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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네풀 Mar 06. 2023

선물 같은 아이

한동안 배가 나온 여자가 부러웠다. 길거리에서 한껏 부른 배를 하고 당당하게 다니는 임산부가 너무 부러워서 눈물이 났다. 부럽다 못해 질투가 났다. ‘임신한 게 자랑이야? 뭐 저렇게 들러붙는 옷을 입은 거지?’ 혼자 중얼거리며 애써 쳐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자연임신이 어려워 인공수정을 통해 가진 아이가 세 번째 잘 못 되었을 때 주변사람들은 나에게 말조심했다. 친척들도 누가 임신했는지 말을 전하지 않았고 돌잔치에도 부르지도 않았다. 서글펐다. 점점 옹졸해지는 나 자신이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뭐든 열심히 하며 살았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직장도 성실하게 다녔다. '열심히 하면 안 되는 게 없다'가 생활신조였다. 그런데 아이만큼은 내가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인생 최대의 시련기였다. 임신에 좋다는 음식과 임신이 된다는 유명 한의원에서 한약도 먹었다. 살도 뺐다. 너무 뚱뚱하면 임신이 안된다고 해서... 그러다가 또 말라서 임신이 안 되는 거 아니냐며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정말 어쩌라는 거야... 주변에서 말들도 많았다. 모두들 걱정 어린 시선이라는 걸 알지만 그래도 짜증 나고 괴로운 거 어쩔 수가 없었다.

남편은 애써 밝게 지냈다. 임신하면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막상 잘못되면 괜찮다고 몸이나 잘 추스르라며 우울한 나를 달랬다. 나는 웃기지도 않는 농담으로 나를 웃기는 남편이 꼴 보기 싫었다 뭐가 괜찮다는 것인가? 난 괜찮지가 않은데 자기 몸 아니라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나 싶었다.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도 보기 싫고 그냥 다 싫었다. 아무 생각 없이 게임에 열중하는 남편의 뒤통수를 때리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래 넌 그저 게임만 하면 좋은 거지”

난 가끔 시비를 걸었다

 “아 왜 또 그래? 심심해? 뭐 먹으러 갈까?”

남편은 늘 내 눈치를 봤다. 그러다가 시험관 시술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지금처럼 지원이 없었다. 꽤 많은 돈이 들었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이라고 생각하며 시도했다. 인공수정보다 훨씬 어려운 과정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중간에 배란유도주사 부작용으로 입원도 해야 했다. 배에 날마다 주사도 직접 놓았다. 기다리던 임신이 되었다. 한고비 한고비가 정말 힘들었다. 임신을 하고도 주변에 알리지도 못했다 어느 정도 안정기에 들어서면 말해야지 하고 생각했다

 임신을 하고 나서 꿈을 꾸었다. 지금도 그 꿈이 눈에 선하다. 쫓기는 꿈이었다. 누군가 나를 쫓아왔다 낭떠러지 끝에서 나는 그만 떨어지고 말았다. 꿈에서 깼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팠다. 하혈이 시작됐다.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알기에 난 대성통곡을 했다. 남편은 하혈을 하는 나를 부축해 병원에 갔다. 의사는 너무 아쉽지만 여기서 수술을 해서 깨끗이 마무리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나는 또 아이를 잃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임신이었다. 남편은 미역국을 끓여 밥상을 차리 놓고 욕실에 들어갔다. 샤워기에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흐흑흑...”

떨어지는 물소리에 섞여 나는 남편의 신음 같은 울음소리.... 목이 턱 메었다. 남편도 남편도 아팠구나 말하지도 못하고 나만큼 아프고 슬펐구나.... 난 그 이후로 남편이 뭘 해도 용서가 됐다. 그 마음이 너무 안쓰러워서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관 시술을 통해 찾아온 아기... 너무나 간절히 바라던 아기가 찾아왔다 선물처럼 그렇게 우리 게 와 주었다.

 그때의 기쁨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을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다. 하지만 또 한 번의 고비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막 30주가 됐을 때 검진에서 의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면 한참을 초음파를 봤다. 그리고 건네는 말은 조심스러웠다.

 “음 큰 병원에 가서 정말 초음파를 해야 할거 같네요. 아이가 한 달째 몸무게가 변함이 없고 움직임이 적어서....”

의사는 말끝이 흐려졌다. 나와 인공수정을 세 번이나 같이한 의사 선생님이었고 유산할 때마다 나 만큼 안타까워하신 분이었다.

 “네?”

나는 귀를 의심했다. 무슨 말인지 몰랐다.  다음날 대학 병원에 가서 정밀 초음파를 한 결과 바로 수술로 아이를  꺼내야 한다고 했다 태반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고, 그래서 아이에게 영양이 전혀 가지 않고 있다며 이대로 두면.... 그다음 말은 지금도 꺼내기가 두렵고 무섭다. 아무 준비도 없이 바로 수술에 들어갔다. 그리고 1.7kg으로 태어난 작고도 작은 아이... 인큐베이터에서 한 달을 지냈다.

 하루에 두 번 아이이 면회가 허락이 됐다. 나는 아무 연고도 없는 대학 병원 옆 산후조리원에서 아이를 보러 다녔다. 산후조리원에 아이 없이 있는 산모는 나뿐이었다. 조금은 외로웠다. 하지만 나는 아이만 괜찮으면 모든 게 다 괜찮다 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조그만 아이를 보러 다녔다. 아이를 볼 때마다 다짐했다. 그냥, 제발 건강만 해다오. 다른 것 아무것도 필요 없으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하며 기도했다. 어느 날 남편은 아이에게 편지를 써 왔다 인큐베이터 앞에서 진지하고 엄숙하게 편지를 읽었다.‘ 넌 태어난 것 만으로 우리에게 효도는 다 했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난 웃었다. 하지만 남편은 진심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절대 아이에게 모든 강요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그냥 아이가 즐겁고 행복하게 살게 해 주자고 했다.

 지금 그 아이가 벌써 고 1이다. 그때가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아이는 빨리 자랐다. 내 바람대로 아이는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 주었다. 아이가 요즘 공부하느라 힘들다. 난 늘 묻는다

 “힘드니? 너무 애쓰지 마 힘들면 학원 안 다녀도 돼”

아이가 말한다

 “왜 그래? 더 무섭네”

하며 웃는다

 “다른 엄마들하고 그러면 참고 다니라고 하는데 엄마는 왜 그래? 나야 좋지만 진심인지 궁금해”

 “진심이야 네가 행복하지 않으면 공부가 다 무슨 소용이니?

  내가 너를 인큐베이터에 넣고 얼마나 울었는지 아니?”

 “에구 우리 어머니 또 레퍼토리 나오시네... 알겠어요 어머니 사설이 더 길어지기 전에 학원 갑니다.”

다 커버린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괜스레 마음이 뭉클해진다. 아이가 있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완벽하게 내가 책임져야 할 내 아이가 있고 온전한 사랑을 전할 수 있는 아이가 있다는 건 정말 인생의 커다란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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