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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양이 Nov 21. 2023

페르소나



 10월 7일 방송된 <오은용의 금쪽 상담소>에 게스트로 나온 츄가 섭식장애를 고백했다. 츄는 닭볶음탕 3인분을 꾸역꾸역 먹다 응급실에 실려 간 적 있다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항상 밝은 모습만 보여줘야 하는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우리는 누구나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 이러한 사회적 가면을 '페르소나'라고 한다. 페르소나라는 말은 정신분석학자 칼 구스타프 융이 사용하며 유명해졌는데, 원래는 그리스 연극배우들이 쓰던 가면을 일컫는 말이었다. 당시엔 마이크가 없었기 때문에 소리가 울리도록 고깔을 사용했다. 하지만 계속 입에 대고 연기를 할 수 없는지라 아예 고깔을 얼굴을 붙여버렸다. 이후 작중 인물의 감정을 드러내는 얼굴을 그리는 과정에서 페르소나라는 용어가 탄생하게 되었다. 


 융 심리학에서 페르소나는 굉장히 중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사회적 역할을 부여받는다. 그 역할을 제대로 해내기 위해 가면을 쓰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고 생각한다. 새로운 인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고단한 하루를 보낸 날, 따듯한 이불속으로 파고들 때가 가장 행복한 이유도 그때만큼은 가면을 벗을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적 가면, 즉 페르소나가 항상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가면은 필요하다. 어머니나 아버지로서의 가면, 자식으로서의 가면, 존경받고 위엄 넘치는 교수나 사장으로서의 가면 등... 우리는 다양한 가면을 무의식 속에 남몰래 숨겨놓고 다니며, 무대 위에 설 때마다 가면을 쓴다. 사회는 그렇게 가면을 쓴 연극배우들 때문에 별 탈 없이 굴러갈 수 있다.


 문제는,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할 때다. 페르소나에 붙들리고 동화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잃어버린 채, 타인이라는 무대 위에서 내려오지 못한다. 


 나와 페르소나가 분리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은 엄연히 다른 존재다. 따라서 적당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반대로 격차가 크고 멀어지면, 중간 지대의 나는 균형 잡는 법을 잃어버린다. 진자의 거리가 멀수록 운동 에너지가 커지는 것처럼, 자신과 페르소나 사이의 유리가 심해질수록 마음의 파괴적 에너지가 강해진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반드시 타인과 충돌하게 되어 있다. 


 그런 사람을 본 적 있을 것이다. 일터와 사교 무대 속에선 따듯하고 책임감 넘치는, 모두가 존경할 만한 어른이 가정에 돌아가면 폭력적인 사람이 되는 경우. 가면을 벗은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만은 연기를 계속할 이유가 없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이중적이고 모순된 인격을 가진 사람을 '야누스의 얼굴을 한 사람'이라고 한다. 융에 따르면, 이들의 페르소나는 지나치게 팽창되어 있다. 내면 또한 상처와 멍으로 얼룩져 있다. 타인에게 어떻게 보일지 신경 쓰느라 자신을 돌보지 못한 부작용이다. 




 심리학적으로 건강한 인간이란, 모든 면에서 완벽한 인간을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뛰어나다는 것이 심리적으로 건강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마음이 단단한 이란 나와 페르소나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면서도 균형을 찾을 수 있는 인간, 또는 자기(Self)와 페르소나의 거리가 멀지 않으며, 그 모순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을 의미한다. 잠시라도 가면을 탁자에 내려놓은 채, 편히 쉴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필요한 이유다.


 연기는, 언젠가 끝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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