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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쎄 Jun 14. 2022

2 YURI : 의심하되 믿겠다는 마음

2022.05.04. @뚝섬역


시그니처 아이템의 의미 ─
아주 사적인 편지』(프로젝트리좀)
소중하게 생각하는 3명의 친구와 같이 만든 작업물을 최근에 엮어서 꼽았어요. 프로젝트명인 ‘프로젝트 리좀’은 철학자 들레즈와 가타리의 책 『천 개의 고원』에서 뿌리 식물 같은 관계망을 ‘리좀적’이라고 표현한 데 착안했어요. 우리는 관계망을 조금씩 넓혀가면서 얇고 오래 가자는 의도죠. 팀원들이 참여해 편지를 쓰고 투고도 받아 진행한 편지 프로젝트는, 수신인과 발신인이 익명이었어요. 어떤 편지는 제가 쓴 게 아닌데 저와 정서가 똑같은 것도 있었어요. 참 신기했죠. 누군지 알면 너무 운명적일까 봐,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알려고 하지 않았어요(웃음). 그런 사람이 세상에 있다고 느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했거든요.



의심에는 오만 가지 조건이 붙지만, 믿음에는 조건이 없다. 그렇기에 의심은 쉽고 믿음은 어려운 길일지도. 의심으로 얻는 게 손해 보지 않는 거라면, 믿어서 얻는 건 뭘까?


유리 님은 자신을 운명론자라고 설명한다. 99%가 우연이거나 이미 벌어져 버렸기 때문에 필연일 수밖에 없다고, 그게 운명이라고. 운명론적으로 내 앞에 어떤 길이 있고, 나는 그저 눈을 가린 채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경험해낼 수밖에 없는 수행자라는 설명에서는 골똘해진다. 이미 정해져 있을 때 우리가 취할 방법은 두 가지겠다. 순응하거나, 거부하거나.


두 가지는 순도 면에서 100%이기 때문에 다른 길은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그때 그가 이 말을 덧붙인다. 조금 다른 지점이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받아들이기만 하는 게 아니에요. 끝과 끝은 맞는다고, 적극적으로 수동적이 된다고 할까요? 운명에 적극적으로 수동적인 태도라니, 그의 믿음을 조금 더 들어보고 싶어졌다.





무소속으로 지낸 기간과 더불어 본인 소개 간단하게 부탁드려요.

드문드문 학교 다닌 걸 제외하고는 다 무소속이었어요. 그렇게 꼽자면 거의 7년 정도는 무소속으로 지냈네요. 저는 호기심이 엄청 많고 궁금한 것을 못 찾아서 새로운 것을 늘 탐험하고자 해요. 그런데 최근에는 피로감을 짙게 느껴요.


무소속으로 지내는 동안 어떤 루틴으로 생활하세요?

규칙적으로 생활해요. 일이 없더라도 주 3일 운동을 하고요, 운동하는 날 기준으로 하면 오전 8시쯤 일어나서 10분 정도 전화 영어를 해요. 그게 일종의 강제 모닝콜 같은 느낌이에요(웃음). 어영부영 대화를 끝내면 헬스장에 가서 1시간 정도 운동을 하고 밥 먹은 뒤 일을 시작하죠. 일이 있으면 일하고 아니면 공부해요. 점심 먹고 또 일하거나 공부하고, 저녁 먹고 또 일하거나 공부하고… 최근에는 전기기능사 공부를 하고 있어서 주중 저녁 7~10시에 수업을 듣고 나면 일과가 마무리되곤 해요.

이런 생활에 강박이 있는 것 같아요. 한국인스럽게 야간자율학습을 생각하는 거죠. ‘10시까지는 일해야 한다.’ 그래서 너무 피곤한데 쉬는 법을 모르겠어요. 휴식도 일처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서, 영화를 보려 해도 알아보는 데 시간이 한참 걸려요. MBTI가 J라 더 그래요. 아, 3~4시쯤 일과 중간에 낮잠을 자긴 해요. 아무래도 일찍 일어났으니까 피곤하거든요.


낮잠까지 안 자면 기계처럼 느낄 뻔했어요(웃음). 프리랜서로 하시는 일은 어떤 분야예요?

아직 한 분야를 정하지 않았어요. 미대를 졸업하고 일러스트레이터와 어시스턴트로 일해왔어요. 미술 작가님들 어시 일이라면, 재료 사 오고 리서치하고 모델링하는 등이죠. 이외에는 개인 프로젝트로 팟캐스트를 만든다거나 독립출판물을 제작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는 영상 프리랜서로 일했는데 최근엔 프리랜서의 삶이 힘들고 지쳐서 다른 지속가능한 삶의 방식이 없는지 생각해보고 있어요.



독립출판물 같이 제작한 팀원분들이 동네 친구이기도 하다고요.

