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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샘 Nov 19. 2024

13. 프롤로그는 전주곡

민준의 부부는 아이를 낳지 않기로 했다. 자신들을 닮은 이쁜 아이를 낳고 싶지만 이런 세상을 살게 하고 싶지 않다고. 그것보다 민준은 자신이 혹 무능력해 아이의 삶에 방해가 될까 두려워 그런 것이라 말했다.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않았다. 아린은 그의 삶이 궁금하면서도 더 이상의 호기심은 과하다 생각했다. 

“이렇게 편하게 말하니 속이 후련하네요. 괜히 똥폼 잡는다고…”

민준이 머리를 긁적이자 정우가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다 그렇죠 뭐. 사실 여기 들어올 때 긴장되긴 하잖아요. 다들 장르만 다를 뿐 작가분들이 모인 곳인데 예민할 수 있어요. 그래도 본래 성격이 까칠하시지 않아서 다행인데요.”

정우의 우스갯소리에 세 사람은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저 그런데 두 분은 연인이세요?”

민준은 아린과 정우를 번갈아 보았다. 당황한 아린을 대신해 정우가 그의 말에 답했다. 

“아니요. 저만 좋아해요. 이 정도는 얘기해도 되죠 선배?”

일본을 다녀온 후 한 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아 그래요? 두 분 분위기가 꼭 연인 같아서. 정우 씨 괜찮은 사람 같은데 왜 안 받아 줘요?”

민준은 정말 궁금하다는 표정이었다.

“저… 그게…”

“아닙니다. 아니에요. 두 사람의 일인데 제가 너무 주책맞았죠. 그럴 이유가 있겠죠. 미안합니다.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 같아 기분이 좋아져서 선을 넘었네요.”

 그때 혼자 작업실에 남아 있던 정은이 올라왔다. 타이밍 좋게 올라온 정은 덕에 아린과 정우에 대한 이야기는 뒤로 물러났다.  

“내 이럴 줄 알았어. 또 나만 빼고. 나도 흡연가가 되어야 하나. 맨날 왜 여기서 대화해요 다들. 나도 좀 껴주라고. “

정은이 다가오자 민준은 손을 내밀었다. 조금 전의 까칠했던 자신을 잊어 달라며.

“이해해요 이해해. 전 더했는걸요? 괜찮아요. 그나저나 왜 자꾸 여기서 대화하냐고요. 저 진짜 흡연해요?”

“아니 아니. 내려가요. 참 민준형님. 그냥 형님이라고 부를게요. 오늘이나 내일 회식 어떠세요? 삼겹살 소주!”

네 사람은 회식 시간을 정한 후 함께 작업실로 내려왔다. 내려오는 동안 다음부터 흡연실 갈 때는 자신도 데려가라는 정은을 말리느라 아린은 진땀을 흘렸다. 


작업실에 내려온 후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작업을 시작했다. 조금 전 들뜨고 화기애애했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진지하게 바뀌었다. 정우를 시작으로 민준과 정은의 키보드 소리까지 어우러져 꼭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고 있는 듯했다. 여전히 아린의 키보드만 연주되지 않았다. 아린은 아직 프롤로그에 대한 고민이 끝나지 않았다. 

책의 첫 시작.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이 프롤로그라고 생각했다. 성공적인 프롤로그를 완성한다면 그 이후의 글은 술술 풀릴 거라는 확신. 아린에게 프롤로그란 그런 것이었다. 그 글의 첫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뭔가 빠진 듯한 리듬 속에 정우가 아린을 바라보았다. 이제 시작만 하면 된다던 아린의 키보드 소리가 들리지 않는단 걸 알아챘기 때문이다. 

정우는 잠시 일어나 아린에게 다가갔다. 

“선배, 글이 안 풀려요?”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던 아린은 정우의 말에 두 손을 키보드에서 멀리 떨어뜨렸다.

“프롤로그를 써야 하는데 어떤 말로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어. 이게 딱 시작만 되면 줄줄 나올 줄 알았는데.”

“아님 프롤로그를 마지막에 쓰는 건 어때요?”

프롤로그를 마지막에? 

학창 시절에 공부를 할 때도 꼭 단원 순서대로, 무엇이든 처음부터 차례대로 해오던 아린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아린은 어떻게 프롤로그를 마지막에 쓰냐고 되물었다. 

“프롤로그를 어떻게 마지막에 써? 그럼 글의 흐름이 망가지지 않아?”

