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 어떻게 헤쳐나가는지를 이제 공백포함 5752자로 말해보겠습니다.
2017년쯤이었나. 지독한 불면증에 시달렸다. 당시 교양 방송 작가로 일하던 나는 생방송을 진행하느라 2013년부터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밤을 새야 했는데, 그렇게 4년여를 지내다 보니 내 몸 안에 있는 생체시계가 망가져버린 것이다. 하루 정도 밤을 새우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고, 심할 때는 3일 이상 잠을 자지 않아도 하나도 졸리지 않았다. 평소 잠이 많았던 나는 이런 현상이 반가웠다. 드디어 내가 ‘어른’이 되어서 잠에 휘둘리지 않고 날 잘 통제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음… 늘 그렇듯 내가 쓰는 글에 반전 따위는 없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 날 잘 통제하고 있는 게 아니라, ‘어른’이 되었다고 착각한 채로 내 몸을 신나게 망가뜨리는 중이었다. 거의 72시간 이상 잠을 자지 않고 지내던 어느 날, 평소처럼 방송을 끝내고 집에 가고 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내가 내려야 할 역이 아니라 종점이었다. 종점까지 올 때 분명 나는 잠을 자지 않았는데, 갑자기 기억이 사라진 것이다. 그렇다. 잠을 자지 않고 날 혹사한 나머지 드디어 내게 블랙아웃이 생기고만 것이다.
블랙아웃
: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뜻하는 영어단어. 정신 잃음, 정전, 암전, 기절, 필름 끊김 등 여러 가지 상황에 쓰인다. 또한 술 먹거나 기절할 때 겪기도 하지만 수술 시 전신마취를 할 때도 겪는다.
갑자기 기억이 사라진 이유는 간단했다. 나는 잠을 자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더 이상 견디지 못한 몸이 자체적으로 전원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 내가 종점에서 눈을 뜬 것이고. 모든 승객이 내린 텅 빈 지하철에서 기시감에 눈을 뜬 나는 내가 블랙아웃을 겪은 것을 알고 이렇게 생각했다.
‘집이 종점 근처라서 진짜 개 다행이다.’
우리 집은 종점과 몇 정거장 떨어져 있지 않아서, 내가 당장 보는 손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내가 ADHD 치료를 늦게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산만하고 어수선한 마음으로 인생을 덤벙거리고 천방지축 얼렁뚱땅 살다 보면 어지간한 돌발 상황에는 별 감흥이 없다. 충격의 역치가 낮아져서 그냥 이렇게 생각하고 마는 것이다.
‘오케이, 렛츠 수습~’
덕분에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어지간하면 쫄지 않는 대범한 마인드와 간혹 가다가 멘탈갑이라는 말을 듣는 인생을 살게 됐는데. 이게 참… 마냥 좋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냥 나쁜 일이 생겼을 때 스스로 마음의 짐을 남기지 않고 건강하게 넘어가는데 쓰이면 꽤 좋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오케이, 렛츠 수습~’이라고 외치고 당장 일어난 일만 수습하고 진짜 핵심은 덮어두고 넘어가는 데 있었다. 그러니까 나처럼 종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대충 하고, 진짜 문제인 ‘불면증’과 무너진 생활패턴을 고치려 노력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렇게 살면 큰 코를 다친다. 일상에서의 간단한 블랙아웃이 아니라, 인생에 블랙아웃이 생길 수도 있으니까. 이제 생물학적으로는 작은 코를 가진 내가… 어떻게 내 인 생의 큰 코를 남부럽지 않게 다치고 수습했는지 말할 시간이다.
아무튼 불면증을 겪던 당시 2017년의 나는 블랙아웃이 반복되자, 나름대로 고쳐야겠다고 생각했고. 밤낮이 바뀐 수면패턴을 바로 잡기 위해 집 근처에 있는 10분 거리의 정신과를 찾았다. 그리고 지난 편의 내가 그랬듯 간단한 수면제 처방을 요구했는데, 의사는 약을 바로 주는 대신 신경안정제 비슷한 것을 주었다. 그리고 자꾸 병원에 꾸준히 오길 권유했는데, 자본주의로 대충 해결하고 싶었던 현대인인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 약이 아무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무례를 무릅쓰고 항의해야 했다.
“그냥 수면제를 주시면 안 되나요? 지금 어차피 수면 유도제나 신경안정제나 다 효과가 없잖아요.”
“왜 불면증을 고치고 싶어요?”
“제 일상에 문제가 있으니까 일단 없애야 하지 않을까요?”
“어떤 문제가 있는데요?”
