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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모녀 이야기

찬 바람이 머무는 동백 <도바 위에 뜬 별 2부 제 5화>

by 손병호

별과 운명


영숙 어머니가 떠난 뒤, 우리는 내실로 자리를 옮겼다.

“성호 씨, 우리 엄마는 그런 분이에요. 눈은 못 보셔도 사람 마음은 다 보이신다니까요.


예전에도 악어 형님 일 있었을 때, 엄마가 먼저 예감을 하셨죠. ‘그 사람은 오래 못 간다, 이미 폐 쪽이 어둡다. 그리고 곧 부처님과 한 몸이 될 거다’ 하셨거든요.


형님 그렇게 떠나시고 난 뒤 친형님인 대각사 주지 스님이 그러시더라고요.

‘그 당시 이미 폐암 말기였다.’고. 어차피 오래 살지 못하는 것 알고 본인이 작정한 길이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악어 형님에 대한 말을 하면서 갑자기 감정이 북받치는지 그새 그녀의 눈 가장자리가 촉촉해지고 있었다.

그녀는 감정을 추스르려는 듯 얘기를 다른 방향으로 돌렸다.


“얼마 전에 어머니와 함께 시장을 돌러 보던 중이었어요. 어머니께서 성호 씨 도바 근처에서 한참 멈추시더라고요.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의 어머니를 보고 내가 ‘엄마 왜 그래, 사람들 밀리면 복잡해지니까 빨리 가요.’라고 근했지요.


근데 어머니께서는 ‘저 사람, 악어 그 양반이랑 가깝다던 성호인가 하는 동생 맞지? 이상하네… 머리 위에 웬 별이 갑자기 떠 있지.’라고 말씀하시며 고개를 계속 갸웃거리시더라고요.


오늘 아침에는 뜬금없이 ‘칠성님이 사람을 보내주실 건데.’ 하시더라고요. 성호 씨가 다쳐서 올라왔기에, 아침의 말씀이 생각나 병원으로 안 보내고 어머니께 봐 달랬던거죠.”


나는 미신을 믿지도 않았고, 앞날이라는 것도 믿지 않았다. 젊은 시절 고시 공부를 하던 때,


나의 관운과 고시 합격운이 궁금하여 한동안 사주명리학과 운명학에 깊이 매몰된 적이 있었다.

고시 공부보다 운명학에 대한 공부를 더 많이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사주 잘 본다는 사람들이 있으면 전국을 찾아다니며 그들에게 배움을 청하며 의문점을 토론하고 학문적 교유를 했다. 급기야 사주명리학 학원에 초빙받아 강사 노릇까지 해보기도 하였다.


십 년 가까운 공부의 결과, 내가 내린 결론은 이랬다. 미래란 개인의 지향과 경향으로 추론만 할 수 있을 뿐, 그 자체로는 이렇다 할 실체가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영숙 어머니께서 내게 ‘별이 있다’고 한 그 말은 이상하게도 평소의 내 소신과는 다르게 들렸다.


‘도대체 머리 위에 별이 있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그날 이후 며칠 동안, 그 말은 선방의 화두처럼 내 뇌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딘가 그 말이 단순한 비유나 덕담이 아니라 내 미래의 한 조각을 들춰 보고 예고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그 뜻을 직접 물어보는 것도 망설여졌다. 기자 시절 무속인들을 취재하던 때가 떠올랐다.


초월의식을 지닌 사람들은 종종 자신도 모르게 일종의 신탁 같은 상징적인 말을 내뱉고, 그 순간이 지나면 자아가 그 의미를 지워버리곤 했다.


자신이 무슨말을 했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그런 행위를 무업에 종사하는 사람(무당)들은 그들의 용어로 공수라고했다


영숙어머니의 말도 아마 그와 비슷한 것이었을 것이다. 나의 그런 생각에 마치 응답이라도 하듯, 바람 한 점 없는 방 안의 작은 불상 앞에 할머니가 켜두었던 촛불이 잠시 깜박였다.


