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는 안 되는 질문 <도바 위에 뜬 별 1부 제15화>
― 첫 만남
안여사가 자리를 뜨자, 우리 두 사람은 잠시 부담스러운 시간에 직면해 있었다.
낮은 실내 조명 아래, 와인 잔 잔 두 개가 서로 마주 앉은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유리잔은 마치 살아 있는 듯, 되레 생명 없는 우리가 그들의 시선을 받는 것 같은 착각의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다.
그녀는 이 불편한 분위기를 누가 먼저 깨어야 좋을까 생각하는 사람처럼, 손 끝으로 술잔의 가장자리만 지루할 정도로 문지르고 있었다.
유리 표면을 따라 흐르는 빛이 부드럽게 굴절되어, 그녀의 손톱 끝에서 다시 반사되었다.
“솔직히요.”
그녀가 한참만에 지루함을 깨고 말을 꺼냈다. 그녀의 말이 내 귀에 사람이 아니라 손톱이 하는것 처럼 들렸다.
“처음엔 그냥 궁금했어요. 은행원, 기자까지 했던 사람이 왜 노점을 하나 싶어서요.”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결국엔 호기심과 계층 차이를 은근히 드러내는 도발처럼 들렸다.
노점상에게 ‘왜 노점을 하느냐’ 묻는 건,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삼가야 할 질문이었다.
그녀는 상식이 없거나, 혹은 내 반응을 떠보기 위한 계산된 방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첫마디에 심사가 뒤틀렸다.지나친 자의식인지 모르지만 그 여자의 눈빛이 초식동물의 약점을 노리고 있는 포식자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녀의 끈끈한 시선을 피하며 벽에 걸린 그림을 으로 눈을 돌렸다.
추사 선생의 〈세한도〉 영인본이었다.
고급 액자에 표구되어 있어 원본 같은 고고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전혀 고고하지 않은 지금의 내 처지를,
추사 선생이라면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하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었다.
“먹고살려고요.”
불 쑥 생각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쿡"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손에 힘이라도 빠진 사람처럼 들고 있던 술잔을 '탁'하는 소리가 들리도록 테이불위에 놓고 제풀에 얼굴이 빨개졌다.
채 정리되지 못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의외의 대답이시네요. 보통은 그렇게 말 못 하죠. 다들 변명부터 하거든요. 왜 있잖아요.경기 탓, 사람 탓, 운이 나빴다든가… 그런 이야기들.”
“변명해본들 뭐가 달라집니까.”
나는 술잔을 빠르게 비우고 난 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내 속뜻은 그렇지 않은 데 계속 대답이라고 하는 것이 퉁명스럽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오른 쪽 검지 손가락을 잔 위에 걸쳐 놓고 또 다시 천천히 돌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느린 손가락 회전을 하는 동안. 나의 반응을 관찰하고 그 관찰을 통해 다음 질문을 머릿속에 그리는 무녀같은 인상으로 내게 다가왔다
그녀가 손가락의 움직임을 멈추고 말했다.
“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는데, 당신은 일반 분들과 좀 다르네요. 기자출신이라 그런가”
나는 그녀의 말에 바로 반응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취재해 본 결과,권위로 사람을 대하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대응 방법은 그 권위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었다.권위가 무너질 때 그들은 분노하거나 당황하거나, 혹은 예의를 차리곤 한다.
기자 시절, 그런 인간의 순간을 포착하는 방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 유명한 처칠 사진처럼 — 입에 물린 시가를 빼앗긴 찰나의 표정 말이다.
권위의 껍질이 한꺼풀 벗겨질 때야 비로소 한 인간이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녀는 자기 질문에 대한 나의 무반응이 싱거운지 해답도 자신이 내어놓았다.
“사람을 보면 알죠. 가진 게 없어도 자존심이 남은 사람, 성호씨가 그런 사람같네요. 요즘 찾기 힘들어요.”
나는 그녀의 말에 맞장구 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침묵은 때때로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준다.