하고 싶은 일을 같이할 사람들이 생겨서 동력이 더 생겼다고 느껴요. 2년 전에 우연한 계기로 만났어요. 제가 사는 지역에 청년 센터가 생기면서 청년 지원 사업으로는 첫 공고가 떴던 때예요. 팟캐스트, 독립출판물을 제작해보고 싶어서 기획은 해뒀는데 막상 혼자 할 엄두는 안 났어요. 지원 자격에 최소 3명이라는 기준이 있기도 했고요. 그래서 지역 여성 커뮤니티에서 운을 뗐더니 적극적으로 하겠다고 한 3명과 만났고, 거의 일주일 만에 기획서 제출하고 지금까지 쭉 이어가고 있죠. 분노하는 지점과 웃음 포인트가 같아 팟캐스트 녹음 때마다 즐거워요. 비슷한 면도 있지만 각자 다른 강점들이 있어서 곁에서 자극도 많이 받고 엄청 많이 배우곤 해요.


같은 지역에 그런 친구가 있다는 감각은 소중하죠.

새로운 감각이더라고요. 저는 토박이인데 학창 시절부터 알아 온 친구들은 대부분 다른 지역으로 떠났어요. 학창 시절에는 생존을 위해 친해져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 크면서는 거의 연락하지 않는 상황이기도 했고요. 코로나19가 터지면서 지역 간 이동이 어려워지자 너무 외로워서 사는 지역에서 동네 친구를 만들어야겠다는 마음이 커졌어요.

동네에서 친해지고 싶은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건 낯설더라고요. 운 좋게 이 친구들을 만나면서 관계에 관해 많이 배우고, 많이 의지하는 동안 크게는 사랑을 배웠어요. 나 자신을 긍정할 수 있었죠. 다양한 성향의 친구들이라 보고 있자면 오래 함께하기 위해 내가 더 성장하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져요. 매해 지원사업을 준비하는데, 올해도 사는 지역을 중심으로 프로젝트 해볼 예정이에요. 팟캐스트나 독립출판물 작업도 꾸준히 하고요. 그중 하나는 장롱 면허를 탈출해 지역 내를 여행하는 기획인데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요.


다음 주에 결과가 나오는 거죠? 잘 되면 좋겠어요(웃음).





전기기능사 공부는 어떻게 시작하셨어요?

대학 전공이 융합예술과라 개념 미술을 배웠는데 개념 자체로는 전시할 수 있는 게 없었어요. 이전엔 영상을 기반으로 작업해왔는데, 물성이 있는 것을 다루는 법은 잘 몰랐거든요. 요즘은 메타버스 등 가상의 무언가를 제작하는 분위기지만, 저는 물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 보고 싶어요.

1학년 2학기 때 한 수업에서 작업 개념구조가 잡히지 않았다며, 학기를 마칠 때까지 한 명도 작업을 제작하지 못한 적이 있어요. 그때 입시 면접의 트라우마가 다시 떠오르더라고요. 들을 생각이 없는 누군가를 설득해야만 하는 상황이요. 작업과 저를 동일시해서 상처받은 부분이 클 거예요. 반면 프로그래밍이나 미디어아트 작업은 상대적으로 지적을 덜 받더라고요(웃음). ‘이거다, 내 메시지, 내 작업을 보호할 방법을 찾았다’ 싶었죠. 졸업 작품의 형식을 VR 게임으로 선택했고 다행히 제가 하고 싶은 얘기와도 일치하는 지점이 있었어요. 가르쳐주지 않는 분야라 따로 과외 선생님을 구하면서까지 완성했죠.


저한테는 생소한 분야라서 신기하게 듣고 있어요.

새로운 걸 좋아하다 보니까 경험이 다방면으로 뻗쳐있는데 졸업 전에 물성을 가진 재료를 사용해보고 싶어서 모델링 수업을 들었어요. 알루미늄이나 철을 가공해서 결과물을 제작하는 방식이었죠. 졸업 후엔 생계와 작업의 균형을 만들어가야 하는 순간을 맞닥뜨려서 고민한 결과, 개발이 단번에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았어요. 그렇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안 잡히던 차에 어떤 분과 잠깐 일하면서 방향성을 잡게 됐어요. 마침 전기‧전자 분야, 임베디드 회로 설계와 프로그래밍을 다 하시는 분이었거든요. 졸작 때 기술을 안다는 게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흔쾌히 가르쳐주신다는 운을 잡아서 배우기 시작했어요. 전기기능사로만 보면 친구가 자격증을 따려고 하는데 같이 하자는 제안 때문이었지만요(웃음).

