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달 전, 브런치 작가 신청에서 떨어졌다. 아니, 나 왜 떨어졌어. 이게 뭐라고 떨어지는데. 자존심이 잠깐 상했다. 나는 글을 써서 12년을 먹고살았다. 작가가 되기 전 대학에 갈 때에도 어쩌다 보니 붙어서 좋은 곳이라 모두가 말하는 곳에 갔으며 대충 작가가 되어서 얼레벌레 살았다. 재능충으로 인생을 대충 살아왔기 때문에, 나름의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는 곳에서 고배를 마신다고? 아, 저기요…!!
알고 보니 브런치는 글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들의 모임이라 성의 없게 신청하면 떨어진다고 한다. 이유를 알고 나니 떨어진 이유가 너무나 납득이 되었다. 그렇다. 대충 쓴 글과, 대충 갈긴 1줄의 목차로 작성자가 성의 있길 바라는 플랫폼에 들이밀다니… 나라는 사람 대책이 없어도 유분수지. 떨어져도 싸다. 대책이라는 것이 정말이지 어디 내놓아도 남부끄러울 만큼 없다. 참으로 나다운 일이 아닐 수가 없다.
나는 근성이 없기로 소문난 사람이므로 1~2번 더 시도는 해보겠으나 브런치가 날 받아주지 않는다면, 안 할 작정이다. 책을 낼 수 있는 방법은 널리고 널리기도 하거니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딱 하나다. 단순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세상은 다양하며, 나의 생에 주어진 시간은 짧다.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적당히 방법을 찾아보다가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이 아름다운 현대 ADHD인의 미덕임을 배운 나이다. 이제 왜 할 수 없는지 자세히 말해보겠다.
할 수 없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시작 지연’ 증상 때문이다. 다음 주에 돌아오겠다고 3주 만에 돌아온 오늘. 내가 택한 주제가 바로 이것이다. ADHD의 가장 커다란 특성 중 하나이자 현대인이 자신을 ADHD로 착각하는 이유가 바로 ‘시작 지연’ 증상이다.
시작 지연이란 말 그대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일에 지연이 있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 아침에 눈을 뜨는 일부터 양치를 하고 세수하기, 씻고 옷 입고 나가는 일마저… 누군가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는 것들이 ADHD에게는 지루하고 토 나오는 일이 된다. (=나만 그럴 수 있다.) 매일 반복되는 단순한 작업이기에 뇌를 자극할 수 없기 때문이다.
ADHD의 가장 큰 취약점은 자극에 약하다는 것과 즉각적인 보상에 약하다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수많은 ADHD 환자들이 계획한, 혹은 꼭 해야 할 일들을 하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밝고 건실한 미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요소이다. 나 역시 병원에서 전문가에게 진단을 받고 약을 먹기 전까지는 심각한 시작지연으로 인해 인생을 통째로 말아먹고 있었다. 물론 겉보기에는 꽤 나쁘지 않은 커리어와 스펙으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끔찍했다. 일터가 아닌 진짜 내 삶이 있는 집과 방은 쓰레기장이 차라리 나아 보일 정도였으니까.
이 모든 현상은 모든 시작지연이 쌓여서 발생한다. 나의 실제 사례로 예를 들자면 이러하다. 나는 청소를 할 필요를 깨닫는데 2주가 필요하며, 청소할 마음을 먹고 움직일 준비를 하는데 2주가 필요하다. 그리고 이 한 달의 시간을 보내고 실제로 또 정신 차려서 청소를 하기까지 2주가 걸리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필요를 깨닫고, 마음을 먹고 준비하는데 보낸 4주 말고 나머지 2주를 뭘 했냐고 물으면 나는 알 수 없다. 기억이 안 난다. 그냥 흘러갔다. 아마 내 도파민이 자극한 어딘가에서 당장의 쾌락을 추구하는데 쓰였을 것이라 추측한다.
더 작게 예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누군가는 침대에 일어나서 물 한 컵을 먹는데 그냥 일어나서 냉장고로 가는 간단한 일이라면. 똑같은 일이 ADHD를 가진 사람에게는 좀 더 많은 체크리스트가 된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이불을 걷는다.
몸을 움직여서 침대 아래로 향한다.
다시 몸을 곧추 세운다.
직립보행을 해서 냉장고로 걸어간다.
냉장고의 문을 연다.
물을 꺼낸다.
컵을 찾는다.
컵을 꺼낸다.
꺼내놓은 물의 뚜껑을 연다.
물을 따른다.
뚜껑을 닫는다.
다시 냉장고에 돌려놓는다.
물을 마신다.
무슨 개소리냐 싶겠지만 실제로 흥미가 없는 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길고 지루하게 느낄 만큼 인내심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나는 누구나 이런 귀찮은 삶을 정신력으로 꾹 참고 살아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내 전문의에게 ADHD 진단을 받은 후 상담을 하던 도중 알게 되었다. 남들은 저 과정이 인식도 하지 못한 사이에 지나간다는 것이다. 듣고 나니 참 신기했다. 아니, 진짜? 별생각 없이 저걸 할 수 있다고? 그러고 나서는 죽도록 부러웠다. 그리고 깨달았다.
남들에겐 그저 지나갈 찰나의 시간들이 내게는 모이고 쌓여서 시작을 미루는 시간. 즉, 시작 지연으로 자리 잡는구나. 그리고 이 것들이 모여서 내가 허송세월을 하는데 일조한다. 그렇다면 다음에 내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보통 사람이라면 이 일을 해결할 대단하고 멋진 여러가지 방법을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현대의 평범한 소시민이므로 진부하고 가장 손쉬운 길을 선택했다. 내가 가장 먼저 택한 것은 ‘아무것도 안 한다’였다. 진료를 받고 난 이후 나는 해외의 ADHD 전문 사이트에서 관련된 글을 읽고 이렇게 생각했다.
‘아, 그렇구나. 다른 사람들은 진짜로 무언가를 시작하는 것이 괴롭지 않구나! 필요성을 느끼면 재미가 없어도 일단 하는 것이구나! 그런 기능이 있는데 나는 없네? 그럼 난 안해야지! 헤헷!’
당시에는 살아서 숨쉬는 것조차 너무나 괴로워서 이런 나의 선택이 내게는 너무나 당연했다. 괴로운 일들을 줄여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당시 상담사도 내가 너무나 ADHD인 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많은 괴로운 일들을 하고 있다고 말했으니까. 이 정도는 줄여도 될 것 같았다. 애초에 안 되는데 왜 해. 지옥에서 온 MBTI T인간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보니 참으로 달콤했다.
그렇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께서는 이쯤에서 알아주셔야 한다. 내 모든 글에는 반전이 없다. 누워있으니 그것 참, 달콤하고 황홀했다. 내가 그런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나처럼 앞으로도 내 글은 참으로 단순하고 솔직한 글이 될 것이다. 그럼 다음 편에는 이런 게으른 내가 어떻게 달콤한 침대를 벗어나 시작지연 증후군을 앞두고 또다시 갓생을 살아볼 맘을 먹었는지 이야기해 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