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서는 안 되는 질문 <도바 위에 뜬 별 1부 제15화>
― 첫 만남
안여사가 자리를 뜨자, 우리 두 사람은 잠시 부담스러운 시간에 직면해 있었다.
낮은 조명 아래, 잔 두 개가 서로 마주 앉은 우리를 빤히 쳐다보는 것 같았다.
유리잔은 마치 살아 있는 듯, 되레 생명 없는 우리가 그들의 시선을 받는 것 같은 착각의 시간이 조금씩 흘러갔다.
그녀는 이 불편한 분위기를 누가 먼저 깨어야 좋을까 생각하는 사람처럼,
손끝으로 잔의 입구를 반복하며 문지르고 있었다.
유리 표면을 따라 흐르는 빛이 부드럽게 굴절되어, 그녀의 손톱 끝에서 다시 반사되었다.
“솔직히요.”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처음엔 그냥 궁금했어요. 은행원, 기자까지 했던 사람이 왜 노점을 하나 싶어서요.”
그녀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결국엔
호기심과 계층 차이를 은근히 드러내는 도발처럼 들렸다.
노점상에게 ‘왜 노점을 하느냐’ 묻는 건,
세상을 조금이라도 살아본 사람이라면 삼가야 할 질문이었다.
그녀는 상식이 없거나, 혹은 내 반응을 떠보기 위한 계산된 방책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나는 그녀의 첫마디에 심사가 뒤틀릴 만큼 불쾌했다.
마치 또 다른 약점을 찾아내려는 사냥꾼의 눈빛 같았다.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듯 벽에 걸린 그림을 흘끗 바라보았다.
추사 선생의 〈세한도〉 영인본이었다.
고급 액자에 표구되어 있어 원본 같은 고고한 기품을 풍기고 있었다.
전혀 고고하지 않은 내 처지를,
추사 선생이라면 과연 어떻게 보았을까.
불 쑥 생각 없이 대답이 튀어나왔다.
“먹고살려고요.”
"쿡" 그녀가 웃었다. 그리고 손에 힘이라도 빠진 사람처럼 들고 있던 술잔을 '탁'하는 소리가 들리도록 테이불위에 놓고 제풀에 얼굴이 빨개졌다.
채 정리되지 못한 웃음이 입가에 걸렸지만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의외의 대답이시네요. 보통은 그렇게 말 못 하죠. 다들 변명부터 하거든요.
경기 탓, 사람 탓, 운이 나빴다든가… 그런 이야기들.”
“변명해본들 뭐가 달라집니까.”
나는 술잔을 빠르게 비우고 난 후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며 담담히 말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다시 손을 잔 위에 올려놓고 천천히 돌렸다.
그녀의 조금 전 시선 속에는, 그제야 비로소 ‘이 사람은 누구일까’ 하는 인간적인 반응이 엿보였다.
그녀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 처음엔 가볍게 생각했는데, 당신은 일반 분들과 좀 다르네요. 기자출신이라 그런가”
나는 그녀의 말에 반응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을 취재해 본 결과,
권위로 사람을 대하는 이들에게 가장 좋은 대응은
그 권위를 철저히 무시하는 것뿐이었다.
권위가 무너질 때 그들은 분노하거나 당황하거나, 혹은 예의를 차리곤 한다.
기자 시절, 그런 인간의 순간을 포착하는 법을 배운 적이 있었다.
그 유명한 처칠 사진처럼 — 입에 물린 시가를 빼앗긴 찰나의 표정 말이다.
권위의 껍질이 벗겨질 때, 인간은 비로소 드러난다.
“사람을 보면 알죠. 가진 게 없어도 자존심이 남은 사람, 그런 사람은 요즘 찾기 힘들어요.”
그녀는 내 반응을 기다렸지만, 나는 굳이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침묵은 때때로 말보다 더 많은 걸 말해준다.
그녀는 그 사실을 나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또, 그녀의 말대로 시쳇말로 노점상 따위인 내가
그녀에게 들려줄만한 무용담이 있겠는가.
따지고 보면, 그녀는 거의 맨주먹으로 10년 만에 굴지의 회사를 일군 사람이지 않은가.
어차피 오늘의 만남은 물 건너갔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조금 전보다 오히려 편해졌다.
칠근이와 안여사, 두 사람의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이 여자에게 굳이 부정적인 인상까지 남길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조금 전 퉁명스러웠던 내 반응이 오히려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물건을 사든 안 사든, 팔려는 사람은 언제나 고객에게는 끝까지 친절해야 하는 법이다.
그녀의 손목이 천천히 움직였다.