그녀는 그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그녀의 말대로 시쳇말로 노점상 따위인 내가 산전수전 다 겪은 자수성가 실업가인 그녀에게 해줄 말이 없을성 싶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거의 맨주먹으로 10년 만에 규모 있는 수출기업을 일군 사람이지 않은가. 그녀의 무례한 언사. 나의 정리 되지 않은 퉁명스런 반응이 계속 헛돌고있는 대화였다.
어차피 오늘의 만남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그녀에 대한 예인했던 나의 마음이 제법 누그러졌다
칠근이와 안여사의 기대에는 못 미치겠지만,
이 여자에게 굳이 부정적인 인상을 남길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이제까지의 예민하고 퉁명스러웠던 내 태도가 괜히 과했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진정한 장사치라면 손님이 물건을 사든 안 사든, 끝까지 친절해야 하는 법이다.
그녀의 손가락이 또 다시 크리스탈 유리잔 위에서 천천히 돌기시작했다.
그녀의 그런 여유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 심경을 건드렸지만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유리잔 끝의 한 부분이 조명 받아 잠시 반짝였다.
역시 그녀는 나보다 한 수 위 였었다
유리잔에서 천천히 손가락을 떼며 진지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죄송해요.첫 만남에 제가 표정이 조금 딱딱했죠. 요즘 일본 쪽 거래에서 클레임이 좀 있었거든요. 도자기 세면대에 미세한 크랙이 생긴다나요. 일본은 참 까다로워요. 검수도 철저하고, 환불 조건도 엄격하고요.”
나는 첫 만남에 제가 표정이 조금 딱딱했죠.
요즘 일본 쪽 거래에서 클레임이 좀 있어서 그래요.
도자기 세면대에 미세한 크랙이 생긴다나요.
일본은 참 까다로워요. 검수도 철저하고, 환불 조건도 까다롭고요.”
“주제넘은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성형 과정의 시간 문제나 운송 중 사고라기보다는, 혹시 유약이나 가마 온도 쪽 문제는 아닐까요.”
말을 뱉고 나서야 속이 서늘해졌다.
괜한 소리를 했다는 걸 알았다.
상대는 대기업 사장이었고, 요업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었다.
나는 시장 바닥에서 셔츠를 파는 장사치에 불과했다. 내가 끼어들 분야가 아니었다.
“주제넘은 생각일지 모르겠습니다만… 성형 과정의 시간 문제나 운송 중 충격에 의한 것이라기보다, 혹시 유약이나 가마 내부 온도 쪽 문제는 아닐까요.”
말을 뱉고 나서야 괜한 소리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는 대기업 사장이었고, 요업을 업으로 삼는 사람이었다.나는 시장 바닥에서 셔츠를 파는 장사치에 불과했다.
그녀가 뜻밖이라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니,전문가도 아니면서 그걸 어떻게 아세요?”
“예전에 도자기전쟁이라는 신문 특집 기사를 쓸 때, 일본 사세보 쪽 도자기 공장을 취재한 적이 있었어요.유약 조성비가 조금만 틀려도 크랙이 생기더군요.수출 규격엔 맞아도, 소비자 감성엔 안 맞는 제품이 많아요.”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이야… 노점상이라기엔 너무 정확한데요?앗.죄송해요.제가 또 실례되는 말을 했군요. 근데 아무리 기자지만 정만 대단하신데요”
“아뇨 지금은 노점상이니 틀린 말을 하신건 아니죠."
내가 정색을 하며 능청스레 말하자 .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성호 씨, 의외로 재미있는 분이군요.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예리하면서도 배려하는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은행원 때 습관이 남은 건가요? 아니면 기자 때 감각인가요?”
“저야 잘 모르죠. 아마 노점에서 배운건지도 모르죠 "
나도 모르게 그녀에 대해 많이 기우는 내 처지가 짜증나 약간 자조적인 어조가 되어버렸다.
그녀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했다.
“성호 씨 같은 사람, 내 주변엔 없어요. 겉으론 조용한데… 속은 묘하게 위험하달까.”
