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중년의 그대에게
“우리 왜 이렇게 정신없이 지내야 하는 거지? 안부 전화 한번 하기가 이렇게 힘드니. 요즘 나 완전히 번아웃이 왔나 봐. 이 시점에 뭔가 새로운 터닝포인트가 필요한 것 같은데 그것을 위해서 생각할 여유조차 없다는 게 슬퍼. 이번 주말 우리 밤에라도 시간 내서 만나 얘기해.”
마침내 친한 A언니와 연락이 닿았다. 2주 만이다. ‘부재중 통화’ 확인 후 전화를 하면 받지 않는 등 계속 연락이 엇갈렸던 우리. 10여 년을 알아온 데다 같은 처지의 워킹맘이다 보니 한 마디만 해도 서로의 입장을 정말 이해해 주는 사이다. A언니는 그야말로 오랜 경력에 회사에서 인정받는 인재. 잦은 출장으로 나보다는 몇 배는 더 바쁘게 지내지만 항상 에너지가 넘쳤다. 그런 언니가 전화를 받자마자 힘듦을 토로하기 시작, 적잖이 당황했다.
언니 또한 마흔 이후에 맞게 되는 질풍노도 시기를 겪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의 경험들을 토대로 개인적인 결론 내려보면 50대 전까지 크게 세 개의 사춘기가 있는 것 같다.
5살 사춘기 (무조건 no만 부르짖는 시기), 십 대의 사춘기 (아이들마다 천차만별; 안 오는 아이도 있다지만 훗날 더 크게 오지 않으려면 이때 맞이하는 게 낫다), 그리고 중년의 사춘기 (대부분 마흔 중반 무렵). 그리고 평균적으로 봤을 때 이 중 중년의 사춘기가 가장 큰 파동을 그리지 않나 싶다. 아이가 있는 중년의 엄마들은 자녀들의 십 대 사춘기까지 맞이해야 하는 데다가, 갱년기까지 겹쳐오면 우울감까지 더해진다. 여기에 남편까지 갱년기를 맞이했다면 그야말로 집안은 전쟁터. 서로의 예민함으로 집안은 항상 살얼음 분위기이니 그나마 한 끼 함께 하는 저녁식사마저 각자의 방에 하는 가족도 봤다. (아들은 게임을 하면서, 남편은 유튜브를 보면서, 엄마는 식탁에서 드라마와 함께 울면서) 물론 모두가 이런 최악의 경우를 겪지 않지만 셋 중 마음의 부대낌이 가장 절정에 오르는 시기임은 확실하다. 게다가 나이에서 오는 체력적인 한계에서 오는 무기력까지 느낀다. 여기에 직장인 엄마라면 연차가 올라갈수록 많아지는 과도한 업무로 (미국은 정말 '돈 받는 만큼 일하라'라는 마인드다) 번아웃이 오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이도 이제 고등학교 입시를 앞두고 있어서 다른 엄마들은 모두 아이 교육에 열심인데 난 그럴 여유도 없어. 내 삶 자체만으로 너무 힘들다 보니.”
언니의 토로에 나 역시 비슷한 상황이라며 이런저런 요즘에 갖고 있는 마음의 고민들을 내비쳐본다. 그리고 몇 년 전 마음에 큰 위안을 주었던 Jonathan Rauch의 <The happiness Curve’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줬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히 40 중반 (사람에 따라 그 시기가 조금 다를 수 있겠으나)에 모든 인생에 있어 가장 낮은 만족도와 행복감을 느낀다는 것. 희망적인 것은 인생의 최하점을 찍었던 행복도가 40 중반을 기점으로 상승하여 늦으면 50대부터 그 만족도 다시 반등하고 이 점을 기점으로 무조건적으로 상승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50대 무렵 직장을 그만두거나 퇴직을 한 후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인생에 있어 가치관이 크게 변하는 등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갖는 등 인생의 또 다른 장을 만들어 간다는 얘기다. 무엇보다 이 책이 좋았던 것은 오랜 기간 실시해 온 전 세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방대한 데이터를 기반의 보고서였기에 우선 그 내용에 신뢰감이 생기면서 앞으로는 반드시 좋아질 것이라는 '절대적인' 희망을 가질 수 있었던 점이다.
“그래, 역시 나만 이렇게 힘든 게 아니었구나. 다들 비슷하다니 조금 위안이 되네. 우리 바쁘더라도 시간 내서 만나서 이야기 좀 해보자. 그래도 이렇게 말하니까 좋다.”
격앙되었던 언니의 목소리 톤이 조금은 사그라들었다.
“맞아, 나도 같은 입장이거든. 근데 또 달리 생각해 보면, 이런 시기가 왔으니 ‘곧’ 새로운 전환점이 온다는 뜻일 수도 있고. 그래서 좋게 생각해 보려고. 그래, 그래, 곧 만나.”
나 역시 내 만족도 곡선이 급하강하기 시작할 무렵 큰 우울감에 빠졌고 오랜 시간 속앓이를 한 적이 있다. 내 인생, 나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진행 중이지만 예전과 다른 점은 이 또한 자연스러운 인생의 과정이라 생각하고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빠르고 명쾌한 답변이 나오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지만 반대로 '언제 이렇게 내 삶에 대해 고민을 해볼까' 싶기도 하다. 이런 시간들 안에서 버무려지는 여러 생각들과 가치관들이 언젠가는 잘 조화되어 50대부터는 또 다른 모습과 빛으로 발산될 것이라 믿는다. 게다가 책에 따르면 그때부터는 '무조건' 상승이라고 하니 이왕 맞이한 이 시간 누구보다 충분히, 열심히 고민하고 싶다.
책에서 또 하나 강조한 것은 '비단 나만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라는 것이다.
‘무엇보다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는 다른 이들과 만남으로서 나만 힘들지 않음을, 내 불만족은 틀린 게 아니고 자연스러운 것임을, 이 시기를 겪고 있음이 지극히 당연한 것임을 인지하는 것이다.'
서로의 고민을 이해해 주는 누군가를 만나고 그들과 함께 공감하는 것 또한 굉장한 위안이 된다는 것. 그래서 "나도 그래"라고 언니에게 재차 말해 주고 싶었는지 모른다.
고민이 많은 중년의 나이, 어쩌면 고민하기 딱 좋은 나이일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