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흔들의자 Dec 16. 2022

#29. 간판 보고 들어왔다가, 사람 때문에 나간다.

(직장 내) 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사람은 당황한 순간을 맞닥뜨리면 본심이 나온다고 한다. 팀원의 예상치 못한 퇴사 카드라면 팀장은 당황하기 마련이고, 이에 정제되지 못한 본심이 튀어나오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다. 


몇몇 관객을 주변에 맞이하고, 단전에서부터 끌어모은 지난날의 분노를 담아 퇴사 카드를 던졌다. 그리고 역시나 팀장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본심 아닌 본심을 드러냈다.




퇴사 4주 전 금요일, 오후 5시

"미친 새끼... 이거 미친 새끼네." 


주변에 있던 관객들도 당황했고, 듣고 있던 나도 당황했다. 몇 개의 예상 시나리오를 그려가며, 대응방안을 시뮬레이션해봤는데, 초장부터 이런 격한 반응은 전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인지 내 얼굴에는 당황한 표정이 잠시 스쳤다가, 이내 썩은 표정이 역력하게 드러난 모양이다. 이 팀장 본인도 욕을 내뱉고는 아차 싶었는지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냐며 타이르듯 재차 물었다.


퇴사를 하겠다는 팀원에게 면전에서 욕이라니, 어떤 사고의 메커니즘에서 그런 발언이 나왔는지 모르겠지만, 더는 들어볼 것 없다는 듯 강하게 퇴사 의사를 표현했다. 어차피 떠나갈 미친놈이기에, 난 당신을 '다시는 볼일 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겠다는 선언처럼 힘주어 말했다.


"오랫동안 고민했고, 다시금 해보고 싶은 일도 생겼습니다. 4주 내로 인수인계 및 퇴사 절차 마무리하고 퇴사했으면 합니다. 잔여 연차는 전부는 아니어도 일부 소진하고 나가겠습니다. 그동안 지친 것도 있고, 마지막 주는 휴가 쓰고 쉬다가 퇴사하는 것으로 일정 생각하고 있습니다."


퇴사를 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을 해결해주면 퇴사 생각을 바꿀 것인지, 퇴사 결심은 어떻게 해도 변함이 없는지, 어디를 가려고 하는 것인지 등 예상했던 질문과 준비했던 대답들이 오고 갔다. 뻔히 보였던 예상 질문들에 그저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담담하게 답변을 이어갔다. 


"왜 퇴사하려는지 저한테만 답을 묻지 마시고, 팀장님도 한번 더 생각해보시면 답을 아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남 대리가 회사를 떠난 이유와 같은 맥락입니다. 남은 인원들에게 최대한 폐를 끼치지 않도록 인수인계는 최대한 상세하게 하고 퇴사할 생각입니다. 다음 주부터는 인수인계 시작할 수 있게 빠르게 절차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일단 네 의견은 알겠고, 오늘 금요일이니 다음 주에 다시 얘기하자. 주말 동안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 그때도 결심이 안 바뀌면 그때 또 얘기해보자. 오늘은 그만 하자."


"네, 퇴사를 말씀드리기까지 오랜 시간 고민했고, 친한 선후배, 가족들과도 어느 정도 이야기는 끝냈기에 결심이 바뀔 일은 없습니다. 오늘은 더 얘기하기 불편하신 듯 하니, 다음 주 월요일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제 결심은 바뀌는 일 없습니다, 팀장님"


다음 주가 되자, 이 팀장은 면담을 피해 계속 외근 일정을 잡았다. 피한다고 결과가 달리질 일은 없기에 카톡, 문자, 전화 등으로 계속 면담 요청을 하였고, 수요일 결국 최종 면담을 하기로 했다. 


퇴사 3주 전 수요일, 오후 4시

"퇴직 의사는 변함없다는 거지? 난 네가 대체 왜 나가려는지 이해를 못 하겠다. 가겠다는 곳이 아예 다른 산업이라던데 가서 고생하다 빛 못 보고 끝나는 케이스가 더 많아. 여기서 잘 성장하는 게 너한테 더 빠르고 안전한 길인걸 모르겠니?"