“자꾸 가스레인지 불 켜는 버튼을 착각하고, 졸지 않았는데 졸다가 내릴 역말고 이상한 데서 내리고 이런다고요.”
“그걸 고치면 뭐가 좋겠어요?”
“그냥 거슬리는 게 없으면 좋겠어요. 일할 때 너무 거슬려요.”
“그것만 나아지면 되나요?”
“네, 저는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그냥 안 귀찮고 싶어요. 좋아지는 수준을 바라는 게 아니라 적당히 문제만 없어도 된다고요.”
“우울증이나 무기력증과도 불면증이 관계가 있을 수 있어요.”
“선생님, 저는 우울하거나 무기력하지 않아요. 그리고 이걸 고치고 싶지도 않아요. 어차피 못 고쳐요.”
그때의 나는 ‘좋아진다’라는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어차피 사는 게 거지 같은 우울증 환자라는 걸 자각조차 못한 우울증 환자였던 상태였으므로. 그냥 안 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더 이상의 문제가 더 생기지만 않으면 된다. 사는 건 어차피 좋을 수 없으니까. 이런 생각에 한 말이었는데, 내 말을 들은 의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 동기는 단순해요. 좋아서 하는 거예요. 그 일을 하면 기분이 좋아지니까. 극단적인 선택이지만 심지어 자살도 좋아서 하는 거예요. 괴로운 내 삶이 끝나는 게 좋아서. 일상에서도 다르지 않아요. 밥을 먹고, 일하고, 무언가를 보고… 모든 행동의 근간에는 ‘내가 좋아지고 싶다.’, ‘이걸 해서 행복해져야지.’ 하는 마음들이 크고 작게 있는 거예요. 태어날 때부터 무기력하고 우울한 아기는 없거든요. 그 아기가 자라면서 무언가를 겪고, 보고, 어떤 일이 발생해서 그래요. 내가 리한 씨의 과거를 묻지 않는 게 과연 상담에 필요 없어서 일까요?”
이 긴 말을 놀랍게도 거의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열심히 기억했는데,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 저 말이 내게는 충격적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무언가를 겪고, 보고, 발생한 건 많았는데… 그간 살면서 ‘내가 좋다’는 것에 포커스를 맞추어서 생각해 본 적은 잘 없었다. 저 말을 하는 의사의 목소리와 표정을 6년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할 정도로 꽤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다신 저 병원에 가지 않았다. 저 실력 좋은 의사가 나를 본격적으로 상담하고 낫게 해줄까 봐 무서워서. 정확히는, 그 과정에서 내가 살아온 지난 생을 다 꺼내서 하나하나 얼마나 충격받고 힘들었는지 말하기 두려워서. 그래서 병원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몇 년 후, 작게 발생하는 블랙아웃보다 더 검고 어두운 수렁에 빠지게 된다. 그러니까 내 우울증과 무기력증, 그리고 ADHD의 대환장 3 콤보 속에서 살아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직장 상사의 정성 어리고 알찬 혐오를 받고, 그 혐오에 더해 내가 나를 또 혐오하고. 일상은 아무것도 돌아가지 않는 수준이 되자 나는 ADHD를 고치리라 마음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죽는 거 아니면 고치는 거인데, 자살을 하기엔 나는 겁이 많았다. 어딘가에서 떨어져 으깨질 내 몸보다 두려운 게 있었다. 그건 바로 이 생을 잘 못살아내서, 혹여라도 윤회라도 하면 어떻게 해. 이 똥거지 같은 인생을 또 살라고? 불교를 좋아하는 나는 윤회가 두려워서 죽지도 못했다. 결국 남은 선택지는 없는 살림에 좀 더 큰돈을 들여서 어떻게든 살만하게 만드는 것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궁금한 걸 도무지 못 참는 성격인데, 상황이 이렇게 굴러가자 나는 정말 나을 수 없는 건지 혹은 나을 수 있는지가 못 견디게 또 궁금해졌다. 게다가 여러분이 알다시피 각 잡고 치료를 받으면 진료과를 막론하고 돈이 꽤 들지 않나. 그렇게 내 안에 숨겨져있던 K-유전자가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번 돈인데! 야, 이 지랄을 떨 거면 나아야지.’