“위험이라… 본래 남자라는 족속은 다 위험하죠. 괜찮은 여자 분에게는 더더욱 그렇겠죠.하지만 보다시피 전 그런 능력이 전혀 잆는 사람이죠. 겉이나 속이나 안팎으로 다 빈껍데기랍니다."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그럼, 나도 괜찮은 여자 축에 들어가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닐 듯한데요.”
그녀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호호, 당신은 겉보기엔 카리스마가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게… 그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있어요.안 여사가 왜 그렇게 주선을 강권했는지 이제 알겠네요.”
동백을 닮은 여인.
그녀의 진홍색 루주가 발린 입술이 말을 할 때마다,
동백꽃이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해안가 찬 바람 속에서 꺾이지 않고 피어나는 강인한 그 꽃이, 내 앞에 있는 이 여자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녀가 잔을 내려놓았다.
“안여사라는 그 사람, 이자리를 주선하며 나보다 당신이 더 걱정됐을지도 몰라요.”
내가 그 말의 의미를 묻기 전에, 그녀는 만남이 예상보다 더 길어진 듯 시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급한 일 있어 이만 갈게요. 실례해요
하지만… 꼭 다시 봐요.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그녀는 코트를 걸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 혼자 남았다. 유리잔 속 얼음이 이미 다 녹아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 나는 오늘의 만남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세속적인 부와 명예.
지난 세월, 놓쳐버린 나의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통로. 그녀는 어쩌면 그것을 쥐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사람이라기보다, 돈과 명예라는 단어의 다른 이름에 가까웠다.
스쳐 지나가는 차창밖 불빛을 바라보다가, 문득 다른 얼굴들이 떠올랐다.
왕비다방의 영숙 씨, 코스 아주머니 말숙 씨,
그리고 밀양 오일장에서 내 차 창가에 손을 흔들던 흰색 코트의 여자.
그녀들의 목소리와 체취, 사소한 몸짓들이 한꺼번에 차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녀들 모두가 내 머릿속의 환영일 뿐 실체는 없었다.영숙씨에게는 악어형님이.말숙씨에게는 칠근이가.밀양가는 길에 스쳐 간 그 여자는 연락처 하나 없다.그녀 비슷한 내가 밀양 장사를 빠진 날마다 두 세번 찿아왔었다는 식당주인여자의 전언만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 장길녀라는 여자는 분명한 실체였다 냉정했고, 정확했다.그녀의 대화는 계산처럼 시작되었고, 감정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녀와 나는 결국 같은 부류다.’
도바 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과 기업체에서 상품을 파는 사람.다만, 규모가 다를 뿐이다.
"모든 것을 거는 쪽은 내다. 그녀는 단지 약간의 돈과 명예만 나에게 줄 뿐이다. 어째든 이건 정당한 거래다.’
나는 그렇게 나자신을 합리화했다.
칠근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정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면,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이라 생각해라. 몇 년 뒤 내가 위자료는 충분히 챙겨줄게.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아이가.”
그 말이 처음엔 비겁하게 들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달콤하게 들렸다.
칠근의 말엔 언제나 생활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건 철학이라기보다 생존의 문장들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아침에 나와 저녁에 돌아오는 직장처럼 받아들이면 된다. 감정에 기대면 종내 남는 것은 상처뿐이지만 차라리. 조건에 기대면 잃을 것은 없 지 않은가,
가로등이 자동차를 휙휙 스쳐 지나갈 때 마다 검은 차창 유리에 비친 내 눈동자위로 하얀 불빛이 점멸 하고 있었다. 유리창에는 이제까지 보지못한 낯 선 얼굴이 나를 쳐다보고있었
아라비안나이트와 송도나이트
이틀 후, 안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성호 씨, 이번 주말 저녁에 장 대표님이 시간되시면 만나재요.송도에 별장이 하나 있거든요. 댁으로 차를 보내 주신대요.”별장이라는 말에 나는 대답을 하지못하고 잠시 망설였다.하지만 안여사의 말투엔 여지가 없었다.
“이번 자리는 지난 번이랑 달라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자리예요.”
