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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롯한 하루 Apr 22. 2021

남편과 냉전 중

전쟁의 서막

음산한 꿈에 절로 눈이 떠졌다. 새벽 3시. 핸드폰을 보고 이리저리 뒤척여도 달아난 잠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용히 거실로 나와 공부를 하다 보니 6시였다. 아이와 하루를 보내려면 조금이라도 자야겠다는 생각에 남편 서재에 책을 놓고 문을 닫으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여자의 촉일까? 어두컴컴한 서재에서 유달리 한 곳에 눈이 멈췄다. 독서대 뒤였다. 홀린 듯 손으로 더듬거려보니 병 하나가 있었다. 피곤해서 에너지 드링크를 마셨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넘어갈 일이었고, 어쩌면 그렇게 넘어갈 수 있었을 일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불을 켜서 병을 살피는 나를 발견했다.


이상했다. 약국이나 마트에 파는 드링크 종류라면 제품명이 크게 적혀있을 텐데, 뚜렷한 이름이 없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병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졸린 눈을 비볐다. 이리저리 세 번을 보고 나서야 더듬더듬 몇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허리둘레 감소"


여섯 글자.

단 여섯 글자를 봤을 뿐인데 분노가 차올랐다.


방에 들어가 아이 옆에 몸을 뉘었다. 아이 얼굴을 보며 숨소리를 다 보니 쉽게 잠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헬스를 다녀온 남편의 인기척이 들렸다. 현관문이 닫히고 발자국 소리가 점점 커지더니 방문이 열렸다. 다정한 목소리로 아이를 부르는 남편이 보기 싫었다. 눈을 뜨기 싫었다.




2021년 4월 16일. 금요일. 전쟁의 서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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