그게 바로 내가 최고의 내담자, 최고의 환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배경이다. 알토란 같은 혐오를 받으며 견뎌낸 시간으로 벌어낸 월급이 그다지 아깝지는 않았으나, 두 번은 이 난리를 피우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비장한 각오로 나는 우선 내가 해야 할 일이 뭔지 결심했다. 유튜브와 각종 서적을 뒤적이며 정신과의 치료 과정을 알아봤는데, 드는 돈보다는 내가 정신적으로 무엇을 견디고 겪게 될지를 중점적으로 알아봤다. 내가 도망갈 구석을 막기 위해서였다. 돈이야 어차피 드는 건데, 어떤 게 좋고 싫은지를 알아보아야 한다. 그래야 들인 돈을 허사로 만들지 않고 병원에 꾸준히 다닐 수 있으니까.
어린 시절, 꽤 다사다난했던 가정사로 인해 나는 또래보다 풍파를 많이 겪은 편이었다. 그것들이 좀 가라앉은 뒤 고 3 때였나… 엄마가 내게 정신과에 가서 상담받고 마음을 정리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때도 나는 우울증과 무기력에 시달리긴 했지만 엄마의 말에 큰 충격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정신병자 같나 싶어서. 그리고 그때 든 어떤 감정도 호소하지 못한 채 그냥 엄마가 걱정하지 않게 하려고 매일 한 시간을 울면서 먼 거리의 병원에 갔다. 그리고 상한 자존심을 잔뜩 구겨서 손에 들고 다시 울면서 집 근처로 온 뒤, 웃으면서 집에 돌아왔었다. 물론 병원에서 좋은 교수님을 만났지만 내 의사로 진행한 상담이 아니었으므로, 쿨하게 상담을 거부하고 그냥 울면서 다녔다. 그 이후로 모든 정신과와 나에게 치료를 권하는 인간들을 혐오하게 된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보통 사람처럼 보이려 노력하며 살아온 나였다. 그래서 병원에 가기 전 딱 두 가지를 결심했다.
의사와 상담사가 어떤 사람이든 나는 최고의 환자와 내담자가 되어 그들을 이용해 어떻게든 낫는다.
그렇게 하기 위해 어떻게든 가장 솔직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치료와 상담에 임하자.
그렇게 생각하자 떠오른 건 자연스럽게도 집 근처 10분 거리의, 내게 충격적인 말을 했던 의사였던 것이다. 내가 다시 찾아갔을 때, 당연하고도 다행이게도 의사는 그다지 나를 아는 채 하지 않았다. 그냥 내가 내원한 이유를 말하자
“네, 알겠습니다. 그럼 검사 날짜 잡고 수납하고 가세요.”
라고 말했을 뿐. 그렇게 ADHD와 우울증과 무기력증을 박살 내겠다는 나의 치료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제대로 마음을 먹은 나는 우선 풀배터리를 요청했다. 풀배터리는 종합심리 평가 검사로, 마음의 건강검진과도 같은 검사이다. 흔히들 알고 있는 IQ테스트부터 HTP 검사(사람과 집, 나무를 그리고 심리를 분석한다.), 로르샤흐 검사, MMPI (미네소타 다면적 인성 검사), 문장 완성 검사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동시에 CAT(종합주의력 검사)를 함께 요청했다. 슬슬 글 쓰는 집중력이 떨어져서 풀배터리 후기는 다음 편으로 미루겠다.
마지막으로 정신과를 향한 마음의 문턱이 높은 사람들을 위해 병원을 찾는 팁을 남기고 싶은데. 3가지만 기억하면 될 것 같다.
내가 원하는 질병에 관한 다면적 검사가 가능한지?
→ 단순히 설문지로 하는 검사를 넘어서서 ADHD라면 CAT(종합주의력 검사)가 가능한지? 혹은 불면증이라면 관련하여 기계로 보는 검사가 가능한지 알아보라. 물론 설문 검사도 훌륭한 도구이지만 사람의 마음은 참 복잡하여 수치화된 결과를 보게 되면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보게 되어 치료 의지를 좀 더 키울 수 있다.
여러 의사를 만나며 상담스타일이 맞는 사람을 찾아라.
2번이 힘들다면 집과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고, 의료진을 최대한 신뢰하고 존중하며 솔직하게 대할 것. → 정신 질병은 환자도 마음의 벽이 높지만 의료진 입장에서도 환자에 관한 접근이 쉽지 않다. 기왕 어려운 걸음을 했다면 마음을 한 발짝 더 열고 자신이 고른 의료진을 100% 활용한다는 맘을 먹어주면 좋겠다. 그럼 정말 있는 힘껏 낫게 해 준다. 당연하다. 그들은 그게 직업이고, 그러려고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이다. 너무 의존해서도 안 되겠지만, 너무 경계할 것도 없다는 뜻이다. (본인이 경계했던 지라 경계하실 분들 위주로 남겼다.)
그럼 다음 주 일요일에 다시 돌아오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