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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교양이 Feb 21. 2024

EP2. 여기 플라톤이 말한 인간이 있다


이전 회차: Ep1. 다윈과 제니


그전까지 서구인들은 사람과 동물을 구별 짓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고 믿어왔다. 최초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확립하려 한 플라톤은 사람을 “두 발로 걸어 다니는 털 없는 동물”로 정의하며 직립보행을 우월성의 증표로 삼았다. 그러자 디오게네스는 털을 뽑은 닭을 들고 와서는 “여기 플라톤이 말한 인간이 있다.”라고 외쳤다. 난감해진 플라톤은 “넓적한 손톱과 발톱을 가진”이라는 주석을 황급히 추가했다. 하지만 플라톤은 침팬지가 브라질리언 왁싱을 할 경우 생기는 명제의 취약성에 대해 생각해보지 못했던 것 같다. 



 그 이후에도, 서구 지식인들 대부분이 인간과 동물이 본질적으로 다른 존재라는 걸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동물을 수직 방향의 스칼라 나투라이(scala naturae, 자연의 사다리)에 배치하며 인간이 사다리 꼭대기에 서서 다른 종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오직 인간만이 영혼을 지니고 있는 자유롭고 이성적인 존재기 때문이었다. 후대 철학자들과 심리학자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현재에 묶여 사는 동물과 달리 오직 인간만이 주어진 환경을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고, 동물에게는 본능을, 스스로에게는 이성이라는 권능을 부여했다. 자유의지는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었다. 


그 결과, 인간만이 영혼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은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한 지 150년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우리가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을 규정하고 있다. 진화란 진보가 아니며, 모든 종은 각자의 환경에 알맞게 적응했기에 동등한 생태적 지위를 지니고 있다는 다윈의 겸손한 외침은 후손들에게 잊혀졌다. 진화론과 인간 우월주의는 양립할 수 없음에도, 우리는 자기 종의 고유성과 우수성에 대한 환상을 버리지 못한 채 다른 종을 깎아내려 자존심을 채우는 습관을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못 배기는 꽉 막힌 종이 바로 우리기 때문이다. 동물을 멍청한 자동기계로 비유하고, 몸과 마음을 나누고, 선과 악, 양육과 본성을 구분 짓는 편협한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그 실례다. 


  현재 생물학자들이나 동물학자들, 예컨대 생명을 연구하는 모든 학자들은 이제 ‘본능’같이 철 지난 주제에 더 이상 관심이 없을뿐더러, 동물과 인간 사이의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에 더 관심이 많다. 그들은 동물을 연구할수록 스스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오늘도 연구실을 벗어나지 못한 채 말라가고 있다.


 반대로,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분야의 적지 않은 지식인들이 둘 사이의 접촉을 불편해한다. 그들 중 일부는 진화론자들을 오만한 인종차별주의자나 유전결정론자로 비난하거나, 진화론을 한낱 가설로 폄하하며 어깨를 으쓱거린다. 동물에 관한 교양서 한 권 읽어보지 않고 오직 인간만이 성찰할 수 있는 존재라고 당당하게 대중들에게 외치는 철학자도 있. 그래서일까?


우리 인간은 자기 얼굴만 비칠 만큼 작고 편협한 거울을 들고 와서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는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종이 누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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