선생님이 40대 초반의 여성분이에요. 그 정도 나이를 입에 올리면 관념적으로 나이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저랑 비교해보면 별로 차이가 안 나요. 10살 정도. 지금 다니는 학원이 좋은 건 행정 업무 보시는 분들이 다 여성분이어서 ‘여자들은 특혜를 줘야지’ 하면서 따로 챙겨주시는 게 있어요. 워낙 전기‧전자 분야는 남초니까요. 가끔 선생님이 “여자분들은 배관작업 때 힘이 많이 들어서 배선을 더 빨리하셔야 돼요. 그래야 나중에 배관 작업할 때 더 시간을 벌 수가 있어요”라고 얘기할 때도 그 맥락을 여성혐오가 아닌 업무 팁으로 납득하게 되죠. 실제로 배관 초기에는 몸이 너무 힘들더라고요.


현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팁이라니 얼마나 귀해요. 새로운 데 관심이 많다고요. 앞서 어떤 것들에 관심을 두셨는지도 궁금해져요.

15살 때 춤을 시작했어요. 동네에 있는 방송 댄스 학원에 다니면서, 학원 언니들에게 스카우트를 받아 고등학교 축제에 공연하러 다녔어요. 그해 말에 스트릿댄스 중 하우스를 시작하게 됐고요. 18살, 고2 때까지는 춤을 계속 췄고, 대학도 실용무용과로 진학하려 했어요. 선생님들, 언니 오빠들에게 많이 물어보고 다녔는데, 다들 춤 말고 다른 전공을 추천했어요. 춤은 언제든 다시 출 수 있다고요. 당시 제 주변 어른들이 춤만으로 잘사는 모습을 보지 못해서 겁나기도 했고, 실용무용과에 다니는 언니들이 겪는 군대문화 같은 것들을 견디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3부터는 진로를 영상제작자로 바꿨어요. 2008년 전후로 LA에 무브먼트 라이프스타일(Movement Lifestyle)이라고, 필리핀계 미국 안무가 숀 에바리스토(Shaun Evaristo)를 주축으로 댄스필름이 제작되어 유튜브에 업로드되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댄스 필름을 만드는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막연히 이 댄스 신에 머무를 수 있고, 춤도 출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죠. 20살에 방송국에서 일하게 되면서 춤보다는 영상으로 삶의 축이 바뀌었어요. 춤 영상을 찍어보긴 했지만 제가 봐왔던 아름다운 영상을 찍으려면 조명, 렌즈, 색 보정 등 배울 게 정말 많더라고요. 지식을 인터넷에서 조각조각 찾기보다 학교에서 제대로 배우고 싶어서 22살에 미대 입시를 결심했어요.

그림을 좋아하지 않던 제가 그림을 그릴 줄 정말 몰랐어요. 어머니가 유치원 미술 선생님이라, 주변 어른들은 제가 그림을 그리기도 전에 “엄마가 미술 선생님인데 유리는 얼마나 잘 그리려나” 하는 말을 쉽게 뱉었고, 기대감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압박에 나중에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어요. 그런데도 입시를 시작하고 2년간은 친구도 안 만나고 오로지 그림만 그렸어요. 저보다 먼저 미대 입시를 준비한 친구들을 단기간에 따라잡아야 한다는 부담이 컸어요. 난생처음으로 하나에만 몰두해봤고, 결과로만 따지면 가고 싶은 학교에 가지 못했어요. 이후 진학한 미대에서는 학교가 울타리가 되어 큰 고민 없이, 4년 만에 졸업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전공에만 집중하며 지냈어요. 졸업하면서부터 저 자신을 경제적으로 책임지기 시작했죠. 아직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으니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골몰하고 있어요. 그런 스트레스 때문에 새로운 감각을 좇는 취미 부자가 된 것 같기도 하고요.



지금까지 무언가를 선택하고 해본 변천을 조금 펼쳐주셨잖아요. 춤에서 영상으로, 그림에서 전기‧전자로 왔다는 게 놀랍네요. 분야를 가리지 않고 관심이 뻗어 있어서가 아닌가 싶어요. 거기에 약간의 저돌적인 자세와 무모함도 없지 않아 있는 것 같고요.

전기기능사를 얘기하면서 먼 과거로 가게 됐는데 사실 뭔가 시도할 때 깊이 생각하는 편은 아니에요. 맥락은 비슷하다고 생각하거든요. 시각 분야는 제게 움직임의 ‘재미있음’으로 다 통해요. 내 몸을 움직여서 낯선 감각을 익히는 걸 좋아하고요. 다방면에 흥미를 두고 알아보는 시기를 지나니까 이제는 땅을 치면서 후회하게 될 때도 있더라고요. 예를 들어 한 분야를 팠어야 했는데, 하는 부분들. 그런 성향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제 또래를 만났을 때 경력이 몇 년 이상이다, 사회의 보편적인 루트를 걸어온 사람들을 만났을 때 직함이 뭐다, 하는 걸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어요. 경제적인 부분을 무시할 수 없는 나이가 돼서 그 부분이 유독 크게 다가오는 듯해요. 연차가 쌓인다고 연봉이 올라가는 게 아니잖아요. 투쟁처럼 내 가치를 증명해내고 돈을 올리는 과정들이 있다 보니까 ‘앞으로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 싶어요. 한편으로는 이제는 한 분야에서 전문성을 쌓아보고 싶기도 하고요. 아직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이니까.


