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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의자 Dec 28. 2022

#30. 회사는 떠나도, 사람은 남는다

(직장 내) 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차 과장, 넌 한낱 거름이 되지 말고 꼭 과실을 따 먹어야 한다. 


 신설되는 유통사업부로 가서 새로운 것들을 경험해 보고, 배워보고 싶다던 나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해주던 선배의 한마디였다. 난 거름이 된 걸까, 그도 아니면 그저 토양밖으로 밀려난 돌멩이들 중 하나였을까. 그 답을 구하기엔 신규 사업은 아직 설 익었고, 그저 토양을 떠나온 돌멩이들의 수가 점차 늘어갈 뿐이었다.


조 상무라는 농부가 가꿔가는 척박한 토양에서 벗어난 지도 반년. 시간은 빠르게 흘러 그 시절 함께하던 동료들은 서로 다른 회사에서 이전과는 또 다른 업무를 하며 하루하루를 채워가거나, 혹은 버텨가고 있었다.




반년 뒤, 연말. 오후 7시 ((구)유통사업부. 기획팀 송년모임)

"아,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돋는다니까요. 조 상무는 정말 소시오패스 같아요. 학습된 사회적 감수성을 가진 나르시시스트! 결국 자기밖에 모르는 거잖아요. 자기 아니면 나머진 다 도구고, 그 도구를 사용하기 위해 학습된 대화, 소통, 공감을 표현하지만 그 기저에는 결국 본인의 안위밖에 없어요!!"


이제는 이 부장을 밀어내고 기획팀장이 된 유 차장님, 그리고 기획팀을 떠나온 백 과장, 나, 그리고 남 대리, 민 사원까지 오랜만에 모이는 송년 모임이었다. 


유 팀장님을 제외하고는 이제 기획팀에 남아있는 인원은 없었다. 새로운 얼굴들로 진용을 꾸렸지만, 내심 유 팀장님은 예전 멤버들이 그리운 모양이었다. 술만 먹으면 돌아오라고 공수표를 날리시는 걸 보면. 


민 사원은 비서를 그만두고 수능 공부를 시작해 이제 내년부터는 어엿한 대학생이 될 예정이다. 평소 관심이 많았던 신문방송학과에 진학할 거라고 했다. 조 상무 비서를 하느라 또래에 경험하지 않아도 될 여러 고생을 했지만, 이제라도 즐거운 대학생활을 이어가기를 응원했다. 


백 과장은 제약회사 경영관리팀으로 자리를 옮겨 워라밸을 솔찬히 챙기고 있는 모양이다. 원래도 날씬한 체형은 아니었지만, 반년만에 얼굴살이 한 껏 부풀어 오른 걸 보면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많이 안정된 모습이었다. 


남 대리는 반도체회사로 이직하여 사업개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고 했다. 직주거리가 좀 먼 것을 빼면 처우나 근무환경은 충분히 만족스럽다고 한다. 옮긴 회사에서 어느 정도 적응도 했고, 내년쯤에는 지금 남자친구와 결혼을 할 생각이라는 심경변화도 전했다. 조 상무에게 시달리느라 연애생활도 이어가기 힘들었을 텐데 일과 연애 양쪽 모두 안정을 찾은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어려서부터 즐겨했고, 한 번쯤 근무해보고 싶다고 선망하던 게임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취미는 취미로 할 때나 가장 즐겁다던 선배들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듣고 게임회사 사업전략팀으로 옮긴 뒤에는 결국 게임을 끊었다. 그렇게 직장을 새로 얻고 취미를 하나 잃었다. 어느 만화에서 세상 모든 일은 등가교환이라고 하던데 새로운 직장과 즐겨하던 취미를 맞바꾼 선택이 남는 장사인지는 여전히 모르겠다.


"그래도 열심히 하던 너희가 각자 자리를 잡고 잘 사는 거 같아 보기는 좋다. 나만 조 상무한테서 벗어나지 못해 고생을 하고 있으니, 날 위해 한잔씩들 원샷해라. 주인공인 난 빼고."


"팀장님 되셨으니, 유일하게 신사업의 과실을 취하신 거잖아요. 저희는 그저 거름이었을 뿐이라고요. 저희가 피해자이자, 억울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조 상무를 벗어나지 못한 위로의 원샷은 대신해드릴 테니, 오늘은 팀장님이 개인카드로 쏘시는 겁니다~!!"


"저도 찬성!! 몸은 기획팀을 떠나왔지만, 이 자리에서 제 간을 내어드리겠습니다. 유 팀장님이 앞으로도 건승하시기를 기원하며~~ 원샷!!"


한 팀이었을 때 이상으로 떠들고, 웃고, 마시고, 그렇게 한껏 취했던 밤이었다. 그렇게 술 한잔에 아쉬움과 미안함, 고마움 등 다양한 감정들을 털어내고 각자의 내년을 응원하며 헤어졌다. 한 지점에서 우연히 같은 팀으로 겹쳤던 그리고 치열하게 버텨왔던 우리들은 이제 다른 방향을 향해 새롭게 걸어가기 시작했다. 

 



회사를 떠나도 사람은 남는다. 사람이 남았다면, 함께 보냈던 그 시간과 경험은 의미를 잃지 않고, 퇴색되지도 않는다. 새로운 것들로 더 풍성하게 관계를 채워갈 노력만 있으면 된다.   


누군가는 떠나갔고, 누군가는 도망갔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사람이 바뀌어도 회사는 굴러가기에, 구성원이 떠나가도 남은 이들은 계속 출근을 해야 하기에.


그리고 슬프게도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유 팀장!! 너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빨리 노트북 들고 내 방으로 튀어 들어와!!"



이전 에피소드가 궁금하다면:https://brunch.co.kr/brunchbook/sociopath


이미지 출처:Photo by Raj Rana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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