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적 도덕
앞 장에서 인간이 협력적 사냥을 시작하며 2인칭 ‘우리’ 공동체를 지향하게 되었고, 그 과정으로 일시적 협력이 원시적인 도덕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번 장에서는 혈연에 기반한 초기 인류 집단이 문화적 정체성을 가진 부족 집단으로 발전하면서 어떻게 현대 인류의 도덕 기반을 완성하는지 살펴볼 것이다. 도덕적 진화의 결과로, 인류는 관습, 문화, 규범, 제도, 종교, 법을 창조해냈다. 따라서 도덕이란 개인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살아가며 공유하고 지켜야 하는 규범과 문화의 총체이자, 그 총체를 내면화한 양심이기도 하다. 인류가 도덕을 완성시키는 과정을 살펴보면, 도덕이 기본적으로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고 보수와 진보의 도덕적 기준이 다른 이유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다.
던바의 수(Dunbar’s number)라는 이론이 있다. 사회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기억할 수 있는 수는 150명 정도밖에 안 된다는 이론이다. 따라서 후기 부족 사회는 150명 이상을 넘어서고 나서부터 같은 부족원인지 식별하기가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을 것이다. 이는 서로 개인적 경험과 안면이 없다면 같은 부족인지 적대 부족인지 알기가 힘들다는 걸 의미한다. 따라서 인류는 자신이 속한 집단의 동료들을 인식하기 위해 특정 제스처나 문양, 의복 등으로 유사성을 드러내는 방식을 활용했다.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어야만 알 수 있는 행동과 언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의 관습으로 정착되었다. 인류 최초의 문화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초기 인류가 현대 인류로 이행한 지 15만 년 전쯤 되었을 때, 아프리카의 인류는 문화 집단을 형성해서 자원을 놓고 경쟁하는 삶을 살았다. 부족끼리 일어나는 경쟁의 과정은 그리 평화적이지 않았다. 자원이 한정적이고 인구 밀도가 높을수록 필요의 크기에 비례해서 부족 간 적개심은 높아지기 마련이다. 대개 적개심은 간헐적인 폭력사태로 표출되었고, 다시 폭력은 증오를 확대하는 악순환 과정을 만들어냈다.
인류의 폭력성은 진보주의와 계몽주의가 믿는 선한 인간관과는 모순된다. 문명 이전 인류의 역사가 평화적이었다는 생각은 루소로부터 비롯되었다. 루소는 자신의 저서 『사회계약론』에서, 원시 인류를 고결한 야만인이라 표현하며 욕심이 없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고 적었다. 또한 초기 문화인류학 역시 원시 부족의 일상을 관찰한 결과를 통해 과거에는 인류가 소규모 부족을 이루어 평화로운 삶을 살았을 거라 예측했다.
하지만 문화 인류학의 믿음과는 다르게 우리의 조상들은 현대 인류보다 폭력적인 삶을 살았다. 문화 인류학의 결론은 원시 부족에 대한 데이터를 잘못 해석한 결과에서 얻어진 것이다. 당시 문화 인류학은 만들어지지 얼마 안 돼서 표본이 부족했다. 게다가 문명인의 개입은 원시 부족의 폭력을 억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학문적 방법론과 절차가 발전하지 못해 발생한 오류였다. 다시 원시 부족의 일상을 관찰하고 고고학 등 인접 학문과의 연계를 통해 밝혀낸 결과, 우리 조상들은 현재의 인류보다 더 심한 만성적 폭력 상태에 놓여 있었다는 점이 밝혀졌다.
심리학자 스티븐 핑커는 저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그간의 통념과는 다르게 인류 사회는 과거로 갈수록 폭력과 전쟁이 빈번한 사회였으며, 오히려 현재로 갈수록 폭력이 감소하고 있다고 말한다. 폭력의 강도, 즉 살상 무기의 파괴력이 늘었을 뿐 폭력의 빈도는 점점 줄고 있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 조상들이 살던 시대는 개인적 다툼보다는 집단들 간의 폭력과 전쟁이 더 빈번했다. 그 형태는 납치, 강간, 유아 살해, 집단 살해, 소규모 전쟁 등으로 다양했다.