잔을 들어 올리는 동작 하나에도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편했지만,
마음을 바꾸고 나니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다.
유리잔이 조명 아래서 한번 더 잠시 반짝였다.
“첫 만남에 제가 표정이 조금 딱딱했죠.
요즘 일본 쪽 거래에서 클레임이 좀 있어서 그래요.
도자기 세면대에 미세한 크랙이 생긴다나요.
일본은 참 까다로워요. 검수도 철저하고, 환불 조건도 까다롭고요.”
나는 잠시 잔을 내려놓았다.
“전문가 앞에서 이런 말 드리기 민망하지만,
혹시 가마 출하 전 온도 편차나 유약 문제 아닐까요?
일본은 운송 중 충격보다 내부 온도 차이를 더 중요하게 보거든요.”
그녀는 놀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걸 어떻게 아세요?”
“예전에 기사 쓸 때, 사세보 쪽 도자기 공장을 취재한 적이 있습니다.
유약 조성비가 조금만 틀려도 크랙이 생기더군요.
수출 규격엔 맞아도, 소비자 감성엔 안 맞는 제품이 많아요.”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이야… 노점상이라기엔 너무 정확한데요?”
“노점이라고 세상모르는 건 아니죠.” 내가 장난스레 그녀의 말을 받았다.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은 이번엔 진심이었다.
“성호 씨, 재밌어요.”
이야기하다 보니 마치 오래된 사람 같아요.
은행원 때 습관이 남은 건가요? 아니면 기자 때 감각인가요?”
“아마 둘 다겠죠."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았다.
그때의 표정엔 더 이상 호기심이 없었다.
그건 관심, 아니 — 그보다 더 미묘한 끌림 같은 것으로 보였다.
“성호 씨 같은 사람, 내 주변엔 없어요.
겉으론 조용한데… 속은 묘하게 위험하달까.”
“위험이라… 본래 남자라는 족속은 다 위험하죠. 괜찮은 여자분에게는 더더욱.”
그녀가 가볍게 웃었다.
“그럼, 나도 괜찮은 여자 축에 들어가는 건가요?”
“글쎄요, 그건 제가 판단할 일이 아닐 듯한데요.”
그녀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호호, 당신은 보기엔 카리스마가 없어 보이는데, 이상하게… 그보다 더 강한 무언가가 있어요.
안 여사가 왜 그렇게 주선을 강권했는지 이제 알겠네요.”
그녀의 짙은 루주가 발린 입술이 말을 할 때마다,
다홍빛 동백꽃이 내게 속삭이는 듯했다.
겨울 해안의 찬 바람 속에서도 꺾이지 않고 피어나는 그 꽃이,
내 앞에 있는 이 여자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녀는 잔을 내려놓았다.
“안여사라는 그 사람, 나보다 당신이 더 걱정됐을지도 몰라요.”
그 말의 의미를 묻기 전에, 그녀는 오늘의 만남이 예상보다 더 길어진 듯 시계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다른 일 있어 이만 갈게요. 실례해요
하지만… 꼭 다시 봐요.
그때는 내가 먼저 연락할게요.”
그녀는 코트를 걸치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의도된 듯 느렸다.
문이 닫히고, 방 안에 혼자 남았다.
유리잔 속 얼음이 천천히 녹고 있었다.
얼음이 녹을 때 까지 나는 자리를 떠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밀양에서의 지갑 사건의 반발과 충격으로 내가 이 여자를 만났지만
‘이 여자에게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건 무엇일까.’
세속적인 부, 그리고 명예.
지난 세월 잃어버린 자리를 되찾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
그녀는 그것을 줄 수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동시에, 사랑의 대상은 아니었다.
그녀는 내게 인간이라기보다 돈과 명예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왕비다방의 영숙 씨, 코스 아주머니 말숙 씨,
그리고 밀양 오일장에서 내 차 창가에 손을 내밀던 그 흰 코트의 여인.
그들의 목소리와 냄새, 작은 제스처들이 한꺼번에 스쳤다.
그러나 그들 모두 내 곁에 실체로 남은 사람은 없었다.
이제 내 앞에 있는 여자는 달랐다.
그녀는 냉정했고, 정확했다.
그녀의 대화는 계산처럼 시작되었고, 감정은 철저하게 통제하는 사람이었다.
‘그래, 그녀와 나는 결국 같은 부류다.’
도바 위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과 기업체에서 상품을 파는 사람.
다만, 도매와 소매가 다를 뿐이다.
‘나는 그녀로부터 돈과 명예를 산다. 그러니까 이건 정당한 거래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억지로 설득했다.
칠근의 목소리가 문득 떠올랐다.
