에 따른 부와 명예가, 같은 전공을 가진 스무 살 어린 부하 직원에게는 전혀 좇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있었을지.
이어 마침내 그중에 제일 원하는 것을 얘기했다. 지금 연락을 준 부서는 사실 내가 5년 전에도 지원을 했었던 곳이며, 재작년에 회사에 복귀할 때에도 혹시 나중에 티오가 나게 되면 꼭 연락을 달라고 인사팀에 말해두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회사를 그만두기 전에 딱 한 군데 더 경험해보고 싶은 곳을 꼽는다면 바로 이곳이라고 말했다. 5년 동안 사람을 뽑지 않아서 인연이 없는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 퇴사를 결심하니 비로소 기회가 찾아온 것 같다며,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회사의 핵심 영업조직에서 경쟁을 버티지 못하고 찬밥 신세인 지원 조직으로 도태되어 떠나고자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나는 오히려 내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들과 접점이 생기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며, 특히 그곳에 그런 식으로 도태되어왔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을수록 나는 다름 아닌 그 일을 하고 싶어 간 사람으로서 의지를 가지고 잘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부사장은 자신이 약간 안이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며 나에게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급한 것이 아니니 본인도 고민을 좀 더 해보겠다고 했다. 음료수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말을 많이 해서 목이 따가웠다.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목요일 오후였다. 그리고 그것이 임원과의 마지막 면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