그날 밤, 나는 다방 내실에서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영숙은 내 다리에 찜질팩을 얹어 주며 말했다.


“엄마는 세상에서 제일 눈 밝은 맹인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이 다들 ‘부처님이 눈 대신 영안편작의 손을 주셨다’고들 해요.”


그녀의 말이 천천히 머릿속을 맴돌았다. 약사여래의 약병, 보살의 손, 그리고 머리 위의 별. 그 모든 게 그날 밤, 내 의식과 무의식의 세계 안에서 묘하게 얽혀 들었다.


젊은 남녀가 같은 방 안에 있었다.

영숙 씨가 내게 그녀의 어머니에 대해 시시콜콜 사설이 길어진 것도 아마 이 같은 어색한 분위기를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대화가 끊긴 자리에 대화보다 더 많은 침묵들이 우리 둘 사이를 오갔으며 시간은 아주 느리게 흘렀다.

벽시계 초침 소리조차 머뭇머뭇거렸고, 그 사이로 묘한 긴장과 따뜻한 온기가 뒤섞였다.


서로가 말을 꺼내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우리는 각자의 마음이 아주 조심스럽게 다가가며 조금씩 조금씩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악어 형님에 대한 공통된 마음이 연결되면서 서로를 위안으로 삼고 그 틈 사이로 외롭고 상처 입은 새들이 부리를 맞대며 의지하고 있는 모양새였다.


그러한 동시에 그것을 서로가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그다지 우리 둘에게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영숙 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돌아가시고 난 후 그 존재가 더 크고 뚜렷해진 악어 형님.


자정이 넘어서자, 두어 블록 떨어진 도로로부터 취객들이 택시를 부르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


멀리 들리는 취객들의 외침 사이로 비닐 천막이 세차게 펄럭거리며 유난히 큰 소리로 유리창을 긁으며 지나갔다.


그녀는 담요를 내 다리에 덮어 주고, 자신은 벽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밖에서는 여전히 노점 천막들이 지칠 줄 모르고 바람에 흔들리며 촤르륵, 촤르륵 횟수를 더하면서 점점 더 자주 유리창을 긁어 대고 있었다.


겨울 다 넘긴 비렁뱅이 이월바람에 얼어 죽는다더니, 부산의 거센 이월의 바람이 밤새 불어댈 조짐이었다.


벽을 보고 모로 돌아누워 있던 영숙 씨가 자세를 바꾸지 않은 채 나를 보고 말을 했다.


“형님 돌아가시고 나서부터요… 성호 씨 눈빛이 자꾸 그 사람을 닮아가는 것 같아요.”

나는 그 말을 듣자 가슴이 먹먹한 동시에 한편으로 가슴에 무언가 아주 얇은 막 같은 것이 덮인 것같이 답답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천장을 쳐다보며 그녀에게 말했다.

“형님 얘긴… 그만합시다.”

“그래요, 그럴게요.”

그리고 우린 둘 다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부자연스러운 침묵의 시간이 모래시계에서 부서져 내리는 가늘고 미세한 시간의 줄기처럼 아주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다리를 고정된 자세로 계속 유지하는 것이 불편하여 조금 움직이려다 갑작스러운 통증에 동작을 멈췄다.


그때 영숙 씨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안 되죠. 움직이지 말라니까요.”
그녀는 내 앞에 쪼그리고 앉아 담요를 다시 펴 주었다.


지금 이 단순한 상황—누군가가 내 곁에서 나를 챙겨 주고 있는—이 내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특히 그 대상이 영숙 씨이기 때문이라는 걸, 당시의 나는 어렴풋이 짐작은 하고 있었었다.

다만, 내마음속의 윤리적인 사고가 끝내 그 생각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그냥, 비록 조금은 어색하지만 외롭지 않은 밤의 포근함에 약간 취해 있었을 뿐이라는 어줍잖은 변명만 간신히 내밀고 있었다.


