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통제감이 중요한 이유
살다 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많다. 최악의 날은 내가 손써볼 도리가 없는 상황이 연달아 들이닥칠 때다. 그럴 때 나는 좌절감과 패배감을 느낀다. 자기가 상황을 통제할 수 있다는 감각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자기통제감은 인생의 행복과 성공, 자존감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감각이다.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남들이 부러워할 부와 명예를 쌓았다고 해도 자기통제력을 잃은 이는 방향을 잃어버린 채 망망대해를 떠돌아다니는 배와 같다. 자기통제감은 인생의 목표와 방향을 설정하게 해 주며, 자신이 현재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GPS 기능을 한다. 반대로 우리가 우울감과 불행을 느끼는 주된 이유 역시 상황 자체가 견딜 수 없을 만큼 힘들어서가 아니다. 상황을 통제할 수 없다는 무기력을 느끼는 때다. 목줄에 묶인 채 어딘가로 끌려갈 때, 우리는 불행하다.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다. 자기통제감은 어떤 상황에서도,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 처해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대인 수용소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빅터 프랭클은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자기 통제력에 관한 한 일화를 소개한다. 매일 추위와 굶주림에 사람들이 죽어가던 지옥에서, 누가 끝까지 살아남았을까. 가장 건강하거나 약삭빠른 인간이 아니었다. 매일 면도를 하고, 동료의 빵을 훔치지 않고, 동료를 배려하고 보살피던 이들이었다. 끝까지 인간성을 잃지 않으려 했던 사람들이 가장 강했던 것이다.
그럼 누가 가장 빨리 죽었을까. 마찬가지로, 가장 병약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축축하고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꼼짝하지 않은 채,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먹는 것도 거부했고 대소변도 누워서 보았다. 온갖 회유와 협박, 교도관의 폭력에도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죽은 눈으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희망을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산다는 것은 끝없이 외부 상황에 휘둘리는 것과 같다. 아무리 노력하고 계획을 세우더라도 불가항력적인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선택하는 것"이다. 즉, 내가 외부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관한 태도를 결정하는 것이 자기 통제력의 핵심이다. 빅터 프랭클 역시 매일 동료들이 가스실로 끌려가는 상황에서도 자기 통제감을 잃지 않았고, 사소한 일이라도 스스로 선택하고 행동하려 했다. 그는 얼어붙은 빵 한 조각을 먹기 위해 모두가 기피하는 고된 노동에 자발적으로 지원했다. 영양학적으로 보면 빵 한조각을 위한 노동은 손실이 더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선택이 그의 건강과 체력, 정신을 지켜주었다. 덕분에 그는 가스실을 피할 수 있었다.
물론 빅터 프랭클의 사례는 극단적이다. 하지만 나치 장교의 변덕스러운 선택 한 번에 따라 삶과 죽음이 갈리는 환경에서도 자기통제감을 잃지 않을 수 있다면, 일상에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을까. 자기통제력을 기르는 것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것이기 때문이다.
방법은 간단하다. 매일,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스스로 선택을 내리는 것이다.
친구와 약속을 잡았다면, 먼저 시간과 장소를 말해보자. 밥을 먹으러 간다면 당기는 게 없더라도 자신이 직접 골라보자. 운동할 시간이 없다면, 집에서 맨몸 스쿼트 10개와 푸시업 10개만 해 보자.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그 선택은 오롯이 자신이 내린 것이고 그에 걸맞게 행동했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모이고 쌓여 자신이 자기 인생을 통제하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 준다.
인생은 원래 불확실하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을 할 수 있다는 자유로운 감각, 자기통제감은 잃지 않을 수 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인생의 의미를 찾고 싶다면 자기통제감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가스실로 끌려가는 상황에서 왜 누구는 돼지처럼 행동하고, 누구는 성자처럼 행동하는 걸까. 어떻게 그들은 끝까지 태연하고 침착한 채로, 마지막까지 자신의 존엄성을 지켜냈을까.
바로 자기통제감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