그 특유의 억양, 낮게 깔린 어투.
“정 그 여자가 마음에 안 들면,
아침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이라 생각해라.
몇 년 뒤 내가 위자료 챙겨줄게.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아이가.”
그 말이 떠오르자 이상하게 현실적이었다.
비겁했지만, 그만큼 달콤했다.
칠근의 말엔 언제나 생활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건 철학이라기보다 생존의 문장들이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아침에 나와 저녁에 돌아오는 직장처럼 받아들이면 된다.
그러나 그 직장은 지금까지의 어떤 일보다도 감정 소비가 더 클 것이 분명했다.
나는 내 계산이 그녀에게 읽히지 않기를 바라면서 술잔을 들었다.
거의 반 병을 혼자 마셨는데도 취하기는커녕, 정신은 오히려 또렷했다.
― 송도 해변의 별장
안여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성호 씨, 이번 주말 저녁에 장 대표님 댁으로 들르세요. 송도에 별장 하나 있거든요. 비서 시켜 차를 보내 주신대요.”
별장이라기에 나는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안여사의 말투엔 여지가 없었다.
“이번 자리는 지난번이랑 달라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자리예요.”
그녀의 ‘이야기’라는 단어는 언제나 여러 뜻을 품고 있었다.
― 젊은 날, 내가 좋아했던 송도 해변
송도 해변의 바람은 한껏 소금기를 머금고 있었다.
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이 소금기를 나는 좋아했다.
그 바람은 오래된 기억의 냄새와 닮아 있었다.
송도 언덕에서 바라보면 멀리 영도의 고갈산 자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아래로는 제2송도라 불리는 마을이 옹기종기 붙어 있었고,
붉은 지붕들이 기울어진 햇빛을 받아 반쯤 녹이 슨 듯 빛났다.
거꾸로 영도 쪽에서 차를 몰아 해안 일주도로를 따라 달릴 때면,
송도해수욕장으로 이어지는 곡선형 절벽과,
수평선 쪽으로 이어지는 작은 무인도의 검은 암반들이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 풍경을 좋아했다.
직장 초년 시절, 주말이면 보수동 헌책방에서 산 중고 소설이나,
남포동 문예도서에서 막 나온 신간 시집을 들고
바다가 보이는 송도의 허름한 모텔 창가에 앉아
갈매기와 파도를 벗 삼아 읽던 시간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세상이 막 열리는 소리를 믿었고,
책 한 권이 내 인생의 방향을 바꿀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 믿음이 얼마나 순진한지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 시절 송도의 바람은 내겐 처음이자 마지막 낭만이었다.
예전 기억에서 돌아올 때쯤,
그녀가 보내준 검은 세단이 나를 태우고 송도 해변길로 들어섰다.
운전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뒷좌석에서 창밖을 보며 마음속으로 장소를 짚었다.
차는 해변도로를 그대로 가지 않고 감천 방향으로 우회했다.
잠시 후, 혈청소 방향으로 접어들더니
군사지역 표지판이 세워진 좁은 도로로 깊숙이 들어갔다.
출입금지 바리케이드가 있었지만,
차는 아무런 제지 없이 그대로 통과했다.
도로가 끝나는 지점에 흰색 주택이 나타났다.
규모가 꽤 컸다.
바로 아래가 송도 해변의 끝자락이었다.
집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고,
도로에서 보면 평범한 주택처럼 보였지만
안으로 들어서자 벽면 전체가 유리로 되어 있었다.
창밖으로는 바다가 정면으로 펼쳐져 있었다.
어느 쪽을 보아도 수평선이 막힘없이 이어졌고,
갈매기 울음이 멀리서 희미하게 들렸다.
바다 위에는 낚싯배 몇 척이 점처럼 떠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이 ‘그녀의 집’이라는 사실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와의 이번 만남이 단순한 인사나 감사 인사가 아니라는 걸
나는 이미 안 여사의 전화를 통해 알고 있었다.
“결혼을 전제로 한 만남이라 생각하세요.”
안 여사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그 말이 내 귀에 남아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어딘가 단단했다.
그녀가 ‘결혼’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릴 때
그건 사랑의 언어가 아니라,
하나의 조건이자 계약처럼 들렸다.
장귀자 대표는 거실 한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짙은 회색 니트 차림, 머리는 단정히 묶여 있었다.
테이블에는 크리스털 잔 두 개와 브랜디 한 병이 놓여 있었다.
“멀리 오느라 수고했어요.”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그 표정은 환영이라기보다,
어디까지가 나의 한계인지 가늠하려는 호기심 같았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불쑥 불러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는 불쑥 이 아니에요.
