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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세인 Sep 28. 2024

가속노화 방지법


그녀의 아침은 태블릿을 켜면서 시작된다.

거실로 나오면 창가에 기다란 테이블이 있고, 작은 화분에 몸담은 연둣빛 잎들이 햇살을 쬐고 있다. 따뜻한 물 한잔을 가져와 앉는다. 테이블에 놓인 태블릿 전원을 켜고, 아이콘을 누른다. 로그인을 하면 귀여운 아바타가 반긴다. 교재를 클릭한다. 

     

Does she stay up late?     


클릭해서 먼저 발음을 들어보고 따라 해 본다. 어제 배운 내용을 기억하면서 빈칸에 알맞은 대답을 고른다. 학교 다닐 때는 어렵기만 했던 공부가 지금은 새롭고 재밌기만 하다.  


15분 정도 영어공부를 하고 나면 현관문으로 나가 본다.

신문 배달은 하루도 빠지는 법이 없다. 오늘 새벽에도 누군가 부지런히 신문을 배달했을 테다. 돋보기안경을 꺼낸다. 남편이 매일 챙겨보던 종이신문을 혼자된 지금도 습관처럼 펼친다. 가끔 아들 딸과 공유하고 싶은 칼럼을 발견하면 사진을 찍어 저장해 놓는다. 


손으로 직접 종이를 만지고 밑줄 긋는 촉감은 핸드폰으로 넘기는 스크롤과 다르다. 내 생각과의 호흡을 적절히 조절할 수 있다. 치매 예방에도 좋으리라.


띵. 

시간을 맞추어 놓은 에어프라이어 소리가 울린다. 작게 썰어 넣은 감자와 고구마에서 김이 모락모락 난다. 감자와 고구마, 우유 한 컵은 그녀에게 최고의 아침 식사 궁합이다. 야채샐러드에 두부와 올리브 오일을 곁들여 먹기도 한다. 레몬즙도 뿌려준다. 작은 냄비에 보글보글 다 끓은 계란 2개는 찬물에 담가 놓는다. 파프리카와 오이를 썰어 계란과 함께 도시락에 담는다. 


이제 나갈 시간이다.  

큰 가방 두 개를 챙겨 서둘러 나간다. 자칫 늦으면 헬스장 요가 수업에 자리가 없을지도 모른다. 30년간 친구 삼아 해온 에어로빅은 가볍게 온몸을 움직여주는 정도로 하고, 30분 정도는 근력 운동을 한다. 운동이 끝나면 바로 도시락에 담아 온 계란을 먹는다. 운동 직후에 수분과 단백질을 챙기는 건 몇 년째 해온 일이다. 그래야 운동 후에 허겁지겁 아무 음식이나 먹는 일을 피할 수 있다. 


헬스장과 연결된 목욕탕으로 향한다. 온탕과 냉탕은 그녀에겐 한의사가 놓아주는 침이나 다름없다. 냉온욕을 하면 근육들이 제자리를 찾아 이완하기 시작한다.


가까이 사는 딸이 약속이 없는 날이면 딸 집에 가서 점심을 함께 한다. 찌개나 많은 반찬을 갖추지 않아도 두 여자의 점심은 간단히 해결된다. 장조림이나 멸치를 꺼내고, 상추와 된장을 곁들이면 된다. 점심 한 끼는 든든히 잡곡밥 두 그릇을 먹어둔다. 이제 몇 시간은 허기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내일 학습지 선생님이 방문하는 날이다. 종이교재를 챙겨 도서관에 가야겠다. 도서관에서는 적절한 조명 덕인지 돋보기안경을 끼지 않아도 글씨가 잘 보인다. 책을 보다 졸리면 깜빡 졸기도 한다. 성경도 필사해서 성당모임 카톡에 올려야 한다. 오랜 친구에게서 전화가 오면 다시 전화하겠다고 문자를 보낸다. 한 번 통화하면 한 시간으론 부족할 테니 말이다. 


해가 질 즈음이면 가방을 챙겨 가야 할 곳이 있다. 2년 전부터 태권도를 배우기 시작했다. 어색하기만 했던 도복을 입고 다니는 것도 어느 정도 적응되었다. 어제 배운 동작을 잊지 않으려면 일찍 가서 연습해야 한다. 도장에 유일한 할머니라 아이들 사이에 있으려면 화장하는 예의도 필수다. 바나나와 두유를 챙겨 도장으로 향한다. 품새를 기억하며 뇌를 쓰고, 발차기를 하며 고관절을 쓰고 오면 푹 잘 수 있다. 




주말이면 혼자 산을 찾는다.

비가 와도 산속에 들어가 걷다 보면 멈추기 마련이고, 눈이 오면 나뭇가지에 소복이 앉는 눈송이를 보기에 더없이 좋은 날이다. 오랜 세월 산에 다니며 쌓은 경험상 그렇다. 친구와 함께 가면 말동무가 있겠지만 혼자 걷는 리듬도 괜찮다. 쫑알쫑알거리는 손주들이 함께 가는 날도 있지만 클수록 산보다는 친구들이 좋을 테다. 저들 자체가 봄이니 할미처럼 봄이 좋을 리 없다. 


헬스장에서 채우지 못하는 충만함이 산에 있다. 새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 두꺼운 나무의 나이테를 느끼며 거니는 산길은 다른 곳에서 얻기 어려운 에너지를 뿜어낸다. 겨울 내내 추위를 이기고 피어내는 야생화들은 늘 감탄의 대상이다. 걸어가다 모르는 꽃이 보이면 친구가 알려준 네이버 렌즈를 켜 본다. 이름을 모른 들 무슨 상관이랴. 그저 피느라 애썼다고 토닥토닥해주면 그만이다.      


비싼데도 다른데 아껴 쓰겠다고 몇 달 전, 태블릿을 구매했다. 지난주에 학습지 선생님이 수학 과목을 추천하며 풀어준 문제가 자꾸 떠오른다. 또 다른 문제는 어떤 개념으로 풀어내는지 궁금해진다. 선생님에게 생각해 본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등록해야지 싶다. 손주들은 학습지가 두 과목이면 밀리기 십상이라고 말리지만 그녀는 배운다는 사실이 설레기만 하다.      


아이스아메리카노와 디저트의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는 내 옆에서 그녀는 생강차를 마신다. 내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를 때 이따 만나자며 계단을 타고 올라간다. 부와 명예를 쌓을 여력은 없었지만 근력을 쌓는 일만은 게을리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허리와 어깨 통증이 있다고 할 때, 골다공증 약을 먹는다고 할 때 그녀는 꿋꿋이 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다. 


에어로빅 수업에 가서 기압을 넣고 나이트클럽처럼 음악이 크게 울리면 힘든 일도 별거 아니라고 압축해 버릴 수 있었다. 근육 운동을 하면 마음도 함께 탄력을 받았다. 니체의 책을 읽지는 못했으나 하루하루 몸을 움직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삶을 긍정할 수 있었다.      




그녀는 60대 초반, 젊은 할머니다. 

그녀의 작은 바람은 공휴일에도 도서관이 열었으면 하는 것이다. 핸드폰을 활용하는 시니어를 위한 강의도 도서관에 생겼으면 좋겠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지금 움직여야 한다고 말한다. 내 몸을 자기 의지로 움직일 수 있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을지 모르니. 설레는 일이 있어 그리고 도전할 수 있어 감사하다고 한다.       

나는 한 여인을 바라보며 천천히 늙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그녀가 나의 엄마라는 사실이 축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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