내 삶에 떳떳하되 사람들에게 설명할 말이 부족할 뿐이지 않을까요?

구직한다고 가정했을 때 채용 담당자는 제 인생으로 자기를 설득해주길 바라잖아요. 납득시켜야만 자리를 차지할 수 있고요. 그럴 때마다 ‘보통의 사람들’과 굉장히 다른 길을 걸어왔다는 감각이 싫었어요. 타인에게 설득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살아온 길에서 열심히 살지 않았던가 하는 의심이요.

앞서 말한 입시 경험이 큰 상처로 남은 영향도 있어요. 노력해도 얻어지지 않는 게 있다는 걸 처음 알았거든요. 1 대 다수로 진행되는 최종면접 인터뷰를 대기하는 동안 같은 입장에 선 학생이 그림을 너무 잘 그려서 기억한다고 말해줘서 기분이 좋았어요. 하지만 면접관에게는 그림을 외워서 그렸다는 말을 들었죠. 지원서를 보고도 “넌 정말로 영상 하고 싶지 않은 것 같은데? 진학해도 다른 과로 갈 것 같은데?”라며 저를 간보다 못해 깎아내리더라고요. 영상도 종합예술이라 영상디자인부터 여러 요소가 필요해서 그걸 배우러 다녔다는 열정을 어필했을 뿐인데, 면접관들은 다르게 받아들였어요. 그들은 권위자잖아요. 지금이야 빠르게 욕해주겠지만 그때는 상실감이 컸어요. 그 후로 1년 동안 방황했죠. 내가 진짜로 영상을 전공하고 싶은 게 아니었나, 의심하고 자문하면서요. 지금 그 학과에서 제가 하고 싶다고 했던 다원적인 작업을 하는 걸 보면 씁쓸하고, 타이밍과 운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돼요.




유리 님의 사전 답변을 보면서 줏대 있게 잘 사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근데도 본인을 설명하고 싶어 하신다는 게 의아했어요.

실패 경험이 크게 작용한 것 같아요. 한국 사람이면 98%가 입시 실패를 겪겠죠. 자기가 원하는 대학에 절대 갈 수 없으니까. 저는 재수로 내가 정말 원하는 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을 건데, 모든 걸 배팅했거든요. 인간관계고 뭐고 다 버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영어 공부하고 12시간 동안 그림만 그렸어요. 2년 내내. 그전까지는 가족이 저를 못 믿는 구석이 있었어요. 조금 하다가 그만두고, 조금 하다가 그만두는 걸 자주 봐왔으니까요. 서서히 가족들이 저를 믿어줬어요. 그 순간엔 더디게 는 것처럼 보였음에도 그림 실력이 빨리 늘었죠.

순간순간 좋아하는 것을 선택하고 경험해온 궤적이 영상에서 미술로, 또 전기‧전자로 옮겨 다니는 꼴이니까 ‘그들이 얘기하는 대로 내가 그런가?’ 하는 의심이 드는 거예요. 자꾸 제 가치를 확인하게 돼요. 생각 없이 살지 않았는데도 그런 순간들이 깊게 남아있어서 묻지 않았으나 계속 얘기하고 싶어 하는지도 모르겠어요.


활동해오신 궤적을 보면 낯설고 단순하지도 않지만 관통하는 지점이 분명히 있는데요. 몸으로 뭔가를 배워가는 감각을 중요시하고 그걸 재밌어하는 게 표현하는 일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영상으로나 그림, 미디어아트 쪽도 마찬가지로 누군가를 자꾸 만나고 싶어 한다고 느껴요. 내 표현을 봐줄 사람.

말씀하시니 영상을 처음 만들었을 때가 떠올라요. 첫 영상을 기획하고, 찍고, 편집하고, 사람들에게 보여줬던 그 과정들이 정말 또렷해요. 제가 말을 잘 못 하는데, 영상은 충분한 시간을 갖고 원하는 바를 정제하고 정제해서 또렷이 말할 수 있잖아요. 말하고 싶은 걸 20분 내내 영상으로 떠들고 났더니 그걸 본 사람들이 제 얘기를 통해 본인 얘기를 해주는 게 좋았어요. 그 감각이 남아서 영상이 아니더라도 계속 뭔가를 만들고, 공유하고 싶게 만드나 봐요.

그러면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좋을지 감이 안 잡히니, 답답함에 몇 살부터 10살 터울의 언니들을 만나봤어요. 쉽지 않대요, 사는 게 너무너무 힘들다고요. 누구 하나라도 잘살고 있어야 희망을 품고 해볼 텐데, 딱 봐도 반복되는 굴레에 소모품이 되고 싶지 않은 생각이 커요. 아직 타협지점을 못 찾고 있죠.