때로는 말이 없는 시간에 얼마나 많은 약속과 감정, 그리고 기대들이 오갈 수도 있는지.

모두가 아는 사실을 나는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던 시간들이었다.


두사람이 누우면 빠듯한 작은 방 안에 우리의 숨소리와 ‘채칵, 채칵’규칙적으로 들려오는 초침 소리만이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의 그림자는 서로 닿을 듯 말 듯, 그렇게 다정하게 벽 위에 겹쳐 있었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었다.


눈을 뜨니 작은 창 사이로 여린 아침 햇살이, 갓 시집와 부끄럼 타는 신부처럼 내실 방문을 조용히 열고 있었다. 잠시 후, 영숙이 갓 구운 토스트와 모닝 커피잔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어제 악어형님 이야기로 분위기가 이상하게 되어 중단했던 그녀 어머니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었다.


“성호 씨, 어젯밤에 엄마 얘길 더 듣고 싶다 하셨죠. 근데 사실 … 얘기하기 쉬운 이야기가 아니에요.”


영숙은 커피잔을 내려놓고 토스트를 내게 권하며 그녀의 맹인 어머니에 대한 이력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영숙어머니의 신산스런 삶


“저희 어머니는 서울 사대문 안에서 자랐어요. 부유한 양반집 딸이었다지요. 나는 가정 형편상 고등학교만 겨우 졸업했지만, 어머니는 일본 동경 유학까지 다녀온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인텔리였어요.


영어도 곧잘 하세요. 중고등학교에서 영어 교사로 잠시 교편도 잡으셨고요. 그런데 6·25 터지고 피난길에 남편을 잃었어요. 유탄 한 발에 사람 인생이 그렇게 끝나 버린 거예요. 그때 어머니는 스물다섯이었대요.


‘한강 다리 앞에서 불길이 솟았대요. 엄마는… 남편 시신도 찾지 못했다고 해요.’
영숙 씨의 커피는 어느새 식어 가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과 떨리는 손끝에서,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양 어머니의 고통이 스며 나왔다.


“그때부터 엄마 인생은 내리막길로 치달았어요. 완전 바닥이었어요. 부산으로 내려와서 제 외할머니랑 초량시장통에서 국밥 장사하면서 버텼죠. 양은 국자 잡은 손이 하루도 펴질 날이 없었대요. 나중엔 돈을 꽤 벌어 초량 성분도 병원 옆에서 제법 규모가 있는 한식집까지 냈어요. 손맛이 좋아서 장사는 더 잘됐죠.


그때 단골 중에 일본 교토에서 부산을 오가며 장사하던 교포가 있었는데… 그분이 나중에 내 아버지였어요.”
그녀는 고개를 숙였다. “엄마 말로는, 아버지는 늘 차분하고 젠틀했다고 하셨어요. 결혼 얘기까지 오갔고, 내가 생겼을 때는 행복했다고 하더군요.


근데 그때 일이 터졌죠. 간첩 누명. 신문에도 크게 났었더래요. 교포 무역상이 북한 자금을 국내로 운반했다느니 뭐니…

엄마는 집을 잡혀가며 그간 모든 돈을 변호사비로 썼어요. 밑 빠진 독에 물 붓듯이 돈이 들어갔고, 결국 집도 팔았고 가게도 정리했어요.


그 와중에 의지하던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눈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대요. 임신 중이었는데, 병원 갈 형편도 안 되었으니까.

그게 임신중독성 당뇨 때문이었다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


영숙은 안타까운 듯 말끝을 흐렸다.

“세상은 결혼도 안 한 여자가 사생아를 가진 것 무조건 가락질부터 하던 시대였지요. 그런 사람들한테 냉정하잖아요.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고, 엄마는 혼자 나를 낳았어요. 그때부터 우리 집은 어두웠어요.

