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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Nov 25. 2023

박카스

정호는 한 여름 땡볕아래서 옮겨야 할 택배들을 차곡차곡 쌓았다. 차에 에어컨을 풀가동 하지만 땀이 식을 새도 없이 움직여야 했다. 오늘 할당량을 모두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택배일을 시작한 건 6개월 전부터이다.  

군대를 다녀온 후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정호는 취직하지 못했다. 수도권 대학을 졸업했지만 취업은 어려웠다. 100군데가 넘게 이력서를 내봐도 자신을 써주겠다는 회사는 없었다. 탈락입니다 라는 글자를 볼 때마다 정호는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그렇다고 여유 있게 취업 준비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학자금 대출도 갚아야 했고 생활비조차 빠듯했다. 집에 손을 벌릴 수도 없었다.


"이 일이 몸이 힘들긴 한데 자기 하는 만큼 벌어가니까 괜찮아. 어때해볼래?"


먼저 졸업한 민수 선배는 이미 택배 업에 뛰어들어 일을 하고 있었다.


"형 과 탑이었는데. 취업은 아예 포기하신 거예요?"

"택배가 어때서. 나는 택배 회사에 취업한 거야. 대기업, 중견기업 취직한 거랑 택배회사 취직한 게 뭐가 달라? 앉아서 일하는 거랑 몸으로 뛰는 일의 차이? 근데 나는 별 차이 없다고 생각해. 졸업하자마자 OO회사에 취업한 거 알고 있지?"


민수 형은 졸업 전에 이미 대기업에 취업을 했었다. 그때 친한 선후배가 모여 축하파티를 했으니까. 그런데 형은 석 달만에 회사를 나왔다.


"내가 적응을 못한 것도 있지만 오히려 몸 쓰면서 일하는 게 맘이 더 편하더라고. 사람마다 각자 맞는 일이 있겠지. 나는 지금 너무 만족해. 내가 아닌 택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지만 기다려 주는 사람들을 위해 발로 뛰는 이 일이 좋아. 돈도 내가 한 만큼 벌 수 있고. 초반에는 멋모르고 무리해서 일을 했는데, 요즘은 나를 위한 여가 시간도 갖기도 하고."


민수 형의 말을 들으면 혹한 마음도 있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택배 일은 절대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너 택배일을 내가 어떻게 해. 이런 생각하지? 직업에 귀천이 어딨어. 그리고 먹고살아야 하는데 그런 거 따질 시간이 어디 있냐? 내가 정 붙이고 마음 붙이고 어떤 일이든 사명감을 가지면 귀한 일이 되는 거야."


정 붙이고 마음 붙이고 어떤 일이든 사명감을 가지면 귀한 일이 된다라.

그 말에도 머뭇거리던 정호는 날아오는 대출 고지서에 결국 택배 회사에 취업하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낯선 동네에서 헤매기도 하고 택배를 잘못 배송하기도 했다. 일이 손에 익을 때까지는 잦은 실수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첫 달은 많은 돈을 받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온몸에 생긴 근육통과 받은 스트레스에 비하면 현저히 작은 돈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두세 달을 일을 하다 보니 제법 능숙한 택배기사가 되어 있었다.

월급은 점점 늘어났고 밤에 파스를 붙이고 자야 했지만 대출비도 갚고 생활비를 쓰고도 제법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며 일의 보람도 느꼈다. 민수 형의 말대로 자신을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택배를 받고 기뻐하는 사람들을 보면 내심 뿌듯했다. 그간의 일들을 떠올리자 피식 웃음이 났다.

이제 마지막 배달을 위해 들어선 아파트.

정호는 택배를 기다릴 고객님을 생각하며 서둘러 박스를 챙겨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고객님의 집 앞에서 벨을 누른 후 택배를 문 앞에 놓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사진을 찍으려는 순간 집주인이 문을 열고 나왔다. 정호는 짧게 인사를 하고는 주인이 직접 택배를 드는 모습을 보고는 뒤돌아서 가려고 했다. 그때 아주머니가 정호를 불러 세웠다.


"어이 아저씨."


어이? 아저씨까지야 그렇다 쳐도 어이? 정호는 순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네?"


아주머니는 정호를 위아래로 훑더니


"내려가는 길에 이것 좀 버려줘요."

"네?"