유리 님이 새로운 길을 만드는 경우도 있겠죠.

쉽지 않아요. 제가 경제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게 아니고, 계속 선택받아야 하는 위치에 놓이기 때문에. 일하면서 작업을 해야 하는데 그 밸런스를 맞추기가 어려워요. 자꾸 ‘내가 뭘 하려고 했더라’ 하면서 길을 잃고요. 작업하면서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거나 이 길을 벗어나 돈을 잘 벌면 다행이지만요. 지금 산업 구조에서는 소수를 제외하곤 미술이 직업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좋아하는 작가님이 하신 이야기가 생각나요.

“평균의 사람들을 위해서 제공된 물건이나 시설은 사실은 어느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니다. 산업은 개개인이 가진 고유한 조건에 관심이 없는 너무나 뻔뻔스럽고, 당당한 합의체이다. 그래서 산업사회에서 구성원 각자가 느끼는 ‘(나랑) 잘 맞지 않음’은 이례적이거나 개인적인 게 아니다. 그 결과로 삶에 모든 곳에 박힌 소외와 결핍은 우리가 이미 잘 아는 것인데, 여기에 처한 개인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윤을 추구하는 ‘정상’적인 생산방식에서 벗어나 작가 고유의 작업방식을 시도하는 그 순간부터 작가는 타자가 되고, 그게 자기의 현실이 된다. 아트워크는 이유가 없이 산업의 논리에서 벗어난 탄생과 유통의 방식을 가지고 있기에 시스템에서 시스템 밖으로 유배되어 현실 속에서 발전할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기약도 없이 유예가 되는 하나의 직업군이다.”



독립출판을 보면 어떤 반발이랄까, 다른 길을 모색하려는 사람들이 몰리기 때문에 매력적이기도, 기회가 있다고도 싶어요. 나의 독특함을 마음껏 뽐내도 되는 영역이 있다는 걸 아는 순간 시야가 달라지잖아요. 유리 님이 팟캐스트를 통해 말하는 자아가, 책을 통해 글 쓰는 자아가 나오듯, 생산자인 동시에 소비자로서 이야기를 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해요.

저희 팟캐스트도 비슷한 맥락이에요. 커뮤니티 주최로 강연을 열면 그들만의 리그 같은 분위기, 소비자와 생산자가 확연히 나뉘는 느낌이 싫더라고요. 주변 친구들 얘기를 듣자, 친구의 친구를 소개하면서 세력을 조금씩 넓혀나가자는 모토로 시작한 게 팟캐스트예요. 유명하다거나 파급력이 큰 사람이라고 해서 그 이야기가 제게 의미 있지는 않았거든요. 차라리 저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기 투쟁하고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힌트를 얻는 편이라서요.


앞으로 유리 님이 어떤 일을 하고 계실지 모르죠.

저는 제 친구들이나 가족들을 위한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 전에 저 자신을 위한 작업을 가장 하고 싶네요. 제 그림은 회화가 아니고 일러스트레이션에 가까워요. 회화, 일러스트레이션 하면 파인아트와 상업으로 구획이 생겨버리는 느낌이 들잖아요. 고급 미술과 저급 미술을 구분하며 배웠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시각 이미지들을 위계화하는지 너무 잘 알죠. 그게 내재화된 면에 더해 그림을 좋아하면서도 자기혐오가 어느 정도 있어요. 내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가족들도 내 그림을 좋아하는데, 누군가에게 보여줄 때는 ‘진짜’ 그림이 아닌 것만 같아서 부끄럽기도 해요. 이 마음을 해결해가는 게 올해 제 숙제예요. 최근엔 2주에 한 번씩 그림 작업을 올리는데 작업기간이 더 줄어들면 완성도가 점점 떨어지는 편이라 단기간에 다작하시는 분들 보면 대단하다 싶어요.

그리 보면 미술 작업은 자아가 세야 하는 작업 같기도 해요. 제가 하고 싶은 주제로는 ‘이거로는 작업이 될 수 없지 않니?’ 하는 내면화된 교수의 말이 따라오곤 해요. 미술관에 가지 않게 된 이유도 나랑 비슷한 사람이 없으니 재미가 없어서고요. 유명 작가들이 개념적인 얘기하는 모습이 더 이상 제게 울림을 주지 않아요. 보통 미술이 어렵다고 할 때 대다수는 번역어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계층화된 언어 때문인 게 커요. 충분한 시간을 들여야만 이해할 수 있는 작업이라면 누구를 위한 예술이겠어요? 시간을 들여 이해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들도 있겠지만, 같은 계층의 목소리만 울려 퍼지는 에코 챔버가 아닌가 싶기도 해요. 언어화되지 않는 미술 자체로 좋은 것들이 있는데 언어나 기호만을 과도하게 사용하는 작업을 볼 때 피로감을 느껴요.


