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면 편해지는 공간이 있다.
연중 백번 이상은 오르는 원당봉 둘레길이 그렇다. 큰 산이 아님에도 ‘삼 첩 칠봉’이라는 안내판이 입구에 서 있고 그래서인지 분화구를 중심으로 천태종, 조계종, 태고종, 각각의 사찰이 있다.
아카시아, 찔레, 수국, 수수꽃다리, 산나리 등 철 따라 다른 꽃이 반길 뿐 아니라 가끔 노루도 만난다. 분화구 중심에 자리한 문강사 연못은 연꽃이 피고 지고 탐스럽게 연밥이 익는다. 언제라도 갈 수 있고 누구도 간섭하지 않는 오롯한 숲 속 정자에 앉아 동네 앞바다를 바라보노라면 선들바람이 속을 시원하게 하는 곳.
봄, 가을, 겨울, 세 계절을 나는 이 숲에 든다.
여름 한 철은 산책길이 바뀐다. 이른 아침에 집에서 15분 정도를 걸어 내려가 바닷가에 슬리퍼를 벗어두고 맨발로 찰랑찰랑 걷는 해변이다. 파도에 종아리쯤까지 적시며 실크처럼 매끈하고 고운 모래 위를 걷다 보면 동쪽이 불그레 해가 떠오른다.
언젠가 명상치유 프로그램에 참여 중 이끌던 분이, 가만히 눈을 감은 후에 가장 좋아하고 편안해지는 장소를 떠올려보라고 했다.
서울 우이동에 살 때라, 그때마다 자주 걷는 우이령 길 바위 위에 앉아 햇살을 받고 있는 나를 떠올리면 온 몸에 따스한 기운이 퍼지는 것 같았다. 때로는 먼 옛날의 어느 공간을 떠올리기도 했다.
어릴 때 내가 좋아한 장소를 두 개만 꼽으라면 복숭아 과수원이 있던 집 뒷산 언덕과 은어가 춤을 추던 동네 앞강이다.
아침 해가 떠오르면 호박꽃과 박꽃이 금별 은별처럼 빛나는 밭이 내려다보이던 언덕, 비 오면 고동(다슬기)이 돌 위로 까맣게 기어 나오던 맑은 강, 그곳들은 내 근원의 그리움이다.
거제도의 공곶이, 광명의 도덕산, 우이동의 산길들도 잊을 수 없다. 그곳이 있어 가쁜 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