영주동 산복도로 한 칸짜리 판잣집 등잔불 하나 켜놓고도, 엄마는 ‘밝다’고 하셨죠. 자기 눈에 어둠이 익었으니까.”


듣고 보니 참으로 안타깝기도하고 기가 찬 이야기였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때 엄마는 거의 맹인이 돼 계셨죠. 손으로 세상을 만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예요. 이상한 일이에요.


남의 몸을 손으로 만지면 어디가 아픈지 알게 됐다네요. 처음엔 미쳤다는 소리도 들었다고 해요. 그 손끝 덕분에, 결국 여러 사람들이 살 수 있었다고요.”


나는 눈이 보이지 않게 되면서 감각 기능이 고도로 발달한 사람들이 어느 날 문득 치유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내 주위에 그런 분이 계신다는 것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숙은 평소 과장된 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저희 어머니는 하루에 환자를 딱 열 분 이내봐주셨어요. 돈은 안 받아요. 그 대신 쌀이나 보리쌀 한 홉 씩 만 약사여래 그림 앞에 놓고 가게 했죠. ‘믿음이 약이다.’ 그게 엄마의 말버릇이었어요.”


그녀는 목이 메는지 식은 커피를 단숨에 마시고 이야기를 계속했다.


“3년 만에 무죄 판결을 받고 나온 아버지는 일본으로 바로 떠났어요.

나는 아버지 얼굴도 몰랐지요. 곧 돌아오겠다고 했지만, 그것이 끝이었죠. 그때는 조총련 관계자들이 입국조차 거부당하던 시대였거든요.


설령 요행히 입국 심사를 통과하더라도, 일본 땅에 발을 디디는 순간 언제 또 간첩으로 몰려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었어요. “



엄마는 내내 아버지를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몇 년이 지나고 난 뒤, 가까스로 인편을 통해 간신히 알게 된 건… 아버지가 일본에서 일본인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낳았다는 사실이었죠.


그때 엄마는 모든 걸 닫아버렸습니다. 나에게는 “일본에 있는 그 사람은 죽었다.”라고 말했어요. 내가 초등학교에 막 들어갔을 무렵이었어요.

어머니의 말속에는 체념과 분노, 그리고 배신감이 섞여 있었어요.


내가 어린 나이었지만 엄마의 눈빛과 말투에서, 오래 참아왔던 상처가 그대로 느껴졌죠. 난 사실 아버지가 있는데도 한동안 어머니 앞에서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면 안 되는 것이었어요.


우리 집에서 아버지라는 단어는 금기어가 되어버린 거지요.

그녀는 잠시 나를 쳐다 웃었지만, 쓸쓸함이 묻어잇는 웃음이었다.


“고등학교 때 확실히 알았어요. 아버지가 살아 있다는 걸. 그 사람이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부산에 오는 무역상을 통해 학자금을 보냈다는데, 엄마는 계속 돌려보냈어요.

‘그 돈 받으면 저 사람이 또 우리 인생에 들어온다.’며 돈을 받지 않았던 거지요.



대학이 아닌 요정으로 간 영숙

나는 그때 미쳐버릴 것 같았어요. 대학에 진학 하고 싶었거든요.

엄마는 혹여 그 돈이 빌미가 되어 또다시 ‘사상범의 가족’으로 몰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 거예요.


하지만 그보다 더 큰 건, 아무래도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었겠죠. 그 돈을 받는 순간, 엄마가 지난 스무 해 동안 나를 키우며 견뎌온 세월이 모두 무의미해지는 셈이니까요. 그래서 엄마에게 저는 — 오롯이 혼자 힘으로 키워낸 — 딸이었어야 했을 겁니다.


그게, 엄마가 끝까지 지켜낸 마지막 자존심이었을 거예요.

“나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어요. 성적은 늘 전교 상위권이었어요.


