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의 환자에게 들은 따스한 한마디
"너희들 내일 실기 평가 있는 거 잊지 말아라."
외래 진료를 다 끝마치고 집으로 가려는데 교수님이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벌써 병원에서 환자 진료 보고 처방까지 내리고 있는 레지던트에게 이제 와서 실기평가라뇨.
교수님 그런 농담 재미없어요, 라며 동기 인턴들과 웃고 있으니 교수님이 오늘 아침의 이메일을 확인하라 하셨다. 반신반의하며 이메일 목록을 주르륵 넘겨보는데, 제목란에 날짜만 떡하니 적혀있는 메일 하나를 발견했다. 본문을 열어보니 바로 다음 날 실기평가가 있을 거고, 어디로 몇 시까지 가라는 굉장히 담백한 이메일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험 바로 전날에 이런 이메일을 보내는 건 너무하지 않습니까, 무슨 쪽지 시험도 아니고.
그제야 정말로 내일 오후에 시험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우리는 어느새 웃음기가 사라진 채 이메일을 다시금 몇 번이고 읽어봤다. 나는 침착하게 교수님께 물어봤다.
".... 이거 낙제점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얘가 큰일 날 소리 하네. 너 낙제하면 나랑 같이 면답 하게 될 줄 알아."
"아.. 면담 정도면 괜찮죠. 병원에서 쫓겨나는 것도 아닌데."
"면담하게 되면 너 모의 환자 진료 보는 영상 틀어서 나랑 같이 복습할 건데?"
"..."
상상만으로 너무 끔찍해 나는 더 이상의 질문을 하지 않았다.
실기 시험에 있어서는 의대생 시절부터 늘 좋지 못한 성적을 받았었다. 내 기억으로는 가장 높게 받았던 점수는 85점이었었다. 나를 머릿속 평가지로 점수를 매기고 있는 모의 환자, 10분 안에 완성해야 되는 진료, 거기에 각 방마다 나를 응시하고 있는 시험관리자들이 있으니 이 사람 저 사람 눈치를 보다 보면 시험을 망치기 일쑤였다. 아무리 기본적인 진료라 하더라도 내가 하는 말, 어감, 행동 모든 게 하나하나 점수가 매겨진다 생각하면 숨이 텁텁 막혀오곤 했었다.
시험 당일날 점심을 대충 먹고 인턴 동기들과 차에 올라타 허겁지겁 시험장으로 향했다. 단체로 다 늦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재빠르게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하고 늦지 않게 시험을 시작할 수 있었다. 시험 규칙은 간단했다. 들어가서 환자의 증상에 따른 문진을 하고, 신체검사를 하고, 마무리로 처방과 상담을 하면 된다. 진료를 끝마치고 바깥으로 나와 차트를 작성하고, 다시 방으로 들어가 모의 환자에게서 즉석 피드백을 받는다.
아니 잠깐만,
즉석에서 피드백?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다. 아니, 피드백을 구두로 바로 주실 필요가 있나? 의대생 시절처럼 그냥 점수로 환산된 평가를 받는 게 아니라고? 속으로 이 시험 주최자들에게 열심히 항의를 하며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첫 번째 진료실 방 앞에 섰다. 에라 모르겠다. 나중에 교수님과 사이좋게 면담이나 하지 뭐.
내용을 유출해선 안되니 시험이 어땠는지 자세히 적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 시험을 보면서 꾸준히 놀라웠던 점은 내 피드백이 상상했던 것보다 나쁘지 않다는 점이었다.
의대생 시절만큼이나 긴장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다. 그동안 매일마다 환자들을 꾸준히 봐온 덕인지 우리 진료소에서 뵙는 환자들 중 한 분이라 생각하고 평상시처럼 대하니 긴장이 한츰 누그러졌다. 물론, 점수에 필요한 요소들을 꾸준히 머릿속으로 상기시키며 너무 거리낌 없이 대하지 않도록 주의를 하면서 말이다. 그 덕분인지 피드백 시간에는 굉장한 호평을 받았다. 목소리가 차분해서 듣기 좋았다, 마음이 평온해지는 기분이었다, 꾸준히 눈을 맞춰줘서 날 진심으로 대하고 있는 게 느껴졌다, 등 듣기만 해도 몸이 베베 꼬이는 칭찬을 많이 들었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속 깊이 와닿은 피드백이 있었다.
저라면 쌤에게 다시 진료받으러 올 거예요.
참 따스한 한 마디였다. 참 소중해서, 오랫동안 곱씹으며 잊지 않기 위해 이렇게 브런치 글을 쓰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걸 꺼리다 보니 처음 보는 환자들에게 내 어색함이 그대로 전달되지 않을까 늘 걱정이었다. 거기에 아직도 많은 걸 배워나가는 인턴으로서 내 미숙함이 여김 없이 보일 때면 이걸로 신뢰감이 깨지지는 않을까, 실망하셔서 담당의를 바꿔달라 하시지 않을까 싶어 늘 조금 위축된 상태로 환자들을 진료하곤 했다. 별 일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스스로 스트레스를 받는 날들이 이어지면서 결국엔 환자를 보지 않는 병리학으로 아예 과를 바꿔버릴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런데 간혹 가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오는 저런 한 마디가 잘하고 있다며 다정하게 용기를 북돋아준다. 아무리 내성적이고 인간관계에 미숙해도,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가짐 하나로 이 분야에 뛰어든 내가 틀린 선택을 내리지 않았다고 다독여준다.
아,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만점보다 훨씬 더 소중한 응원을 듣고 나니 마음이 한층 가벼워졌다.
낙제점 받으면 교수님과 이 순간을 영상으로 돌려보면서 열심히 자랑이나 할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