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바 위에 뜬 별 2부 1화
1998년 12월 왕비다방
5층 건물의 2층에 난 출입문은
건물의 세월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버텨낸 강화유리 도어였다.
‘왕비다방’이라 새겨진 음각 시트지는 한때 자주색이었을 테지만,
색은 바래고 벗겨져 이제는 희미한 글자만 유리창에 남아 있었다.
‘다’ 자의 디귿 한 획이 언제부터인가 떨어져 나가,
약간 거리를 두고 보면 ‘왕비나방’으로 읽혔다.
그 기묘한 이름 때문에 뜨내기손님들은
“왕비나방에 들렀다 가자”며 키득거리곤 했다.
하지만 이 다방의 사정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농담에 웃지 않았다.
그들은 오히려 낯선 이들의 가벼운 웃음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한술 더 떠 냉랭한 시선을 돌리곤 했다.
이 문 위에는 청동으로 만든 작은 종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문이 열릴 때마다 맑은 소리가 났고,
그때마다 신문을 읽거나 잡담을 하던 사람들이
습관처럼 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부분은 단골이라 서로 익숙한 얼굴들이었지만,
낯선 손님일 경우엔 카운터 안의
주인마담 영숙이 가장 먼저 몸을 일으켰다.
오래된 다방 특유의 풍경들이 그 안에 고여 있었다.
낡은 벽지, 살짝 삐걱거리는 의자,
그리고 피곤에 절은 장사꾼들.
문이 열릴 때마다 울리는 그 청아한 소리가,
잠시나마 이곳 사람들에게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 듯한 착각을 안겨주곤 했다.
짙은 어둠이 국제시장 골목에 내려앉을 무렵,
다방 위 3층의 사교댄스학원 간판에 가장 먼저 불빛이 들어왔다.
그 네온 불빛이 왕비다방 출입문 유리창에 어리어,
알록달록한 색들이 마치 춤을 추듯 흔들렸다.
붉은 조명의 바탕과 녹색 글자에서
흘러나온 반사광이 찰나마다 점멸하며
그 문 앞을 오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스쳐갔다.
문 위에서 이어지는 강렬한 보색의 반짝임은
단순한 빛의 반복이 아니라,
그 문을 여는 이들에게 잠시나마 잊고
지낸 꿈을 떠올리게 하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글자는 지워져 ‘왕비’가 ‘나방’으로 되어버렸지만,
그 문을 수없이 여닫고 지나간 노점상들.
그들의 성실한 하루와 정직한 땀,
그리고 언젠가 나비가 되고 싶은 마음이 묻어 있는 문이기도 했다.
나는 잠시 손끝으로 도어 손잡이의 차가움을 느꼈다.
수많은 손이 스쳐간 흔적이 매끈한 윤기로 남아 있었다.
조심스레 출입문을 밀자, 커피와 담배,
설탕 녹인 달콤한 냄새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서른 평 남짓한 공간.
화창한 날이면 창가마다 반쯤 내려진
레이스 커튼 사이로 가느다란 햇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은 조용히 테이블 위를 어루만지며 진행해오다 유리 재떨이에 닿았다.
언제나 그 자리를 잊지 않는 빛이었다.
투명한 선처럼 들어와 재떨이 속 담배꽁초에 잠시 머물다,
이내 유리 가장자리에서 꺾이며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 짧은 찰나가 이 다방의 하루와 닮아 있었다.
들어왔다가, 앉았다가, 잠시 웃고 나가버리는 사람들처럼
햇살 또한 매일 그렇게 와서, 스스로의 끝을 알고 있었다.
테이블 네 줄이 가지런히 놓인 다방 안.
언제나 그렇듯 오후의 느슨한 시간에는
두세 명의 손님이 커피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는 신문을 반쯤 접어놓고
활자를 눈으로만 훑었고,
누군가는 커피를 식히듯 젓가락질하듯
스푼으로 잔을 천천히 저었다.
온풍기 돌아가는 기계음도, 웃음소리도 크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그 고요함 속에서 유리잔이 맞부딪히는 소리와
금속 스푼이 접시를 긁는
가느다란 떨림이 오후의 정적을 채웠다.