안 여사가 많이 신경 썼어요.
저도요.”
그녀는 브랜디를 두 잔 따라 내 앞에 건넸다.
“와인은 잘 안 해요. 와인은 말이 길어지고, 브랜디는 진심이 짧죠.”
당신에 대한 파악을 애저녘에 나는 다 끝내었다는 듯 게임의 승자 같은 말투가 내 귀에 거슬렸다.
그러나
나는 잔을 들며 짧게 건배를 제의했다.
“지난번 클레임 사건 잘 해결됐다니 다행입니다.”
그녀가 웃었다.
“그 일 말이죠. 그게 단순한 하자 문제가 아니었어요.
오래 함께했던 공장장이 이직하면서, 생산 라인이 엉망이 됐거든요.
솔직히 말해 꽤 힘들었어요.
그런데 그날 당신 말 덕분에 감이 왔죠.
유약 온도 문제일 거라는, 그 말이.”
그녀의 눈빛이 나를 향했다.
“이제 와 생각하니, 그 말이 단순한 조언은 아니었어요.
당신은 계산보다 감으로 사람을 보는 것 같아요.
그게… 묘하게 믿음이 가요.”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의자를 내 쪽으로 반쯤 돌렸다.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얇은 커튼을 흔들었다.
“성호 씨.”
그녀가 낮게 말했다.
“이건 단도직입적인 이야기예요.
내가 사는 세상은 늘 계산 위에서 굴러가요.
사람의 말, 웃음, 행동, 심지어 만남까지도.
그게 싫지 않다면… 우리 이야기를 조금 더 해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솔직한 태도가 굳어있던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
몸에서 은은한 향이 났다.
그녀가 내 옆에 앉아 브랜디를 따르며 말했다.
“당신은 순수하죠.
그게 장점이자 결점이에요.”
그녀의 손이 내 팔에 스치듯 닿았다.
나는 순간 몸이 굳었다.
그녀는 그걸 눈치챘는지, 살짝 웃었다.
“놀라지 마요. 내가 어색해지잖아요.”
그녀가 말했다.
“보통 남자들은 이런 상황이면 말이 달라지죠.
근데 당신은… 오히려 더 조용해지네요.”
나는 억지로 웃었다.
“제가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제일 강한 반응이에요.”
그녀가 잔을 들어 올렸다.
“성호 씨, 난 사람을 오래 봐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겉으론 강한 척하지만, 속은 유리처럼 잘 깨어지죠.
제가 만드는 도기제품들도 마찬가지예요.
겉보기에 강해 보여도 잘 깨지는 것이 태반이죠.
하지만 강한 불을 이겨낸 것들은 잘 안 깨어지죠 ”
그녀는 잔을 비우고 창가 쪽으로 걸었다.
멀리 바다 위로 등대의 불빛이 한 바퀴씩 천천히 돌며 수면을 쓸고 있었다.
빛이 바다 위를 감았다가 풀어내며, 잠깐씩 파도 끝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이건 거래예요.”
그녀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내 사업에도, 내 인생에도.
당신 같은 사람 하나쯤 필요하죠.
언론 쪽에도 연결이 있고, 시정에도 영향이 있는 사람.
당신이 조금만 마음먹으면, 난 당신을 도울 수도 있어요.
정치적으로든, 사회적으로든.”
그녀는 덧붙였다.
“물론, 그건 거래예요.
감정이 아니라.”
나는 짧게 숨을 들이켰다.
그녀의 눈빛은 진심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진심만 있진 않았다.
그건 유혹이 아니라, 제안이었다.
“그럼에도…”
그녀가 한 발 다가왔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죠.”
그녀가 내 앞에 앉았다.
손끝이 내 손등을 덮었다.
그녀의 손이 따뜻했다.
그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몸이 굳은 채, 단 한 번의 움직임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잔을 내려놓았다.
“이해해요. 당신은 그렇게 쉽게 움직이는 사람이 아니에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닫았다.
“성호 씨, 난 사람의 욕망보다 절제를 더 믿어요.
욕망은 누구나 있어요.
절제는, 선택이에요.”
그녀는 천천히 걸어와 내 앞에 섰다.
“그리고 그 절제가, 내겐 필요해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나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웃었다.
“괜찮아요. 시험은 통과예요.”
그녀는 다시 창문을 열었다.
밤바람이 살짝 불어왔다.
“이 바다는 내가 제일 힘들 때 산 곳이에요.”
그녀가 말했다.