“선배. 처음부터 완벽한 글은 없어요. 생각나는 대로 쓰고 퇴고할 때 순서를 맞춰봐도 괜찮아요. 시간의 흐름대로만 글을 쓰려고 하지 말고 틀을 조금 깨 봐요. 우선 큰 단락만 써놓고 프롤로그가 생각나면 그때 정리해도 늦지 않잖아요.”

그때 정은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는 정우의 말을 거들었다.

“맞아요 언니. 저도 글 대충 끄적거려 놓고 틀을 짜기도 해요. 언니 너무 완벽하게 하려고 해. 그러지 말고 일단 생각나는 대로 써 놓고 배열을 맞춰봐요. “

프롤로그를 마지막에 쓰고, 시간의 흐름대로만 쓰지 말라는 말이 아린에게는 어려웠다. 

“프롤로그는 음악으로 치면 전주곡이잖아요. 전주가 좋아야 사람들이 계속 듣는 것처럼 프롤로그가 가장 중요하지 않을까?”

정우는 그러니 급하게 쓸 필요 없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게 전주라고 생각이 든다면 굳이 처음 그 전주를 쓸 필요는 없다며 말이다. 

“유행곡을 많이 쓴 작곡가가 그랬어요. 갑자기 떠오르는 게 첫 리듬이 아니라 후렴구라고. 중독성 있는 후렴구가 떠오르면 그걸 바탕으로 음악을 완성하는 거죠. 봐봐요. 만약 우리가 작곡가라면 음악을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만들겠어요? 아니잖아요. 흥얼거리다 뇌리에 박히는 음이 떠오르면 그 음은 후렴구가 되지 전주가 되지 않아요. 글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

글도 마찬가지다. 중독되는 후렴구처럼 소설 중반부와 후반부에는 독자를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언제 어디서 들려오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을 듯한 전주곡처럼 프로롤그는 독자를 끌어들인다. 

아린에게는 아직 가슴을 뛰게 하는 한 문장이 떠오르지 않는 것이다. 아니, 없는 것다.

정우와 정은의 말에 아린도 공감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열하고 무심히 배열하다 보면 분명 완벽하진 않지만 꽤 괜찮은 프롤로그가 완성될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무심한 배열을 할 만한 작은 소스조차 없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꼭 글쓰기 강사처럼 아린을 위해 여러 가지 조언을 해주는 두 사람에게는 고마운 마음이었지만 아린은 자기 스스로 돌파구를 찾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민준이 인풋에 대한 이야기를 던졌다. 

“떠오르지 않을 땐 인풋을 해보는 것도 좋아요.”

인풋이란 웹소설 작가들이 흔히 쓰는 말로 자신의 글을 잘 쓰기 위해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는 것을 뜻한다. 보통 웹소설 작가들도 하루에 몇 편을 보며 인풋을 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예전에 정은에게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아린은 글에 대한 구상을 하는 동안, 일본을 다녀오는 동안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맞아 언니. 책을 좀 읽어 보는 건 어때요? 아직 급한 글이 아니라면.”

급한 글은 아니다. 세 사람처럼 매일 시간에 맞춰 연재를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사실, 아린에게 남아도는 게 시간이었다. 그런데 아린은 인풋도 딱히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의 글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이 과연 자신의 창작물일까. 보통 작가들도 많은 책을 읽지만 이번에는 새하얀 도화지에 첫 그림을 그리듯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다. 

아린은 고구마 한 트럭을 먹은 듯 가슴이 답답했다. 이것도 싫고, 저것도 싫고. 

“조금 더 생각해 볼게요. 고마워요 다들. 괜히 저 때문에…”

“별말씀을. 서로 돕는 거죠. 저도 답답할 때는 여쭤볼 건데요. 너무 마음 쓰지 마요.”

“감사합니다. 저 잠시 샌드위치 가게에 내려갔다 올게요. 혹시 올 때 뭐 사 올까요?”

아린은 잠시 바람이라도 쐴 생각이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아린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움직일 때마다 따라나서던 정우도 이번엔 일어나지 않았다. 올 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부탁한다는 말만 전했다. 

아린은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오래 있다 올게 아니니 충전기와 마우스는 필요 없었다. 

저들의 흥에 맞춰 함께 키보드가 움직여 주면 얼마나 좋을까. 아린은 그들에게 자신은 불협화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샌드위치 가게로 온 아린은 따뜻한 유자차 한 잔을 주문했다. 하울은 보이지 않았고 예전에 한 번 보았던 그의 언니가 카운터를 대신 보고 있었다. 