벽 한쪽에는 오래된 카세트데크에서
항상 FM방송의 음악소리가 조용하게 흘러나왔다.
벽을 타고 내려온 음향들이 테이블 사이를 따라
느리게 흐르다가, 출입문 근처 어디쯤에서
오후의 끝자락으로 스며들었다.
창가 쪽에는 키 큰 고무나무 화분들이 줄지어 있었다.
푸른 잎들마다 오후의 나른한 햇빛이 가득 고이곤 했다
. 잎사귀 끝이 흔들릴 때마다
그 위로 이슬 같은 반짝임이 일렁거렸다.
좌측 중앙 카운터에서는 커피포트의 물이 끓으며
잔잔한 수증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너머로 다방 주인, 배영숙의 옆모습이 잠시 비쳤다.
긴 머리카락을 단정히 말아 올려 쪽을 지은 모습은 어딘가 품위가 있었고,
앞치마 주머니에는 늘 그렇듯 수첩과 볼펜이 꽂혀 있었다.
그녀가 커피포트를 들어 올릴 때마다
하얀 팔목에서 얇은 18K 팔찌가 금빛으로 반짝였다.
그 뒤편으로는 좁은 복도가 이어졌고,
복도 끝에는 작지만 정갈한 내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반쯤 열린 내실의 문 사이로 얇은 스웨터 위에
카디건을 걸친 할머니 한 분이 보였다.
노인은 특별한 일이 없는 날이면, 오후에는
은빛 코바늘로 천천히 테이블보를 뜨곤 했다.
그 동작은 느릿했지만 일정했고,
마치 오랜 세월이 몸에 새겨진 리듬처럼 꾸준했다.
레이스 실을 한 올씩 바늘코에 걸 때마다
그것은 단순한 뜨개질이 아니라,
지나온 시간을 조용히 되짚는 일처럼 보였다.
실이 엮이는 자리마다 희미한 추억이 묻어나고 있었다.
얼굴은 갸름한 달걀형이었다.
푸른빛과 갈색이 교차하는 눈동자는 깊은 호수처럼 맑았고,
연세에 비해 여전히 투명해 보이는 피부빛이 돋보였다.
적당히 솟은 코끝은 살집이 적어
단정하면서도 차가운 인상을 남겼다.
전형적인 미인형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만만치 않은 아름다움 때문에
순탄치 않은 세월을 건너온 사람처럼 보였다.
영숙에게서 앞을 보지 못하는 분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녀의 눈동자에는 오히려 세상사를 다 겪고도
조용히 흘려보내는 사람의 평온함이 깃들어 있었다.
미간에서 곧게 내려오다 살짝 솟은 콧등은
그녀가 한때 지녔던 젊은 날의 기품을 여전히 간직한 듯했다.
지금의 그녀는 세월의 흔적과 함께 마음의 결이 닳아
마치 오래된 초상화 속 인물처럼 고요히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 속에서 오히려 오래된 이야기들이 천천히 피어오르는 듯했다.
세월이 오래 흘렀건만,
그 노인의 모습만은 여전히 마음 한편에 남아 있다.
내가 왜 이토록 자세히 그를 떠올리게 되는지는
지금 굳이 말하지 않겠다.
이야기가 조금 더 깊어지면,
그 까닭은 자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이제 나는 오후의 짧은 차 한잔의 휴식을 멈추고 다시
생존의 현장으로 나가야 한다.
출입문에 채 다가가기도 전에
한겨울의 차가운 기운이 피부로 다시 스며들었다.
시장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리고
그제야 현실이 나를 불러내는 듯했다.
나는 문을 밀었다.출입문 위의 종이 가볍게 흔들림과 동시에
댕그렁— 소리가 작은 파문같은 동심원을 그리며
나를 배웅하듯 천천히 계단을 따라 내려왔다.
그 앙증맞은 작은 소리들이 계단층계 중간 쯤에 이르자
마치 날개를 접고 둥지를 찾는 새처럼
본래 나왔던 타원형 종 속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악어형님이 남긴 도바
겨울바람이 바다의 짠내를 잔뜩 머금고
국제시장 골목 깊숙이 스며들었다.