그럴 때 가장 필요한 건 나의 열성 팬 아닐까요? 아까 가족이 팬이라고 하셔서 복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족이 내 그림을 좋아하는 일은 흔치 않잖아요.

정말이에요. 제가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던 건 부모님이 단 한 번도 안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아서예요. 난생처음 제 비전에 관해 부모님과 상의하면서 뭔갈 해보고 싶다고 얘기한 게 입시였고, 이후로 제가 뭘 하든 지지해주세요. 너무나 감사한 한편 모든 책임이 저한테 있다는 게 무겁기도 해요. 괜히 막 부모님 탓하고 싶은데 탓할 사람이 없으니까요(웃음).

한번은 예술인복지재단에서 기관과 예술인 매칭 지원 사업을 신청했는데 면접관 중 하나가 제게 그러더라고요. “작가적이지 않네요.” 그게 첫 지원이고 어떤 게 해당할지 몰라서 할 수 있는 영역을 죄다 적었더니 그런 말을 들었어요. 직무적이라는 말을 한 귀로 흘리기 힘들었어요. 졸업하고 나서는 그들이 말하는 ‘메시지가 담긴 작업’은 안 해서 더더욱 그렇죠. 현실적으로 작업할 시간이 없었던 면도 있고요. 그렇다면 작업도 못 하고 일 경력도 없으면 나는 내 정체성을 뭐로 가져가야 하는지 고민이 들죠. 그런 혼란 속에 있을 때 친구들은 저를 다 잘하는 사람이라고, 올라운더라고 불러줘요. 올라운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요?





바로 작품화시킬 수 있는 내 능력에는 뭐가 있을까요?

도구로 삼을 능력은 많죠. 스스로 다능인이라고 여기는 이유는, 일러스트레이터, 편집디자인, 영상 제작, 문화기획, 팟캐스트를 진행한 경험이 있고 전기‧전자 공부와 게임 제작을 위해 프로그래밍을 공부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전 세계 지도로 요트 게임을 만들어서 친구와 함께 여행 다니며 살아보는 게 목표고요. 그래서 요트 자격증도 있어요. 유럽 사진 보면 바다에 요트가 띄워져 있잖아요. 유럽에는 직접 항해하는 사람이 많아서 요트로 세계 일주하는 사람도 꽤 되더라고요. 그저 ‘요트다!’에 그치는 게 아니라 내가 운전할 수 있고 그 구조를 익히는 감각들을 배워가면서 보이지 않던 게 보이는 과정에 흥미를 느끼고 추구하는 편이에요. 트위터에서 디지털 노마드의 삶을 볼 때면 참 부럽고 멋지더라고요. 훌쩍 떠나서도 일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싶어요.

얘기하다 보니 ‘취미 컨설턴트’라면 잘할 수 있겠단 자신감이 생기네요(웃음). 대부분 해봤으니까 ‘이런 취미를 가져보시면 어때요?’ 추천해주는 거죠. 전 노는 건 자신 있거든요.


필요로 하는 사람 진짜 많을걸요. 제 주변에만 해도 쉬는 때 뭐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 수두룩해요. 저도 그렇고요(웃음).

다능인에 더해 취미 부자라고 여기는 면도 있어요. 궁금한 게 생기면 형편껏 최대한 다 해봤어요. 낯선 것을 몸에 익히는 감각이 너무 재밌어요. 어릴 땐 춤을 좋아해서 스트릿댄스, 탭댄스, 스윙, 살사 등을 배워봤고, 최근엔 풋살, 요트, 프리다이빙을 배웠어요. 수영도 배우는 중인데 제 꿈이 보노보노처럼 바다에서 누워서 자는 거거든요. 이번 여름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요리도 좋아해서 새로운 조합을 시도해보고 먹고 나누는 걸 즐기고요.


저는 불안을 크게 느끼는 요소가 경제적인 부분이거든요. 혼자 있으면 자꾸 그 불안이 커지는데 나눌 방법을 언젠가부터 궁리하게 되더라고요. 심리적으로 나누는 방법도 있고 실질적으로 나누는 방법도 있고. 어떻게든 내가 감당할 방법을 찾아나가는데 유리 님은 어떠신가요?

불안감이 들 때는 주로 운동하거나 팟캐스트 모임을 통해 해소하는 편이에요. 특히 모임이 소중한 게 또래 친구라는 점 때문이에요. 상호 동등 호칭인 ‘님’을 쓰다 보니 나이는 개의치 않죠. 심리상담 받을 때 불안을 입밖으로 털어놓으면 갑자기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잖아요. 끙끙 앓고 있을 때마다 모임에 그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어서 도움이 돼요. 나한테 아무리 긍정적인 희망을 말하려 해도 효과적이지 않을 때 남이 말해주면 큰 힘이 되더라고요. 다음으로 운동을 꾸준히 하는 이유는, 명상 효과가 있기 때문이에요. 그 순간만은 생존을 생각하게 되거든요.