안여사가 말하는 ‘이야기’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일까 생각하다가 생뚱맞게도 천일야화가 갑자기 머리에 떠 올라 객적은 웃음이 피식나왔다.하루를 연장하기위해 위해 밤새 이야기를 민들어야 했던 불쌍한 사라자드. 몇푼의 돈과 알량한 명예를 얻기 위해 낮의 언어가 아니라 밤의 언어를 필요로 하는 나 자신이 잠시 대비되었기 때문이었다.
송도 해변의 저녁바람은 한껏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다.
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이 소금기를 나는 오래전부터 좋아했다.그 바람은 오래된 기억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송도에서 바라보면 바로 맞은편 영도의 고갈산 끝자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제 이(2) 송도라는 법정동명이 아닌 지명으로 불리는 작은 마을이었다. 깍아지른 듯한 절벽중간에 여러 채의 슬레이트 지붕들이 위태위태하게 걸려 있었다. 단 한 채라도 잘못되면 모두가 한꺼번에 바다로 떨어질 것처럼 집들은 그렇게 서로의 등을 받치며 간신히 붙어 있었다.
붉게 칠한 지붕들은 항상 오래된 철판처럼 빛이 바래 있었고, 기운 해가 그 표면을 비스듬히 훑고 지나가면서 녹슨 기색을 더 도드라지게 만들었다.집과 집 사이 좁은 틈마다 주황색 노을 빛이 걸렸고, 작은 동네는 그 빛에 잠겨 천천히 저물어가곤했다.
직장 초년생시절이었다. 한가한 주말오후,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기웃하다 얻어 걸린 몇 권의 시집을 들고 나는 송도로 내달렸다.
오래된 일본식 여관 2층 방에 몸을 두고, 나는 해가 다 질 때까지 창에 붙어 있었다. 다다미에 번진 노을이 발끝을 스치고, 절벽 아래 슬레이트 지붕들이 적갈색으로 눌어앉는 동안, 방 안과 바깥의 경계는 흐려졌다.
창틀에 팔을 얹은 채 나는 그 동네와 함께 기울어 갔다. 지붕들이 서로를 떠받치듯 서 있던 것처럼, 나 역시 그 풍경에 기대어 적성에 맞지않는 은행원이라는 직업을 버티고 있었다.
젊은 날의 나는 혼자인 저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람들 속에서는 흩어지던 내가, 그 시간 속에서는 또렷해졌다. 그쯤에서 고독은 상처가 아니라 내게는 안식처이자 은신처였다.
해가 완전히 사라질 때쯤이면, 풍경은 어둠 속으로 잠기고, 나도 그 어둠 속에 자연스레 섞여 들곤 했다.
그때의 나는 세상이 막 열리는 소리를 믿었고,
책 한 권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지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그래도 그 시절 송도의 소금기섞인 바람은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 낭만이었다.
지난 추억이 끝날 무 렵, 나를 태운 검정색 신형 세단 체어맨 승용차가 혈청소 방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군사지역 출입금지 바리케이드가 있었지만,
차는 아무런 제지 없이 그대로 통과했다.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흰색 이층 저택이 나타났다.
바로 아래가 송도 해변의 끝자락이었다.저택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작은 골프 연습장.풀장까지 갖춘 별장건물이었다.
이층 창밖으로는 바다가 눈앞에 정면으로 펼쳐져 있었다. 갈매기 울음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렸다.
바다 위에는 낚싯배 몇 척이 정지한 채 점처럼 떠 있었다.
장길녀 대표는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짙은 회색 니트 차림, 젊게 보이려고 짙은 화장을 한듯 했지만 마흔 중반이라는 세월을 감출수가 없어 보였다.
테이블에는 크리스털 잔 두 개와 브랜디 한 병이 놓여 있었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했어요.”
그녀가 의자에서일어나 밝은 미소로 나를 맞이했다.
“무료했던 이사람을 이렇게 불쑥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갑작스런 초청에 장난과 힐난을 적당히 버무린 인사로 대신했다.
“이 자리는 불쑥 이 아니에요.안 여사가 많이 신경 썼어요. 물론 저도요.”
그녀는 나폴레온 꼬냑을 두 잔 따라 한잔을 내 앞에 건넸다.
