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사실계곡
어린 시절, 줄곧 마당이 있는 한옥에서 세를 살았다. 어느 날, 부모님께서 드디어 우리 집을 마련했다면서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새 아파트였다. 그때 이후 지금까지 오랜 세월 동안 아파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답답한 콘크리트 건물에 지쳐 마당이 그립고, 숲이 그립고, 계곡이 그리워 기회만 되면 숲속 전망이 좋다는 카페와 자연을 찾아 떠난다. 숲속 전원주택이나 별장에서 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아파트와 콘크리트 건물이 없었던 조선시대에도 숲속 별장을 갖고 싶어 했을까?
가을 향기 그득한 백사실계곡 : 세검정에서 별서 터까지
홍지문을 거쳐 백사실계곡 입구에 도착했다. 차일암(遮日巖)이라는 널찍하고 하얀 바위 위에 근사한 정자가 가을옷을 입고 서 있었다. 세검정(洗劍亭)이다. 광해군 15년(1623) 인조반정 때, 이곳에서 광해군의 폐위를 의논하고 칼을 갈아 날을 세웠다고 한데서 ‘세검(洗劍)’이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세검정은 영조 때 고쳐 지은 후 1941년에 소실된 것을 겸재 정선이 그린 <세검정도>를 바탕으로 1977년에 복원하였다. 차일암 일대는 경치가 아름다워 조선 초부터 사대부가 노니는 곳으로 유명했다. 또한 이곳에서는 <조선왕조실록>을 완성한 후 기초 사료가 된 사초(史草)를 물로 씻어 글자를 지우고 종이는 재활용하는 세초(洗草)가 행해졌다고 한다. ‘불필요하게 된 사초는 당연히 불태워 없애지 않았을까’ 생각했는데, 실제로는 물로 먹을 씻어내고 재활용했다고 하니 ‘선조들이 결과적으로 지구온난화의 적인 CO2 감소에 큰 기여를 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검정을 떠나 백사실계곡을 4백 미터쯤 올라가자 가파른 계단길이 시작되었다. 한 주민이 담벼락에 걸어 놓은 글이 눈에 띄었다. ‘백사실은 무릉도원입니다’. 지금까지 본 이 정도의 경치를 가지고 무릉도원이라고 하면 과한 표현이 아닌가? 얼마 후 현통사가 나타났다. 현통사 앞 계곡에도 차일암 못지않은 널찍한 백석이 놓여있었다. 깊은 계곡이 아닌데 백사실계곡에는 넓은 흰 바위가 많기도 하다.
현통사를 지나 조금 더 올라간 숲속에 갑자기 숨겨진 별천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꽤 큰 규모의 별서(別墅:작은 별장) 터가 숲속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돌계단 위쪽에는 사랑채의 주춧돌, 안채 터, 우물이 남아 있었고, 아래쪽에는 물이 빠진 커다란 연못과 초석 6개만 남은 백석정 터가 세월의 흔적을 보여주었다. 그 주위를 오색 단풍으로 단장한 나무들이 가을을 만끽하며 포근히 이곳을 휘감았다. 올라올 때 보았던 ‘백사실은 무릉도원’이라는 글귀가 빈말이 아니구나, 생각되었다. 그리고 ‘白石洞天(백석동천)’이라고 커다랗게 새긴 바위가 있었다. 문화재청은 2005년, 이곳을 ‘사적(역사유산)’으로 지정하면서, 별서의 공식 이름을 여기 바위에 새겨진 대로 ‘백석동천’으로 결정했다. 백석동천에서 ‘동천’(洞天)은 무릉도원이나 별천지처럼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한다. 2008년엔 경관의 가치를 더 평가해 ‘명승’(자연유산)으로 변경했다.
별서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지금은 터만 남아 무상한 세월을 노래하는 이 별서에는 언제, 누가 살았을까? 이곳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조선시대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1556~1618)의 별장지로 전해졌다. 이는 이항복의 호가 ‘백사(白沙)’인 것에 유래하여 구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항복은 1611년 1월, 꿈속에서 이곳을 찾았고, 이곳의 계곡과 흰 모래가 매우 인상 깊어 백사라는 호를 쓰게 되었다고 한다. 이항복의 시문집인 <백사집>에 그날의 꿈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문화재청은 2012년 10월, 백사실계곡의 별서가 이항복의 소유였다는 오랜 추정이 아무 근거가 없고, “백사실의 본래 명칭이 백석실(白石室)이었다”고 밝혔다. ‘백석’이란 백악산과 마찬가지로 이 계곡의 화강암이 흰 것을 말함이고, ‘실’은 집을 뜻하는 한자(室)나 ‘골짜기’를 뜻하는 고유어라고 해석했다. ‘백사실’은 ‘백석실’이 와전된 발음으로 추정했다. 문화재청은 이 별서의 역대 주인 중 한 사람이 추사 김정희(1786~1856)였음도 찾아냈다. 추사의 문집인 <완당전집(阮堂全集)> 제9권에 ‘백석정을 예전에 사들였다’라는 내용이 나오며, 주석에 ‘나의 북서(北墅·북쪽 별장)에 백석정 옛터가 있다’라고 한 대목이 나온다. 이로써 추사가 터만 남은 백석정 부지를 사들여 백석동천 일대를 새로 건립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이항복이 백석동천에 살았다는 자료를 찾지 못했다고 해서 그가 이곳 별장의 주인이 아니었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이항복은 꿈에 이곳에서 본 흰 모래에 매료되어 호를 백사로 지었고, 여기서 멀지 않은 종로구 필운동 필운대에 살았다. 그리고 이항복은 김정희보다 230년 전에 태어났다. 230년 세월이면 김정희가 이 별서를 구입하기 이전에 몇 번이고 주인이 바뀌고 고쳐지었을 수 있는 세월이다. 과연 백석실이 백사실로 발음이 와전된 것일까?
우연히도 이항복과 김정희는 시기는 다르지만 각자 노년기에 같은 곳으로 유배길에 올랐다. 이항복은 1617년 광해군 때, 인목대비 폐위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나 거기서 추위에 병들어 죽음을 맞이했다. 유배길에 ‘철령 높은 재에 자고 가는 저 구름아/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 삼아 띄워다가/임 계신 구중궁궐에 뿌려본들 어떠리’라고 시를 읊어 마음을 저리게 한다. 추사 김정희는 세 차례에 걸쳐 12년이라는 긴 유배 생활을 했다. 1851년에는 이항복처럼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다. 그 이듬해에 과천으로 돌아와 1856년,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후학을 가르치고 집필활동을 했다고 한다. 이 별서의 주인이 누구였든 간에 두 사람 모두 안타까운 노년을 보내면서 찬란했던 이 별서 시절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조선시대 사람들도 현대인과 마찬가지로 백사실계곡과 같은 무릉도원에 별장을 지어놓고 정사를 돌보다가 쌓인 스트레스를 풀고, 복잡한 마음도 달래려 이곳에 온 것이 아닌가 싶다. 가을향기가 그득한 이곳 백사실계곡에서 그동안 쌓인 근심과 스트레스를 털어내고 약해진 마음을 다잡아 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