어이없는 말에 정호는 순간 뇌가 정지되는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어차피 내려가니까 이것 좀 분리수거함에 버려달라고요."

"고객님. 저는 택배 기사지 청소부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탁하는 거잖아요."

"죄송합니다. 직접 갖다 버리세요."


정호는 불편한 대화를 뒤로하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때 일부러 들으라는 듯한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꼴랑 택배 배달이나 하는 주제에."


정호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요즘 시대에도 직업에 귀천을 따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가. 가끔 뉴스에만 보던 일을 직접 경험하자 얼굴이 시뻘게졌다. 당장이라도 뛰어가 사과하라고 말하고 싶지만 얼른 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차로 돌아온 정호는 에어컨 바람을 높였다. 더위에 흐르는 땀인지 당황해서 흐르는 식은땀인지 알 수 없는 것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택배 배달이나 하는 주제에..'


자신도 처음에는 택배 일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지만 직접 일을 해보고 나서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불법도 아니고 성실히 내 몸으로 뛰어 일을 하는 것이니 귀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그 아주머니의 말에 자신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땀에 찌들어 있는 몸. 밤 새 붙여놔 씻어도 지워지지 않는 파스 자국. 그 아주머니가 이상하고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백번을 생각했지만 그 한 마디가 정호를 주눅 들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 후 잠시 통화한 민수 형은 보통의 일이라며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다음 날 일하는 내내 그 말이 떠올라 초보 같은 실수를 몇 번 하고 말았다.


'신경 쓰지 말자. 저번에 뉴스 보니까 그런 사람이 무개념이라고 댓글들에 쓰여 있었잖아. 그런 사람 말 신경 쓸 필요가 없어.'


정호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괜찮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다.

훌훌 털어버릴 수는 없지만 잊기로 했다. 다음번에 또 그런 말을 하면 참지 말고 말해줘야지라고도 생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정호는 그 아파트로 또다시 택배 배달을 가게 됐다. 혹시나 그 아주머니의 집일까 봐 주소를 확인해 보니 그 아주머니의 옆집이었다.


'하필이면'


정호는 택배를 챙겨 그때와 같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언짢은 마음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났다. 빨리 물건을 전달하고 이 자리를 벗어나야지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정호는 택배를 문 앞에 놓고 벨을 눌렀다. 그때 벨을 누른 집이 아니라 옆집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벨을 누른 집의 문도 열렸다. 그 아주머니는 문 앞에 쓰레기를 내놓으려는 듯 보였다. 정호는 아주머니 쪽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택배 주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바로 뒤돌아 섰다. 그러자 아기 목소리가 들리는 택배 주인집에서 잠시만요 라고 정호를 불러 세웠다.

이놈의 아파트는 다 똑같구나. 또 쓰레기를 버려 달라고 하겠지.  

정호는 짜증 가득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아주머니도 들어가지 않고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마 애기 엄마가 쓰레기를 부탁하면 자신도 같이 할 속셈인 것 같았다.


"기사님 잠시만요!"


애기 엄마는 어이, 아저씨라고도 하지 않고 기사님이라고 정중하게 부르며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리고 잠시 문이 닫히고는 4,5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함께 나왔다. 애기는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하고는 정호에게 무언가를 건네었다.


"아 괜찮습니다."

"날도 더운데 하나 드세요. 항상 저희 집에 오시는 분 맞으시죠? 감사합니다."


애기 엄마와 아이는 웃으며 박카스 한 병을 정호에게 주었다. 인상을 쓰고 있던 자신의 모습에 괜히 머쓱해진 정호는 감사하다며 박카스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문을 열어둔 채 보고 있던 아주머니를 바라보았다. 아주머니는 낭패라는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휙 돌리고는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정호는 감사하다고 한 번 더 인사를 드리고는 박카스를 꼭 쥐고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이는 들어가자는 엄마의 말에도 정호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차에 올라타서 손에 쥐고 있던 박카스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작은 음료 한 병에 그 간의 혼란스러움과 내심 받았던 상처가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상처와 위로를 한 장소에서 받은 정호. 앞으로는 안좋은 일이 생겨도 조금은 덜 상처받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호는 경쾌하게 박카스의 뚜껑을 열어 한 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안전벨트를 메고는 밝은 표정을 지으며 다음 장소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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