우리 선조들이 힘들게 살아갔다는 점은 안타깝지만, 그 양상을 살펴보면 인간의 도덕에 대해 몇 가지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사실 폭력도 도덕과 인간 본성의 일부분이다. 물리적 폭력이든 언어적 폭력이든, 그 형태와 관계없이 인간의 원초적 공격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둘째로, 폭력은 개인적 차원과 집단적 차원 모두에서 일어나며, 집단적 폭력이 그 강도와 범위, 지속성에서 더 크다. 따라서 종교적 테러와 인종청소 같은 인류 최악의 범죄들은 상이한 문화적, 종교적 집단 간의 갈등에서 주로 일어난다. 셋째, 집단적 폭력이 발생할 때는 항상 외집단에 대한 증오와 가치 절하, 그에 비례하는 내집단 결속이 동반된다.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대표적이다. 히틀러는 전후 절망에 빠져있던 독일 국민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유대인에 대한 증오와 혐오를 의도적으로 조장했다. 그러면서도 나치와 히틀러는 유대인을 없애는 것이 세상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법이다.
폭력의 근원이 집단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알았으니, 다시 200만 년 전 사바나 초원으로 돌아가 보자. 앞서 초기 인류가 협력적 사냥을 시작하면서 원시적인 도덕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대형 영장류의 공감적 도덕이 협력적 도덕으로 진화한 것처럼, 15만 년 전에 인류의 도덕은 또 한 번 진화를 하게 된다. 이를 문화적 도덕이라 한다.
원초적 도덕이 ‘너와 나’의 우리에 대한 헌신에서 유래했다면, 새로운 도덕은 내집단과 외집단을 구분해야 하는 필요에 직면해 발생했다. 따라서 협력적 도덕과 문화적 도덕은 강도와 그 결이 다르다. 문화적 도덕은 훨씬 파급력이 크고 맹목적이다. 도덕이 맹목적이라는 뜻은 반론이 허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문화적 도덕은 관습적이고, 권위적이며 스스로를 재생산한다. 도덕이 폐쇄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과 동시에, 폭력을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이유다.
사회적 학습이 완성되기 전의 아동을 대상으로 한 실험을 보면, 인간이 왜 맹목적으로 도덕을 추구하는지 알 수 있다. 인간 아동은 타인의 행동을 모방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순응하려는 의지도 강하다. 어린 침팬지와 달리 인간 아동은 제스처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려는 경향이 훨씬 컸다. 게다가 순응을 하지 말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순응하거나, 과잉 모방하는 행동을 보였다. 모두 자신이 집단에 헌신한다는 정체성을 공동체에 보여주려는 목적이다.
집단 정체성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를 보여주는 것이다. 인류는 타 부족과 구분되는 독특한 문양과 의복, 언어를 공유함으로써 자신이 같은 공동체 구성원이라는 점을 증명해왔다. 애국가, 국기, 스포츠 유니폼, 로고, 국기에 대한 경례 같은 것들 모두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려는 목적에서 유래한 것이다. 대부분 국가에서 국기를 훼손하는 것은 불법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집단의 결속력과 충성심을 해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방을 통해 일단 공동체에 소속되면, 사람은 심리적 안정감과 집단에 대한 소속감, 구성원에 대한 유대감을 느끼게 된다. 이는 협동을 전제로 한 초기 인류의 일시적인 협력 정체성과는 구별된다. 그 덕에 우리는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같은 구성원임을 확인하면 신뢰하고, 의존하고, 기꺼이 도움을 제공할 수 있다. 해외에서 같은 한국인을 만나면 반가운 이유다. 동질성을 확인할 수 있다면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믿을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런 점을 보면, 집단에 소속되는 게 우리 조상들의 생존에 얼마나 중요했을지 알 수 있다. 그 덕분에, 우리가 내집단을 사랑함과 동시에 외집단에 배타적인 성향은 사회심리학 전체를 통틀어 가장 잘 입증된 현상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구 반대편에서 100명이 사고로 사망한 것보다, 우리나라에서 10명이 사망한 사건이 훨씬 안타깝고 슬프다. 인간의 본성 자체가 그런 식으로 진화했다.
