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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치즈 Mar 11. 2023

비 오는 날, 더 자라다

이럴 수가, 하필이면 장대비다. 


초등학교 2학년, 학교가 파하고 건물 밖을 나오자마자 눈앞이 캄캄했다. 오늘 아침 일기 예보 속 그 언니는 왜 그리 자신 있게 ‘하루종일 맑음’을 외쳤을까. 매일 오전 날씨를 체크하시고 단 몇 퍼센트의 비라도 예상된다 하면 어김없이 가방 속에 3단 우산을 챙겨주시던  우리 아빠의 철두철미함도 이런 날 만큼은 무용지물이다.    

한 참을 서있었는데도 비가 그칠 줄 몰랐다. 문 앞에 서있던 아이들은 하나 둘, 우산을 들고 나타나는 엄마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 여자아이 그룹은 엄마에게 전화를 해야겠다며 교무실 옆에 배치된 공중전화기 쪽으로 총총들이 달려간다.  몇 분 뒤 기다림에 지친 몇 명의 남자아이들은 결국 보조가방으로 머리를 가리고 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달려갔다. 


10분만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그날 갈까 싶다가도 여전히 거세게 쏟아지는 빗방울을 보니 맞으면 머리에 큰 구멍이 생길 것만 같았다. 그렇다고 엄마에게 전화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엄마가 못 나오실 걸 뻔히 알기 때문이다. 막내 동생일 태어나고 그날로 집에 온 지 8일 차다.  동생이 태어난 후 엄마의 얼굴은 항상 피곤했다. 밤중에도 꿈결 속에 아기 울음소리를 들었고, 엄마는 동생을 돌보느라 항상 분주했다. 방과 후 집에 도착하면 동생을 재우다 같이 낮잠에 든 엄마가 급히 일어나 문을 열어주시곤 했다. 


이러한 상황을 가는데 이까짓 비에 태어난 지 열흘도 안된 신생아를 데리고 우산을 가지고 나와달라 전화하는 건 너무나  큰누나답지 않은 행동 같았다.  다행히 빗방울의 크기는 조금씩  작아지기 시작했고, 크게 호흡을 가다듬고 결의에 찬 모습으로 보조가방을 머리에 얹혔다. 미친 듯이 전속력으로 달렸지만 15분 거리의 집 앞은 꽤나 멀었다. 도착했을 때는 그야말로 물독에 빠진 생쥐 꼴이었으니. 집 초인종을 누르고 나서야 집에 왔다는 안도감과 함께 갑자기 내 모습이 서러워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에! 비가 언제부터 왔었지? 엄마한테 전화하지 그랬어. 이를 어째, 홀딱 다 젖었네. 감기 들겠다. 엄마가 욕조물 받아줄게.” 


역시나 문을 여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동생과 낮잠 자다 막 일어나신 모양이다. 


“아냐 엄마. 집 바로 앞 슈퍼 올 때 갑자기! 천둥번개가 치는 거야. 뛰어왔는데도 이렇게 다 젖었어. 신기하지?”


신기했다. 미안해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샤워 후 새근거리며 자는 동생을 보니 엄마에게 전화를 안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이 날부터였던 것 같다. 첫 째로서의 의젓함과 언니, 누나로서의 배려심이 내 안에 자리 잡은 것이. 엄마가 된 지금의 눈으로 그날을 회상해 보면 어린 내가 안쓰러운 느낌도 있지만 스스로 느끼고 터득하면서 내 마음을 성장시킨 것이 대견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여나 비가 올까 항상 차에 우산을 구비해 놓고, 비 오는 날이면 잊지 않고 우산을 챙겨 아이들을 마중가는 걸 보면 어린 시절 그날은 그만큼 나에게 큰 기억으로 남아있는 것 같다.   


“엄마, 이 정도는 당연히 맞아도 되지, 누가 우산을 써요. 봐봐~ 아무도 우산 안 쓰잖아요.”

 

그런데 몰랐다. 미국 사람들은 웬만해서 우산을 안 쓰고 다닌다는 걸. 


부슬부슬 비가 내리는 아이들 하굣길, 역시나 나름 생각해서 큰 우산을 챙겨갔건만 절대 쓰지 않겠다는 아이들. 엄마의 마음을 몰라 주는 것 같아 내심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가 주변에 정말 단 한 명도 우산을  안 쓰는 걸 보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심지어 부모들도). 로마에서 로마법을 따라야지 어쩌겠는가…. 싶다가 당당히 우산을 펴고 썼다. 왜? 가뜩이나 요즘 들어 많이 빠지는 듯한 머리카락 때문에 고민인데 굳이 산성비에 노출시킬 필요가 있으랴. 난 미국인도 아닌데 신기한 듯 볼 테면 보라지. 내 머리는 그보다 소중하니까. 타인이 아닌 나를 위한 배려도 잊지 않고 챙겨야 할 덕목임은 틀림없다. 특히나 스스로를 챙겨야 하는 중년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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