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는 지금은 새벽 5시 42분. 아이를 재우다가 함께 잠이 들었다가 은연중에 눈을 뜬 시간은 1시 46분. 약 4시간 동안 잠을 잘 수 없었다. 오늘 나에게 있었던,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를 낸 사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소심하다. 세심하기도 하고 섬세하기도 하다. 어릴 때를 돌아보면 나는 민감했다. 옷은 무조건 편해야 했고, 대학 캠퍼스는 운동화를 신고 누렸으며 직장 생활을 할 때에도 3cm가 넘는 구두는 보지도 않고 신지도 않았다. 잠자리가 바뀌면 그날은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엄마가 보이지 않으면 불안했고 밖에 나갔다가도 집에 돌아갈 생각만 하면 행복한 아이였다. 그렇게 약 30년이 넘는 시간을 보냈고 결혼을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가 태어났다.
38개월을 옆에 끼고 있었다. '기저귀를 떼면 기관에 보내야지'가 '자신의 생각을 말로 표현할 때 보내야지'로 바뀌었고 전 세계를 휩쓴 코로나 바이러스로 3년이 넘게 가정 보육을 했다. 물론 후회하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보낸 시간이 힘들었지만 너무나도 소중했기에. 하지만 '나도 혼자 카페에 가서 커피 한잔 마시고 싶다'는 작은 바람이 커져갔고, 어느 날 나 없이도 혼자서 잘 노는 아이를 보며 어린이집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가까운 것이 최고라는 생각에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을 생각했고, 몇 군데 상담을 받고 남편과 상의해서 한 곳을 선택했다. 아이를 처음 보내고 나는 꿈에 그리던 시간을 가졌다. 카페에 가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시켰다. 그리고 나는 눈물을 흘렸다. 문자로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내 마음이 걱정과 벅참, 그 어느 사이를 맴돌 때쯤 아이를 데리러 갔다.
아이는 두 달이 좀 넘어서야 완벽히 적응했다. 아이를 맡기고 온전히 믿지 못하는 내 마음을 탓하고, 너무 늦게 보낸 건 아닌지 나의 육아 방식을 탓하다 보니 어느덧 몇 개월이 흘렀다. 나와 다르게 활동적인 아이는 낮잠 시간을 힘들어했고, 작은 사건이 하나 있었다. 선생님은 있었던 일을 상세히 말씀해주셨지만 그때부터 나의 머리는 마치 화수분처럼 수많은 생각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소심한 나는 아이가 상처받을까 봐, 선생님이 나를 볼 때마다 껄끄러우실까 봐, 혹여나 우리 아이가 미운털이 박힐까 봐 이 일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해결하지 못했고, 얼마 뒤 원장님의 정리로 일이 마무리되었다. 나는 일주일 동안 아이와 함께 신나게 놀았다. 처음으로 함께 영화관에서 영화도 보고, 그동안 가보지 못한 새로운 곳에 가서 놀기도 했다. 새로운 일을 하는 것은 나에게는 엄청난 힘이 필요하고 큰 도전이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워도 지워도 떠오르는 생각 때문에 내가 침전해 버릴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번 주 월요일, 아이와 함께 저녁을 먹다가 아이는 지난번과 비슷한 일이 오늘도 있었다고 말했다. 아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내 머리에는 지진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다급했던 나는 친정 엄마와 남편에게 전화를 했다. 다음날이 되어도 여전히 나는 생각이 꼬리를 문 집념에 사로잡힌 채 아침을 맞았다. 아이를 등원시키고 아이 반 친구 엄마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문득 '나는 왜 이렇게 깊게 생각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남편, 친정엄마, 지인에게 전화를 하며 내 불안함을 달래고 있었다.
메아리처럼 돌아오는 비슷한 답을 듣고 또 들으며 이대로 있다가는 또 고민하며 하루를 보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일지 며칠일지 몇 달일지 알 수 없었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원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밝은 목소리가 한 줄기 빛처럼 따뜻했고 나는 아이를 원에 보낸 지 8개월 만에 원장님을 찾아갔다.
원장님은 호탕하시다. 여장부 같은 스타일이다. 결혼하기 전 일로 만난 여자들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의 카리스마를 가지고 있었다. 부럽기도 하면서 왠지 다가가기 힘들겠다는 생각에 나는 원장님을 피했다. 일의 업무가 많으시고 바쁘시기도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는 원장님을 피한 것 같다. 그랬던 내가 원장님을 내 발로 찾아갔다.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네받고 내년에 보낼 유치원에 대해 상담을 받고 오늘 찾아온 진짜 목적인 사건에 대해 말을 꺼냈다. 어떻게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따뜻한 차를 마셨고 찻잔을 들고 있었지만 내 몸은 떨렸고 이윽고 목소리도 떨리기 시작했다. 눈에는 서러움인지 답답함인지 알 수 없는 무엇이 맺혔다가 다시 들어갔다.
나는 불편한 이야기를 굳이 꺼내지 않는다.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싶다. 즉 갈등을 싫어한다. 그래서 나는 주로 '회피'라는 방어기제를 사용했다. 혼자였을 때는 이것이 가능했다. 상처를 받아도 내가 참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갈등 거리가 생기지 않았다. 갈등이 생기지 않기 위해 내가 맡은 일은 철두철미하게 하려고 노력했고, 혹여나 갈등이 생길 때면 피했다. 이것이 가능했다. 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아이의 일은 달랐다. 끊임없는 갈등 속에 파묻혀도 다음날이 되면 또 마주쳤고 마주해야 했다. 지독하게 피하고 싶어도 피해지지 않는 일이 육아였다. 다행히 원장님은 나의 마음을 이해해주셨다. 비슷한 자녀를 키우며 동일한 일이 있었다는 말에 동질감이 느껴졌다. 모든 일을 척척 처리하고 수많은 학부모를 상대하는 원장님도 결국 한 아이의 엄마였다.
8개월 만에 내 발로 원장님을 찾은 나는 조리 있게 이야기하다가도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했고 그렇게 이야기는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다가 아이의 등원 시간이 가까워오자 마무리지어졌다. 그리곤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조금만 더 일찍 찾아오셨으면 좋았을 것 같아요.'
아이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아이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오늘 엄마가 엄청 용기를 냈거든? 다른 사람들에게는 쉬운 일이기도 할테지만 엄마한테는 엄청 힘든 일이었어. 근데 네가 있어서 엄마가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 같아. 고마워!'
내 말을 이해했는지 이해하지 못했는지, 아이는 침묵으로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나는 오랜만에 사람 대 사람으로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후폭풍이 무서워서인지, 또 다른 걱정이 드리워졌는지는 몰라도 잠에서 깼고, 글을 쓰며 내 마음을 달래야지 하는 생각에 오랜만에 들어온 브런치에서 눈물을 훔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 있다. 그래서 현재 시간은 오전 6시 43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