“서른다섯 살, 아무것도 없던 시절. 바로 이 근처에 공장을 짓고,
컨테이너 하나 세워놓고 사무실로 썼어요. 출입금지 바리케이드 있던 그곳이 그때는 공장이었어요.”
그때 이 바다를 보며 다짐했죠.
이 바다처럼 지치지 말고 앞으로 멀리 나가자고.
그 후, 내겐 많은 시련들이 있었지만 결국 이겨냈죠.
십 년 만에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 기업으로 키웠고,
내 회사가 만든 제품들이 미국, 유럽, 일본등 선진국으로 수출되고 있죠”
그녀는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검은 바다 건너편, 영도 제2 송도의 경사진 해안길 위로
작은 불빛을 단 차량 한 대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다.
잠깐, 그 불빛이 수평선 위에 선을 그리듯 미끄러지더니
이내 어둠 속으로 꺼져버렸다.
아마도 목장원 쪽 산허리를 돌아간 모양이었다.
그녀는 차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본 채
혼잣말처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길도, 예전엔 내가 자주 다니던 길이었어요…”
그녀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 속에
오래된 기억 하나가 조심스레 깨어나는 기척이 있었다.
아까 말했죠. 얼마 되지 않았지만, 수십 년이 지난 것 같아요.
서른다섯이었죠… 매일 하루 세끼 라면으로 버티던 시절이었어요.”
그녀는 잠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는 금세 사라졌다.
잔을 들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브랜디의 호박빛이 잔 안에서 천천히 흔들렸다가,
이내 그녀의 입술 사이로 흘러들어 갔다.
그녀는 감정에 빠지지 않으려 애썼지만,
그럴수록 더 깊이 빠져들고 있었다.
마치 잔을 비우는 속도만큼,
오래 눌러두었던 감정이 차오르는 듯했다.
술이 그녀를 취하게 하는 게 아니라,
기억이 그녀를 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땐 다들 나를 ‘여자 사기꾼’이라 불렀어요.
납품 대금 떼먹을까 봐, 물건 맡기는 사람도 없었죠.
결국 직접 트럭 몰고 다니며 납품했어요.
“거래처 돌다 보면 저기 바라보이는 이송도 저 길을 꼭 지나쳤어요.
태종대 못 미쳐, 영도 해양대학교 앞 하리라는 어촌 마을에 큰 거래처가 있었죠.
내가 직접 만든 타일을 납품하던 곳이에요.
그 시절엔 가마 불을 한 번 끄면 다시 올리는 데 반나절이 걸렸죠.
불을 꺼두면 타일에 금이 가거나 색이 달라지니까
밤새 작업장을 지키며 불을 꺼뜨리지 않으려 애썼어요.
새벽쯤 되면 손끝이 얼고 눈꺼풀이 천근만근이었지만
그래도 가마 속 불빛만 보면 이상하게 마음이 놓였어요.
그때 저 등대가 나의 친구였죠…”
“그때는 무섭지도 않았어요.
돈이 없고, 백이 없고, 몸 하나뿐이니까
잃을 것도 없었죠.
그런데 이상하죠.
가진 게 많아질수록 겁이 많아지더라고요.
사람을 믿는 게 제일 어려워졌어요.”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용히 내 쪽을 향해 돌아섰다.
“그래서 내가 요즘 가끔 이렇게 누군가를 부릅니다.
내가 아직 사람을 믿을 수 있는지 확인하려고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엔 단단한 빛이 남아 있었지만,
그 단단함은 이제 힘이라기보다
오래된 외로움의 껍질처럼 보였다.
“성호 씨.”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당신은 참 이상한 사람이에요.
세속의 냄새가 나지 않아요.
근데 그게 오히려 무서워요.
그런 사람은 쉽게 망가지지도, 쉽게 타락하지도 않거든요.”
그녀는 다시 잔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오늘은 술이 좀 필요하네요.”
나는 잔을 채워주며 물었다.
“지금은 괜찮습니까?”
그녀는 웃었다.
“괜찮아요. 대신 이제부턴 나 혼자 괜찮지 않으면 되겠죠.”
그녀의 웃음은 이번엔 조금 달랐다.
그 안엔 냉정과 피로가 섞여 있었지만,
동시에 한 사람으로서의 진심이 어렴풋이 스며 있었다.
잠시, 등대 불빛이 유리창에 비쳤다가 사라졌다.
마치 그 순간만큼은
그녀의 순수한 마음속 깊은 곳까지 빛이 스쳤다가
다시 어둠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의 송도 바다는 파도도 없이 고요했지만,
그 고요함이 꼭 평화는 아니었다.
오히려 깊이 잠긴 파도처럼,
숨죽인 무언가가 아래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