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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들의자 Dec 15. 2022

#28. 이직의 요람(搖籃)

(직장 내) 소시오패스가 만연한 시대, 고군분투 직장 생존기  Vol.2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 등에 유사함을 느낀다면, 당신 상사도 소시오패스입니다.
**극 중 등장하는 인물/단체/사업/사연은 모두 허구입니다만, 일부 경험담에 기반했습니다.


 남 대리의 퇴사로 잔잔해 보였던 수면에 파문이 일었다. 그리고 그 진동은 조직의 가장자리로 갈수록 더 큰 파문이 되었다. 돌을 던지게 만든 자는 애써 그 파문을 무시했다. 보이지 않는 척, 파문이 커질 리 없다고 믿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와 달리 파문의 너울거림은 점차 커져만 갔다. 


묵묵히 자신이 맡은 일을 해오던 좋은 구성원의 이탈은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흔들림을 줬다. 좋은 리더와 좋은 팀원이 조직 생활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좋은 구성원이 떠나고 나자 그 의미는 더 크게 와닿았다. 


악랄하거나 무능한 리더 밑에서는 결국 좋은 구성원이 떠나가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된 순간 나머지 구성원들도 조직에 대한 기대치를 버렸다. 그리고 리더와 조직에 대한 기대치가 사라진 구성원들은 각자에게 최선이라 생각되는 또 다른 선택을 하기 시작했다. 




3월 첫째 주, 본격적인 경력 채용 오픈 시즌 

각 기업들의 성과급 시즌이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경력직 채용 시즌이 열렸다. 지난 10여 년 직장생활 동안 처음으로 이력서를 써보고 있었지만, 그간 단련된 추상화 그리기 스킬이면 4~5장의 이력서쯤 우습게 써내려 갈 수 있었다. 하물며 나를 그리는 그림이라면, 추상화가 아닌 더 자세한 인물화를 그릴 수 있었다. 


그렇게 회사에서는 여전히 야근을 하고, 집에 와서는 새벽까지 이력서를 쓰는 이중생활이 시작되었다.


조 상무는 남 대리의 퇴사 이후, 히스테리를 부리는 빈도나 역정을 낼 때 쓰는 단어의 수위가 조금 낮아졌다. 하지만, 다시금 중요한 보고가 잡히면 언제 본래의 모습으로 돌변할지 모르는 인물이기도 했다. 그저 또 다른 노예 탈출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스스로 조심하고 경계하는 모습을 잠시 보였을 뿐이다.


이 팀장은 남 대리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백방으로 사람을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회사 내 무능한 추노꾼으로 소문이 자자했기에 팀원급 구성원들은 커피 한잔 하자는 이 팀장의 요청에도 바쁘다며 피하기 일 쑤 였다. 그렇게 그는 아무런 소득 없이 몇 주를 보내고는 인사팀에 신규 경력직 채용을 요청했다.  


아침부터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보고서를 쓰고 있노라면, 팀원들끼리는 밤새 무엇을 하고 출근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서로가 조심스럽게 이직을 준비하는 중인지 물어보는 시기를 넘어, 주요 기업 채용공고에 대해서도 공유하고, 괜찮은 헤드헌터를 소개하거나, 서로의 이력서를 회람하며 다듬을 부분들을 조언하기도 했다. 


4월 둘째 주, 각자의 노력에 성과를 보이기 시작한 시기  

어느샌가 팀원들 중 누구라도 먼저, 멋지게 탈출에 성공했으면 좋겠다고 서로를 응원하는 기류가 생겨났다. 지금까지 함께 일을 하며 동지애를 느꼈던 구성원들이 이제는 함께 탈출을 꿈꾸는 사이가 된 것이다. 그리고 팀원들 중 하나둘 오후 반차를 쓰거나, 휴가를 쓰는 구성원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이런 쪽에 감이 없던 이 팀장은 팀원들이 설마 다른 회사 면접을 보기 위해 휴가를 쓰는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 하는 눈치였다.


지난한 서류 전형, 몇 차례의 면접 과정을 거쳐 최종 합격 통보를 받는 구성원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팀 내 경영관리 업무를 하던 백 과장이 가장 먼저 합격 소식을 전해왔고, 최종 처우를 조율 중에 있었다. 


다들 백 과장을 축하해주며, 그 기운을 받아 더욱 이직 준비에 몰두했다. 하나 둘 먼저 떠나는 노예가 늘어갈수록 남겨진 노예들의 직장생활은 더 힘들어질 것이 분명했기에 서로에게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그렇게 이직 사관학교라도 입교한 것처럼 서로가 서로를 응원하며, 경쟁적으로 탈출을 준비했다. 


다행히 백 과장과 1~2주 상간으로 나 또한 지원한 곳 중 한 곳에 최종 합격을 하였다. 최종 라운드인 처우 협상이 남아있었지만, '드디어 탈출할 수 있겠다'라는 기쁨에 겨워 처우 협상 등 나머지 과정을 이성적으로 임하지는 못했다. 그저 탈출을 하기 위한 보증 수표인 최종 오퍼 레터를 빨리 받고 싶었을 뿐이다.


그래도 나와는 달리 이성을 끈을 놓지 않았던 헤드헌터가 실력을 발휘하여 지금보다 좋은 조건을 옮길 회사에서 제안받았고, 조 상무와 이 팀장의 그늘을 벗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비슷한 시기 같은 고민을 하던 나머지 팀원들도 대부분 2~3개월 내 다른 곳으로의 탈출이 확정되었다. 조 상무, 이 팀장의 생각보다 팀원들이 시장에서 역량을 인정받는 유능한 노예였던 것이다. 


그렇게 기획팀은 이직의 요람이 되었다. 

      



최종 오퍼 레터를 받았고, 마음도 어느 정도 결정되었다. 이제 속 시원하게 이 팀장, 조 상무 앞에 사표를 내던지고 자유롭게 떠나기만 하면 될 시간이었다. 무대는 준비되었고, 그들이 딱히 할 말 없게 만들 퇴직 사유도 충분했다.


조 상무, 이 팀장에게 시달리며 노예 같은 생활을 하던 우리를 심적으로 응원해주던 관객들도 있었다. 몇몇은 퇴직 의사를 밝힐 때 주변에서 구경하고 싶다며 관람 신청을 하는 이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리더들이 더 악랄하게 구성원들을 갈구고, 핍박할수록 서로는 서로의 탈출을 진심으로 응원했다.


이제 처음으로 내가 카드를 던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들을 떠날 기회이기도 했다.    



이전 에피소드가 궁금하다면:https://brunch.co.kr/brunchbook/sociopath


이미지 출처:Photo by Nick Fewings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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