“와인은 잘 안 해요. 와인은 말이 길어지셔요.”
당신에 대한 파악을 애저녘에 나는 다 끝내었다는 듯 게임의 승자 같은 말투가 또다시 내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나는 잔을 들며 짧게 건배를 제의했다.
“지난번 클레임 사건이 잘 해결됐다니 다행입니다.”
그녀가 웃었다.
“그 일 말이죠. 그게 단순한 하자 문제가 아니었어요.그간 오래 근무했던 공장장이 갑자기 그만두면서, 생산 라인이 엉망이 됐거든요.솔직히 말해 꽤 힘들었어요.그런데 그날 성호씨 조언에서 감이 왔죠.유약과 온도 문제일 거라는.”
말을 하는 동안 그녀의 눈빛이 부드럽게 내 몸을 훝고 지나갔다.
" 그 말이 단순한 조언은 아니었어요.성호씨는 계산보다 감으로 사람을 보는 것 같아요.
그게… 또 묘하게 믿음이 가거든요.”
나는 대꾸할 말이 마땅잖아 빈 잔에 다시 꼬냑을 채웠다.
반쯤 열린 장문을 통해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얇은 커튼이 흔들렸다.
“성호 씨.”
그녀가 낮게 말했다.
“이건 단도직입적인 이야기예요.내가 사는 세상은 늘 계산 위에서 굴러가요. 사람의 말, 웃음, 행동, 심지어 만남까지도.그게 싫지 않다면… 우리 이야기를 조금 더 해도 될까요?”
그녀의 조심스러우면서 솔직한 태도에 재벌 별장처럼 꾸며진 건물을 보고 살짝 뒤틀렸던 나의 자의식이 도로 풀려버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이브닝드레스를 걸친 중년의 여자 몸에서 은은한 향이 났다.그녀가 내 옆에 앉아 브랜디를 따르며 말했다.
“당신은 순수하죠. 그게 장점이자 결점이에요.”
그녀의 손이 내 어깨에 스치듯 닿았다가 이내 떨어졌다.
그 짧은 접촉에 나는 괜히 몸이 움찔 굳었버렸고, 그녀는 나의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책망하듯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마요. 내가 어색해지잖아요.”
"아. 그렇지요"
지나치게 예민했던 내 촌스러운 반응에 뒤늦게 얼굴이 화끈했다
“보통 남자들은 이런 상황이면 말이 달라지죠.
근데 당신은… 오히려 더 조용해지네요.”
나는 억지로 웃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제일 강한 반응이에요.”
그녀가 잔을 들어 올렸다.
“성호 씨, 난 사람을 오래 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론 강한 척하지만, 속은 유리처럼 잘 깨어지죠.
제가 만드는 도기제품들도 마찬가지예요.
겉보기에 강해 보여도 잘 깨지는 것이 태반이죠.
하지만 강한 불을 이겨낸 것들은 잘 안 깨어지죠 ”
그녀는 잔을 비우고 창가 쪽으로 걸었다.
멀리 바다 위로 등대의 불빛이 한 바퀴씩 천천히 돌며 수면을 쓸고 있었다.빛이 바다 위를 감았다가 풀어내며, 잠깐씩 파도 끝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이건 거래예요.”
그녀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내 사업에도, 내 인생에도.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죠.
언론 쪽에도 연결이 있고, 은행에도 줄이 있는 사람.
당신이 마음만 먹는다면, 난 당신을 도울 수 있어요.
”그녀는 덧붙였다.
“물론, 그건 거래예요.감정이 아니라.”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빛은 진심이었다.그러나 그 안에는 진심만 있진 않았다.그건 유혹이 아니라,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한 발 더 내게로 다가왔다.
“앞 일은 아무도 모르는 거죠. 거래에서 감정이 생길런 지는 ”
그녀가 내 앞에 앉았다. 그녀의 손끝이 내 손등을 덮었다.
그녀의 손은 따뜻했다.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내 몸이 조금 긴장하는 것 같았으나 그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이해해요. 당신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닫았다.
“성호 씨, 난 사람의 욕망보다 절제를 더 믿어요.