엄마는 스내게2년제 교대로 가라고 하셨지만, 나는 4년제 일반 대학에 가고 싶었죠. 엄마는 그걸 ‘욕심’이라 불렀고, 그때부터 나는 엄마를 원망하기 시작했어요.”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



엄마는 내가 어릴 때부터 그때까지는 내게 항상 하늘 같은 존재나 다름없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로, 엄마의 악착같은 삶이 두렵고 미웠어요. 남들처럼 꿈 많은 스무 살 시절은 내게 없었어요.”


그 시절을 회상하는 그녀의 눈에는 어느새 한 방울씩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결국 등록금이 저렴한 교대에 들어갔지만, 일 년 만에 학교를 중도포기하고 집을 나왔어요.


세상 밖으로 나와서야, 하루 벌어 하루 사는 삶이 어떤 의미인지 처음 알았죠.

저는 반발심에 요정에서 일하기 시작했어요.

초량 고관입구에 있는 정랑각이라는 곳을 내 발로 찾아갔어요


. 대학 국악과 다니는 친구가 거기서 가야금 연주하는 알바를 하고 있었거든요.

어쨌든 빨리 돈을 모아 아파트도 사고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었거든요.


당시에는 주로 일본 관광객들을 상대했어요.

엔화로 팁을 받는데 엔화 가치가 높은 때였으니 수입은 좋았어요.


지독하게 돈을 모았어요. 먹는 것, 입는 것 아껴가며 돈을 모았지요.

손님들을 웃기며, 잠시나마 내 인생을 잊을 수 있었어요 “


술집 생활을 이야기할 즈음 긴장이 되는지

그녀는 담뱃갑에서 담배를 꺼내어 내게 권하고 자기도 불을 붙였다.

그녀의 육감적이고 두툼한 다홍색 입술 사이로 연기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십 년을 꼬박 밖에서 돈 버는 데만 몰두했어요.

서른을 넘기고, 엄마가 점점 늙어가는 모습을 보면서야 깨달았죠.


엄마를 미워할 수 없었어요. 같은 여자 입장에서 어머니는 그 모든 세월을 견뎌내고 버티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어요.

그래서 다방을 열었고, 그때부터 엄마와 다시 함께 살고 있어요. 이젠 말없이도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편한 관계가 된 거지요.


나는 그녀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젊은 시절의 그녀가 겪었을 고단함과 상처가 내 마음 깊이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말없이 털어놓는 사연 하나하나에 그녀가 여태껏 남들에게 숨기고 살아왔을 외로움과 체념이 진하게 묻어 있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내밀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사실 또한 내게 적지 않은 부담으로 다가왔다.

마치 그녀의 상처와 비밀이 깃든 공간 속으로 허락도 받지 않고 나도 모르게 한 발짝 들어선 것만 같았다.

공감과 연민 사이에서 내 마음도 묶인 듯했고,

뭐라 말로 표현할 수도 없어 나는 그냥 멍하니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재일교포아버지의 제안


“얼마 전 아버지가 한국으로 또 왔었어요.

이번에는 조총련 쪽 교포 모국 방문 입국 허가를 받고

정식으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과거에 못 한 보상이라며, 내게 돈을 주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나는 아직 결정을 못 했어요.

엄마는 그저 웃으셨어요. ‘그 돈은 네가 안 받아도 결국 네게로 오게 될 거다.’ 이상하죠? 그런데 이상하게도, 엄마 말은 늘 현실이 되더라고요. “


한 시대에 걸친 그녀의 가족사에 얽힌 긴 이야기가 끝이 났다. 내 눈가도 어느새 물기가 어려 앞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했다.


창틈으로 살며시 스며들던 햇살이 언제부턴가 서서히, 뒷걸음치듯 물러가고 있었다.


여리게 남은 희미한 빛 속에서, 나는 어머니와 딸,

그 두 여인이 견뎌온 모진 세월과 그 안에 담긴 인내, 그리고 그녀들이 가난 속에서 마주했던 시간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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