노점 천막 위에는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사람들의 입김이 먼 거리에서도 하얗게 보였다.
손님은 줄었고, 장사꾼들의 목소리도 예전 같지 않았다.
가끔 발길을 멈춘 이들이 주머니 속
구겨진 지폐를 만지작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지난여름, 악어 형님이 세상을 떠난 뒤
나는 몇 번이고 노점을 접으려 했다.
하지만 도바를 잡으면, 이상하게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형님이 마지막 날까지 붙잡았던 좌판 위에는
아직도 그분의 손자국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 판을 바라보고 있으면,
장사를 그만두겠다는 생각은 어느새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내 노점 좌판은 세명약국 옆 골목 중간쯤에 있었다.
본래 악어 형님이 쓰던 자리였다.
형님의 분신 이후, 도바 점유권은 형님의 연인이던
배영숙 씨에게 넘어갔지만, 그녀는 왕비다방을 지켜야 했다.
결국 고정 도바 없이 떠돌던 내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형님 도바는 다른 사람들보다 두 배쯤 넓었다.
나는 도바를 잘라 두 가지 장사를 시작했다.
나는 남성용 겨울 스웨트를 팔았고,
말숙 씨는 어묵과 튀김을 팔았다.
“스웨터 한 장 만 원!”
목이 터져라 외쳐도 IMF 한파 속 사람들은
좀처럼 지갑을 열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옆에서 피어오르는
어묵 국물 냄새가 장터의 숨통을 잠시 틔웠다.
“성호 씨, 국물 좀 더 데워주세요. 손님 온다.”
말숙 씨가 부르자 나는 국자를 들어 국물을 퍼 올렸다.
예전에는 “한 사장님”이라 부르던 호칭이
이제는 “성호 씨”로 굳어졌다.
우리 옆에는 대팔이가 있었다.
그는 리어카 위에 모자와 액세서리를 펼쳐 놓고,
손님이 올 때마다 농을 던졌다.
지난달 자기 자리와 맞바꾸어
내 옆자리인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국물은 내가 본다! 성호야, 니는 그릇하고 젓가락이나 챙겨라.
손님 앞에서 흘리면 안 된다, 알제?”
구 씨 형님이 맞은편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대팔아, 니 입도 입이가 흐흐?
아무리 바쁘더라도 간은 말숙 씨가 봐야 문제가 안 생기지.”
형님 특유의 무표정 속 웃음기 섞인 농담이었다.
짧지만 묵직했다.
골목 건너에는 대팔이모의 튀김 리어카가 있었다.
기름이 지글거리고, 오징어튀김·고추튀김·단호박튀김 냄새가 바람에 실렸다.
그녀의 손끝에서 나온 튀김은 바삭했고, 늘 손님들이 줄을 섰다.
대팔이모의 튀김 리어카는 《아시아의 맛집–부산 편》에도 실릴 만큼 유명했다.
일본 관광객들은 국제시장에 들르면 꼭 그 자리를 찾았다.
악어 형님과 나의 노점 이야기는 지혜 씨 주선으로 오사카 TV에 방영되었다.
다큐 제목은 〈악어와 악어새〉
“노점은 서로를 지켜주며 살아간다”는 주제였다.
일본 관서 지방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고,
노점 철거 문제가 거론되던 시점이라 시민들의 공감도 컸다.
그 덕분에 IMF 한파로 줄어든 손님 대신, 주말마다 더 많은 일본인 관광객이 시장을 찾았다.
그렇지 않았다면 우리는 진작 자리를 접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은 단순하지 않았다.
언론이 몇 번 다루고, 방송 카메라가 다녀간 뒤
국제시장은 묘한 시선 속에 놓였다.
기자들이 슬쩍 슬쩍 이곳 저곳, 고개를 매밀며 기웃거렸고,
관광객들은 “여기가 그 다큐 찍은 데 맞죠?” 하며 셔터를 눌렀다.