집단적 정체성을 알려주는 표지들은 시간이 지나며 점차 관습화 된다. 관습화 된 문화적 기반은 규범에 순응하는 경향과 결합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특성을 발전시킨다. 서로를 구별하기 위한 모방은 점차 관습화 되고, 객관적인 특성을 지니며 문화적인 특성을 지니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왼손으로 악수를 하는 것이 불결하고 예의가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관습이 정착되던 초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하나의 관습으로서 도덕을 이루고 있는 셈이다. 이슬람 내부에서 보면 이는 곧 도덕이지만, 외부에서 보면 하나의 독특한 문화일 뿐이다.
개인으로부터 독립된 내집단만의 독특하면서도 문화적인 도덕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새롭게 변형시켰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 올바른 방식과 그릇된 방식을 구별하는 객관적 기준으로 변형되며 사람들의 삶에 스며들었다. 이러한 사회 규범의 목적은 첫째로, 다른 이들이 자신을 내집단 구성원으로 동일시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둘째로, 집단 속에서 자신의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셋째로, 평판이 위협받는 처벌을 피하는 것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라는 점은 사회적 평판과도 관련된다. 사람들은 공공재 게임에서 자신의 평판이 공개될 때 더 많이 기부하고, 자신의 평판이 문제가 될 때 무분별하게 사리사욕을 추구하는 것을 자제한다. 이베이 같은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자신의 평판 정보가 공개될 때 더 협력적인 태도를 보인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경제게임에서는 평판 정보와 처벌이 없는 것보다 있을 때 더 협력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관찰되었고, 벽에 눈이 그려져 있는 그림이 있으면 더 협력적인 태도를 보였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타인의 눈치를 보며 살아갈 수 없는 존재들일지도 모른다.
뒤르켐은 인간의 문화는 제도와 제도적 가치를 신성시하도록 부추긴다고 말했다. 규칙을 창조하는 과정의 최종 종착지는 제도이다. 제도는 사회규범과 다르게 집단적 목표를 충족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창안된 행동 방식이기 때문에 공적인 성격을 띤다. 일단 제도가 정착되면, 제도의 가치는 종교처럼 신성시되고 권위적 성격을 띤다. 미국이 총기사고로 매년 4만 명 이상이 사망하지만 헌법을 수정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물론 정치권이 군수 복합체의 로비에 굴복한 이유도 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무기를 소지할 권리가 헌법에 명시되어 있다는 이유로 헌법을 수정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미국인들에게 수정헌법은 그 자체로 신성시되는 권리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가치를 부정한다고 생각해보라. 빨갱이 취급받는 건 당연하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국정원에 끌려갈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종교의 기원은 무엇일까? 종교 역시 사람들을 결집시키고 하나로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고 세속화된 서구와 한국에선 종교의 힘이 많이 약해졌지만, 이슬람 문화권에선 여전히 종교가 사람들의 삶과 일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인구 규모가 더 커질수록, 그들에게 공동 정체성을 부여하고, 집단에 헌신하도록 만들기는 더 어려워진다. 단순히 힘으로 억누른다고 될 문제가 아니다. 더 강대한 집단이 다른 경쟁 집단을 힘으로 굴복시키는 건 인류 역사 내내 항상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어떻게 상이한 문화 집단을 동화시키느냐다. 그럴 때 종교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1만 2천 년 전, 농업이 시작되며 인류가 모여들면서 최초의 도시가 생겨났다. 도시의 발흥으로 인구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면서, 권력층은 다양한 문화적 관습을 가진 사람들을 잘 지내도록 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했다. 기존의 문화적 도덕은 한계가 있었고, 근대 이전까지도 민족과 국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수단으로 종교가 채택되었다. 종교는 기존의 도덕을 더 높은 목표로 끌어올린다. 도덕적인 관습과 의무는 한계가 명확하지만, 종교는 사람들이 보다 원대하고 신적인 목표를 추구하도록 만들어, 더 쉽게 사람들을 결집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한 이유다.
법률은 도덕적 규제로 감당할 수 없는 범죄와 피해를 처벌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목적은 상충되는 이해관계에서 비롯되는 갈등이 폭력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예방하기 위함이다. 개인적 갈등이 사회적 갈등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개인의 욕망과 이기심을 통제하는 목적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법은 규제와 처벌적인 성격뿐만 아니라 도덕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법이 단지 권력 유지 수단인 것만은 아니다. 법은 구성원 모두가 집단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은 법률을 따르고 도덕적으로 정당하다고 받아들인다. 법이 있기에 그 집단은 갈등을 효율적으로 조절하고,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