욕망은 누구나 있어요.
절제는, 선택이에요.”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절제가, 내겐 필요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나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웃었다.
“괜찮아요. 시험은 통과예요.”
그녀는 다시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여기는 내가 제일 힘들 때 살았던 곳이에요.”
그녀가 말했다.“서른 살, 아무것도 없던 시절. 바로 이 근처에 공장을 짓고, 컨테이너 하나 세워놓고 사무실로 썼어요. 출입금지 바리케이드 있던 그곳이 그때는 공장이었어요. 그때 이 바다를 보며 다짐했죠.이 바다처럼 지치지 말고 앞으로 멀리 나가자고. 그 후, 내겐 많은 시련들이 있었지만 결국 이겨냈죠.십 여 년 만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 기업으로 키웠고,우리 회사 제품들이 미국, 유럽, 일본등 선진국으로 수출되고 있죠”
그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검은 바다 건너편, 영도 제2 송도의 경사진 해안길 위로 작은 불빛을 단 차량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잠깐, 그 불빛이 밤의 수평선 위에 선을 그리듯 미끄러지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꺼져버렸다.
아마도 목장원 쪽 산허리를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본 채 혼잣말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길도, 예전엔 내가 자주 다니던 길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속에 힘든 기억에 대한 회상이 담겨있었다.
서른 무렵이었죠… 매일 하루 세끼 라면으로 버티던 시절이었어요.”그녀는 애써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잔을 들고 있는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브랜디의 호박빛이 잔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가,이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 갔다.
그녀는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 애썼지만,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마치 술 잔을 비우는 속도만큼,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이 위로 차솟아오르는 듯했다.
술이 그녀를 취하게 하는 게 아니라,기억이 그녀를 취하게 하고 있었다.
“그땐 다들 나를 ‘여자 사기꾼’이라 불렀어요.
납품 대금 떼먹을까 봐, 물건 맡기는 사람도 없었죠.
결국 직접 트럭 몰고 다니며 납품했어요.
“거래처 돌다 보면 저기 바라보이는 이송도 저 길을 꼭 지나쳤어요.
태종대 못 미쳐, 영도 해양대학교 앞 하리라는 어촌 마을에 큰 거래처가 있었죠.내가 직접 만든 타일을 납품하던 곳이에요.
그 시절엔 가마 불을 한 번 끄면 다시 올리는 데 반나절이 걸렸죠. 불을 꺼두면 타일에 금이 가거나 색이 달라지니까 밤새 작업장을 지키며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애썼어요. 새벽쯤 되면 손끝이 얼고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지만 그래도 가마 속 불빛만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어요.그 때 저 등대가 나의 친구였죠…그때는 무섭지도 않았어요.돈이 없고, 백이 없고, 몸 하나뿐이니까 잃을 것도 없었죠.
그런데 이상하죠 가진 게 많아질수록 겁이 많아지더라고요.사람을 믿는 게 제일 어려워졌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서 내가 요즘 가끔 이렇게 누군가를 부릅니다.
내가 아직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 녀의 눈빛엔 단단한 힘이 남아 있었지만,그 단단함은 이제 힘이라기보다
오래된 외로움의 껍질처럼 보였다.
“성호 씨.”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세속의 냄새가 나지 않아요. 근데 그게 오히려 무서워요.그런 사람은 쉽게 망가지지도, 쉽게 타락하지도 않거든요.”
그녀는 다시 잔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술이 좀 필요하네요.”
나는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지금은 괜찮습니까?”녀는 웃었다.
“괜찮아요. 대신 이제부턴 나 혼자 괜찮지 않으면 되겠죠.”
그녀의 웃음은 이번엔 조금 달랐다.
그 안엔 냉정과 피로가 섞여 있었지만,
동시에 한 사람으로서의 진심이 어렴풋이 스며 있었다.
잠시, 등대 불빛이 유리창에 비쳤다가 사라졌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순수한 마음속 깊은 곳까지 빛이 스쳤다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의 송도 바다는 파도도 없이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이 꼭 평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깊이 잠긴 파도처럼,
숨죽인 무언가가 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