전에 한 선생님께 고민을 털어놨더니, 너무 나이 든 선택을 하려는 건 아닌지 고민해보라고 말씀하신 게 떠올라요. 그때와 달리 나이 든 만큼 선택할 때 고려할 게 많아져선지, 서른이 넘으니 힘이나 체력이 떨어져선지는 몰라도 어딘가 정착하고 싶더라고요. 구체적으로는 안전하고 안정적인 환경을 만들고 싶은 마음 같아요.



안정적인 환경, 안전한 감각을 목표로 하게 되는 이유가, 몸이 안 좋은 적이 있어서인가요?

맞아요. 5년 전 입시 이후로 몸을 막 썼어요. 숨 차는 감각이 너무 싫어서 운동을 아예 안 했어요. 지금도 전속력을 다해 뛸 때 폐가 쓰린 느낌이 싫은 건 마찬가지라 유산소보다는 근력 위주로 하고요. 그즈음에는 좋아하는 것보다는 목표 위주로 살았는데 합병증이 크게 왔죠. 한 달 내내 아파서 일주일 단위로 병원을 옮겨다녔어요. 약 먹어보고 안 되니까 다른 병원 가서 새로운 약 받고, 여기 안 되니까 다른 데 가서 또 진료받고, 약을 섞어 먹으면서 더 악화됐어요. 그중 한 병원에서 간 수치가 이상하니 큰 병원 가보라고 말해서 가봤더니 바이러스성 병이래요. 원인을 찾는 데만 일주일이 걸렸어요. 입원한 동안 열이 오르고 내리길 단시간에 반복하고, 식은땀에 기침, 무기력 등 증상으로만 보면 코로나에 걸린 것 같지만 전혀 달랐죠. 아무튼 죽겠다 싶더라고요.

마침 통합암병동 6인실에 입원해있어서 항암치료를 위해 입원해계신 어머니들이 저를 볼 때면 안쓰러운지 한마디씩 하셨어요. 삭발과 비슷한 반삭 상태라 오해를 샀죠(웃음). 그때 너무 아프니까 믿는 종교가 없는데도 모든 신에게 처음으로 기도란 걸 했어요. 하느님, 부처님, 조상신… 다 부르면서 한 번만 살려주시면 정말 성실하게, 건강하게 살겠다, 내 몸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고 빌었어요. 퇴원하고 이듬해인 2018년부터 운동은 꾸준히 하고 있어요.


운동하면서는 이전처럼 아프진 않은 거죠?

네네. 다행히 바이러스성이라서 항생제로 해결이 되나 봐요.


크게 아픈 시기를 기점으로 본인의 상태나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 외에 알게 된 부분이 있을까요?

입원했던 2017년이 질풍노도의 시기였는데요. ‘사람들이 왜 연애를 할까?’ 하는 궁금증이 처음 생겼어요. 첫 연애를 통해 연애가 나랑 안 맞다고 여기게 됐죠. 친구에서 발전된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그랬는지 몰라도, 계속 역할 놀이를 하게 되는 지점들이 있었어요. 당시엔 역할 놀이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에도 점점 나를 좀먹는 부분들을 발견했어요. ‘나는 이렇게 배려하는데 상대는 왜 안 할까?’ 그때 처음으로 제가 맺는 관계 패턴에 관해서도 인식했어요. 심리상담을 받아보기도 했는데, 집에서 막내라 어떤 선택을 해본 적이 잘 없었더라고요. 취미나 공부하는 부문에는 거침이 없는데 유독 관계에 있어서는 뭔가를 요구하지 않고 상대가 원하는 대로 해줘요.

놀랐죠. 그간 답답했던 지점도 이런 거였어요. ‘얘는 왜 자기 마음을 얘기 안 할까? 얘기하면 내가 다 맞춰줄 수 있는데.’ 그게 괴로워서 상담받는 건데 또다시 상대에게 나를 맞추려고 드는 모습이 보였어요. 지금도 누군가에게 나를 위해 뭐 해달라, 서운하다 하는 표현을 못 하는 편이긴 해요. 이미 태도에서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드러나니까 더 상처받기 싫은 것도 있고요. 계속 보고 있다가 너무 선을 넘는다 싶으면 손절하죠(웃음).


저도 괴로운 연애 후에 심리상담과 필라테스로 지나왔던 기억이 나네요. 긴밀한 관계에서 오는 충격이었기 때문에 더 힘드셨을 것 같아요.