"지난 10년간 많은 걸 경험하고 배워왔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에서 운 좋게 여러 성과도 냈고요. 그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산업에서도 잘 적응해 나갈 자신 있습니다. 지금 도전하지 않으면 새로운 시도를 아예 하지 못할 것 같기에 지금이 적기인 것 같습니다. 이번 주부터 퇴직절차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하아... 일단 사업부장님에게는 내가 잘 말씀드릴 테니, 넌 아무 말하지 말고 인수인계만 하고 있어. 그 후에 인사팀 면담을 하든 다른 절차를 진행하는 걸로 하자"


그날의 팀장 면담을 끝으로 인사담당자, 인사팀과의 퇴직 면담은 없었다. 물론 조 상무와 퇴직 관련 면담을 하는 일도 없었다. 회사 내에서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조용히 퇴직일 전까지 인수인계를 하기 바빴다. 


회사 밖에서는 친했던 선후배들과 저녁 송별 자리를 갖으며, 떠나게 된 진짜 이유, 리더십의 아쉬움, 남은 팀원들에게 부담을 남긴 미안함 등을 표현하며 회포를 풀기에 바빴다. 매일 같이 이어진 저녁 술자리로 아쉬움과 섭섭함, 미련을 떨쳐내며 보낸 3주는 돌이켜 보면 정말 감사한 시간이었다. 


마지막 출근일 오후 5시

"그래, 차 과장, 다른 산업군의 회사로 간다고? 어디 가서 우리 회사 출신이라는 이름에 먹칠하지 않도록 잘해라, 그게 내가 해줄 수 있는 말의 전부다. 이 팀장, 술 한잔 하러 갑시다!"


그게 '다시 볼일 없는 사람'이었던 조 상무, 이 팀장과의 마지막이었다. 팀 내 노예 중 그렇게 '3'을 외치며 탈출한 날이기도 했다. 


불필요한 대부분의 짐은 미련과 함께 버렸고, 부피가 큰 짐들은 주말 내 정리해놨기에 정작 퇴사 날인데도 평소처럼 작은 가방 하나가 전부였다. 여느 때와 같은 모습으로 건물 출입구를 나서는데 왜 인지, 그제야 눈물이 났다. 아쉬움, 미련, 시원섭섭함, 그도 아니면 기쁨인지 모를 여러 감정이 뒤섞여 그저 눈물이 났다.


애써 그 모습을 보이기 싫어 급하게 택시를 잡아탔다. 그렇게 지난 10년 회사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취업준비생 시절, 누구나 들으면 알만한 회사에 취직하고 싶었다. 기왕 회사생활을 한다면, 크고 이름 있는 회사에서 하고 싶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그런 회사들 중 한 곳에 입사했다. 그렇게 간판을 보고 입사한 회사에서 10년을 보내고, 결국 사람 때문에 떠나게 되었다. 


간판 보고 들어갔다, 사람 때문에 나온다.
 

어느 HR 담당자에게 들었던 말인데, 나에게도 고스란히 그 말이 적용되었다. 이제는 무엇을 보고 회사 생활을 이어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지만, 일단 시간에 맡겨보기로 했다. 치열하게 지내다 보면 간판이든, 사람이든, 그 무엇이든 다시 바라보고 회사생활을 할만한 것이 생길 것 같았다.  


그렇게 새롭게 바라볼 만한 것을 찾게 되길 희망하며, 새로운 회사로의 출근을 준비했다. 추운 겨울이 지난 따스한 봄이었고,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엔 더없이 좋은 계절이었다. 



이전 에피소드가 궁금하다면:https://brunch.co.kr/brunchbook/sociopath


이미지 출처:Photo by Felix Fuchs on Unsplash

이전 18화 #28. 이직의 요람(搖籃)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