“글이 잘 안 풀리시나 봐요. “

아린의 표정이 어두운 걸 눈치챈 그의 언니가 말을 걸어왔다. 

“네. 잠시 머리 좀 식히려고요. 하울 님은 어디 가셨어요?”

아린은 자리에 가서 앉지 않고 그녀가 음료를 만드는 동안 카운터 앞에 서 있었다. 

“며칠 집필 여행을 간다나 뭐라나. 3일 정도 가게 좀 봐달라고 했어요. 작가님 앞에서 이런 말 하기 참 그렇지만 글 쓰는 사람들 예민하고 유별난 거 같아요. 특히 하울은 더 해요. 이렇게 갑자기 가게 비우고 가버리니. 제가 오니까 아무도 없는 거 있죠. “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가게이 있던 하울은 문을 닫지도 않고 언니만을 불러놓고 그대로 떠나버렸다. 예민하고 유별나다는 말에 기분이 나쁘기보다는 아린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조금 전엔 계셨는데. 저도 도통 생각이 안 나서 내려왔거든요. 혹시나 여기 있으면 뭐라도 생각날까 해서.”

“잘하셨어요. 따뜻한 차 마시면서 마음도 가라앉히고. 얼굴 보니까 꽤 고민을 많이 한 것 같아요. 우리 하울이 딱 아가씨 같은 표정이었거든요.”

“아린이에요.”

아린은 얼굴을 살짝 내밀고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네 아린 씨. 아린 씨 보면 젊을 때 하울의 모습과 비슷해 보여요. 얼굴에 초조함과 근심, 고민, 때로는 행복. 모든 게 다 들어있거든요. 하울은 하도 예민해서 위장병도 달고 살았어요. 위경련으로 몇 번이나 병원에 실려가고. 그래서 글 쓰지 말라고 한 번은 제가 노트북이고 뭐고 다 숨겨 버린 적도 있었어요.”

“정말요?”

하울의 언니 이야기는 재미있었다. 늘 대단해 보이고 여유 있어 보이던 하울 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럼요. 그 후로 글이 풀리지 않을 땐 여행을 가요. 여행이라고 하기보다는 뭐 가까운 근교라도 잠시 떠나요.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떨어진 곳으로. 예전엔 한 달 넘게 돌아오지 않았을 때도 있고요. 그나마 연락이라도 돼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찾아 나섰을 거예요.”

유자차를 쟁반에 놓아둔 하울의 언니는 더 긴 이야기가 있는지 아린을 카운터 옆 테이블로 안내했다. 손님이 오면 바로 움직일 수 있게. 그 자리는 늘 하울이 글을 쓰던 자리었다. 아린은 늘 앉던 창가자리를 포기하고 하울의 언니가 안내한 곳에 앉았다.

하울의 언니는 자신의 음료도 한 잔 들고는 아린의 앞에 자리 잡았다. 

“그러고 며칠 지나서 돌아오면 얼굴이 싱글벙글해서 돌아와요. 막혔던 곳이 뚫렸다나. 아 제 이름은 하정이에요. 아린 씨도 글이 풀리지 않으면 여행을 가보지 그래요?"

아린은 하정에게 한 달 전 일본에 다녀온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곳에서 느꼈던 감정, 그곳의 향기, 그곳에서의 모든 이야기들이 막힘없이 술술 흘러나왔다. 분명 키보드에 손을 올렸을 때는 섬세한 감정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몇 마디 해보지 않은 하울의 언니 하정에게는 이상하게도 모든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어때요?”

하정은 이야기를 하다 잠시 멈춘 아린에게 말했다. 

“네?”

갑자기 어떠냐고 물어보니 아린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하울이 아린 씨처럼 이랬어요. 여행을 다녀오면 그곳의 모든 것들을 내게 말했죠. 아주 편안하게요. 그러다 방에 들어가 연신 키보드를 두드렸어요. 아린 씨 하울이랑 참 비슷한 면이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전에도 느꼈지만 말이에요. 아린 씨 이야기. 참 재미있어요. 꼭 그곳에 있는 것처럼. 글도 그렇게 써요. 스트레스받지 말고.”

그때 가게 문이 열리고 한 무리의 손님들이 들어왔다. 하정은 그럼 실례,라고 말한 뒤 카운터로 돌아갔다. 아린은 하정에게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괜찮다, 잘하고 있다는 말보다 더 위안이 되었다. 

아린은 노트북을 열었다. 그리고 다시 하정과 음료를 기다리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아린은 키보드에 손을 올리고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이곳, 샌드위치 가게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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