그러나 남은 건 따뜻한 국물 한 사발이 아니라,
주기적인 단속과 차가운 눈길뿐이었다.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고, 천막 안의 등불은 흔들렸다.
그 불빛 아래 우리는 하루를 견디고 있었다.
나는 점점 장터보다 대각사로 발길을 더 자주 돌렸다.
여름의 불꽃 이후, 내 안은 무너져 있었다.
형님의 마지막 눈빛은 분노가 아니라 연민이었다.
그 눈빛은 아직도, 분노의 불꽃을 끄지 못한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았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대각사 돌계단을 오를 때마다 불경 소리가 바람결처럼 귓가를 스쳤다.
끝없이 불타오르는 분노와 바닥 없는 좌절 사이, 그 목소리는 작은 위안이었다.
나는 거의 매일 그 길을 올랐다.
법당 안은 난로를 켜지 않아도 시린 바깥에 비해 따뜻했다.
촛불이 잔잔히 흔들리며 부처님 얼굴을 비추고,
향 냄새가 내 가슴속 깊은 곳에 응어리를 조금씩 조금씩 풀어주었다.
나는 늘 같은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호흡이 길어지는 만큼 질문도 길어졌다.
왜 살아야 하는가.
사람답게 산다는 건 무엇인가.
형님은 왜 그 길을 택했는가.
대답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물음 자체가 내 삶을 붙잡았다.
촛불이 마지막 떠나든 날, 형님의 굽은 어깨와 겹쳐 보일 때면,
눈시울이 저려왔다.
어느 날, 명상을 마칠 즈음 주지 스님이 차를 내왔다.
“성호 씨, 차 한 잔 하세요.”
“예, 스님.”
“호흡이 조금 길어졌구먼. 가슴 응어리가 덜 매운 모양일세.”
나는 고개를 숙였다.
“스님, 형님의 선택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게 정말 누굴 구한 걸까요.”
스님은 찻잔의 김을 바라보다 조용히 말했다.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게 아니네.
각자 가슴에 붙은 불이 각자의 방식으로 타오르는 거지.
불은 꺼지는 동시에 옮겨 붙는 법일세.”
“저는 아직도 두렵습니다.
형님의 불꽃이 제 마음을 태우는데…
그 불길을 어떻게 받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두려움을 보는 것도 수행일세.
자네는 지금도 내 동생 악어의 북소리 안에 앉아 있는 셈이지.
소리는 잦아도 울림은 남네.
그 울림이 자네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욕심이 아니라 연민이 가르쳐 줄 게야.”
“스님, 구원이 뭡니까.”
스님은 잠시 웃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내가 아는 구원은 약속이 아니라 습관일세.
매일 같은 시간에 앉고, 같은 숨을 쉬고, 같은 연민을 되뇌는 습관.
어느 날 일어나 걸을 때, 발걸음이 남을 밟지 않는다면, 그게 구원이지.”
스님의 말은 은은했지만 오래 남았다.
시장으로 돌아오니, 말숙 씨가 내 자리를 든든히 지키고 있었다.
“성호 씨, 오늘도 절에 오래 있었습니꺼?
이제 오후 피크 타임 시작이라 퍼떡 퍼떡 움직여야지예! 보이소, 손님이 바로 오네, 튀김 얼른 건져야지예. 타이밍 놓치면 맛이 달라진다 아입니꺼!”
말숙씨가 딴에는 주위에 활기를 불러 넣으려고
자갈치 아지매 말투를 흉내내고있었다.
내가 “예.”라고 빠르게 대답하자,
구 씨 형님이"뭐든지 타이밍이제 "하며
자기 도바의 가방 진열대를 정리하던 손을 잠시 멈추고 나를 보며 눈을 찡끗했다.
시장통 소란 속에 일상의 풍경들이 얼어붙은 골목에
작은 불빛처럼 반짝거리는순간이었다.
♡작가의 말
지난 26일. .도바위에 뜬별 1부를 두달만에 연재를 마쳤읍니다.
이제 다시 2부를 시작합니다 2부는 주인공 성호가 여러가지 어려움을겪고 부산시장 선거에 당선되는데서 끝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