그런 분들 있죠, 지금 밥 먹는다는 내용부터 짜증나는 일까지 시시콜콜 하루 일상을 다 공유하는 사람. 저는 힘들어서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끼리끼리 만난다고(웃음) 매일매일 연락하는 사람이 없어요. 어쩌면 관계의 지속성에 불안이 있나 봐요. 친한 관계에서도 의심하는 편이에요. 혹시 드라마 <구경이> 보셨나요? 구경이라는 캐릭터의 모토가 의심이에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의심이란 건 자신을 못 믿는 부분이 크지 않나 싶어요. 나를 안심시키는 말을 스스로 할 때도 거짓말이라고 대응하고, 남들이 좋은 말을 해줬을 때도 따뜻하긴 한데 어느 순간 진심이 아닐 거라고 여긴다든지. 계속해서 이면에 숨은 뜻을 추측해 보는 면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지금 제 곁에 있는 친구들이 고맙죠.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경험상 연애보다는 우정이 좀 더 편하고 더 오래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점이 있어요. 추한 모습을 보여줘도 될 사람이라는 면에서.

예술인 복지로 제공하는 템플스테이를 엄마와 간 적이 있어요. 그때 스님이 해주신 말씀이, 타인 때문에 힘든 건 결국 본인 마음대로 그 사람이 움직여주지 않으니까 힘든 거 아니냐는 거였어요. 그 사람은 그 사람대로 살아왔고 그렇게 사는 사람인데, 내가 그 사람을 어찌하려고 하니까 죽겠는 거라고요. 힘들어도 그만둘 수 없는 상황에서 저를 속박하고 있었는데 정곡을 찔렸죠. 차담을 마치고 스님이 차고 있던 염주 팔찌를 제게 주셨어요. 여전히 그 사실을 받아들여도 화가 나는 상황이 있지만, 이제는 화라는 감정과 나를 분리할 수 있어요. 염주 팔찌를 차고 다니면서 볼 때마다 그 말을 곱씹곤 해요. ‘지금 내가 원하는 대로 이 사람이 움직여줬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안 되는구나.’


유리 님은 적재적소에 나름대로 해결법을 찾기 위해 계속 나아가시는 것 같아요. 템플스테이도, 동료를 찾아 나선 것도. 사전 답변에 ‘플로팅’이라는 용어를 설명하면서 현재 본인의 상태라고 표현하셨더라고요.

플로팅(floating)은 전자회로에서 버튼의 현재 상태를 0 또는 1로 정해주는 저항이 없어 0과 1의 값을 왔다 갔다 하는 상태예요. 기본적으로 디지털 신호는 저항을 사용해서 0 또는 1, 즉 아무 이벤트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값을 정의하게 되는데요. 이 기본 상태가 정의되지 않으면 버튼의 구조를 사용할 수 없어요. 즉 의도대로 사용할 수 없는 거죠. 최근에 제 삶이 플로팅 상태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직 확실한 방향을 잡는 저항이 없으니 계속 0과 1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거죠.


디지털 언어이자 전기의 언어일 뿐, 유리 님의 언어는 다르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어요.

엄밀히 따지면 0과 1의 디지털 신호에도 사잇값이 엄청 많아요. 답변을 쓰면서 그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다고 여겨봤어요.




내 버킷리스트에는 열기구 타기가 들어있다. 아주 높은 곳을 무서워하면서도 상공에서 바라본 풍경이 어떨지, 그곳에서 맞는 바람은 어떤 느낌일지, 그로써 일렁일 마음은 어떨지 궁금해서다. 유리 님의 얘기를 듣는 내내 내게 없는 뜨거운 열을 계속 주입받는 기분에 휩싸였다. 마치 내가 열기구였다면 그 힘으로 상공을 향해 서서히 떠올랐겠지.


평면에 궤적을 그릴 때는 주로 직선을 기준으로 잡는다. 삐죽빼죽, 왔다 갔다, 흔들흔들, 비틀비틀, 오르락내리락 등으로 표현할 상태는 엇나간 듯 보이기도 하고 진폭이 크게 드러나기도 한다. 만약 이걸 곡선으로 보면 어떨까? 직선에 미처 담기지 않은 순간들이 선 안에 담기기 시작할 것이다. 예를 들면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주고받은 것들.


그의 궤적은 직선에서 곡선으로 변화해간다. 방황하며 떠나온 것에서 축적한 것으로 야무지게 나아가며, 정공법 외에 틈을 공략하는 방법을 새로이 터득해간다. 혼자 재미를 느끼고 파고드는 동안 발생한 불꽃이 사그라지지 않도록, 이를 지속할 공기 즉 환경을 찾아 구축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떠오른 열기구는 곳곳을 유동하며 유람할 터. 어쩌면 누군가 그 열기구를 가리키며 꿈꿀지도 모를 일이다.



유리 님을 더 알고 싶다면

그림 작업

프로젝트 리좀





인터뷰, 촬영   미란
디자인      로고블랭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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