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yreuther Festspiele
바이로이트로 향하는 순례자들
바이로이트(Bayreuth)는 예로부터 베를린,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뮌헨 등 독일의 남북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인구 7만의 작은 도시 바이로이트가 매년 7~8월만 되면 이곳으로 몰려드는 단 한 가지 목적을 가진 사람들로 항상 장관을 이룬다. 그것은 오페라를 종합예술로 승화시킨 리하르트 바그너의 뮤직드라마(Music Drama)를 관람하기 위해 이곳으로 온 전 세계의 음악 팬들인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생전에 자기 자신만을 위한 ‘신전’을 만들어 놓고 그를 숭배하는 바그네리안(wagnerian)이라는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바그너의 이상 실현을 구체화한 그의 신전은 다름 아닌 ‘바이로이트 축제극장(Bayreuth Festspielhaus)’이며, 신전의 숭고함의 절정은 그의 뮤직 드라마로 구성된 바이로이트 음악축제(Bayreuther Festspiele)이다.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
바이로이트 음악 축제는 독일 연방 바이에른 주에 있는 소도시 바이로이트에서 매년 7월부터 8월에 걸쳐 행해진다. 리하르트 바그너 자신은 뮤직드라마라 부르는 오페라만을 위한 음악 축제이다. 일명 리하르트 바그너 음악 축제(Richard-Wagner-Festspiele)로도 불린다. 국내에서는 ‘바이로이트 음악축제’라고 하는 명칭이 사실상 통례가 되고 있지만 독일어의 Festspiele에는 본래 ‘음악‘이라고 하는 의미는 없어 ’바이로이트 축제‘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역사와 전통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여름 음악축제 중 하나다. 바이로이트 축제로 인해 유럽의 여름 오페라 축제의 전통이 만들어졌다 할 정도로 유럽 전역에 여름 축제가 속속 등장하였는데, 대표적으로 잘츠부르크 페스티벌, 글라이드본 페스티벌등이 있다.
바그너의 이상 실현, 축제극장
오페라사의 위대한 대작 ‘니벨룽의 반지’를 16년째 작곡하던 바그너는 이 4부작을 올리기 위한 전용 극장을 계획한다. 바그너와 당대 최고의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는 가설극장을 뮌헨의 글라스트 팔라스트(Glast Palast) 안에 건설하려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바그너는 극장건축 계획을 보류시켰고 건축가 젬퍼는 드레스덴으로 떠나게 되었다. 젬퍼는 드레스덴에서 그 자신의 기념비적인 젬퍼 오페라 하우스를 건축할 때 바그너와 함께 공유했던 건축 이론들을 머릿속에서 지워버리고 그만의 독특한 디자인으로 건물을 완성하였다. 한편, 바그너는 홀로 계속해서 그의 작품을 위한 성지가 될 이상적인 장소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바그너의 극장은 멀리 떨어진 위치에 건축되어야 했는데, 이는 바그너가 관객들이 다른 것에 집중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종합예술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바그너를 향한 애정, 영원한 후원자 루드비히 2세
바그너는 1870년 4월 웅대한 변경백 극장(Markgräfliches Opernhaus)이 위치한 바이로이트로 여행을 한다. 비록 이 바로크 극장이 있어 축제극장의 위치로 적당하지 않았을지라도, 바그너는 이곳 바이로이트에 그의 축제극장을 건설하기로 결심한다. 그의 영원한 후원자 루드비히 2세 또한 금전적으로 아낌없는 지원을 하였다. 1872년 5월 22일, 극장의 주춧돌을 놓는 기공식을 가졌다. 바그너 자신의 극장설비 구조에 궁정 건축가 오토 브륀크발트와 기술자 칼 브란트의 감독 아래 건축이 시작된 지 4년이 걸려 극장은 완성되었다. 건축기간 동안 자금 부족은 큰 문제였다. 루드비히 2세는 공채를 조성하여 극장이 완성되도록 했으며, 반프리트로 알려진 바그너의 빌라 또한 지어주었다. 루드비히 2세의 바그너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다. 그는 1876년 8월 6일 ‘라인의 황금’ 최종 리허설 때 바이로이트에 왔다. 사실 국왕은 초연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과대망상증이 심해져서 참석할 수 없게 되었고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바그너의 작품을 보지 못한 채 요절하게 된다.
1876년 8월 13일, 첫 번째 링 사이클인 ‘라인의 황금’으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그 찬란한 역사가 시작되었다. 이날 개관식 참석자들의 면면을 보면 ‘세기의 회동’이라 할 만하다. 카이저 빌헬름 1세, 브라질의 황제 외에 57명의 다른 왕족들이 당대 최고의 음악가인 프란츠 리스트, 차이코프스키, 그리그, 구노, 생상, 말러 등 개관식 자리를 함께 했다.
‘발퀴레’가 다음날 공연되었으며, 세계 초연인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이 16일, 17일 각각 공연되었다. 페스티벌 첫여름에 완성된 세 번의 링 사이클 공연이 있었다. 하지만, 이 완성된 니벨룽의 반지의 평판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못했다. 한스 리히터에 의해 지휘된 오케스트라의 사운드는 영감이 없었으며 연주 속도가 빠른 점도 문제가 되었다. 무대 역시 깊은 인상을 주지 못했다. 가스 조명 역시 작동하지 않아 공연 동안 무대는 암흑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수들의 기량은 뛰어났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브륀힐데 역의 아밀리아 마트나는 가장 주목을 받았다고 한다. 아쉽게도 이런 뛰어난 가수들의 기량은 바그너가 커튼콜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관객들에게 박수로서 그 기량을 인정받을 수가 없었다. 첫 번째 사이클은 전석매진 되었으나, 나머지 두 번의 사이클은 극장의 반 밖에 관객을 채우지 못하는 흥행에 실패하였다. 이는 축제극장의 접근성 문제, 비싼 티켓 가격, 호의적이지 못한 언론 때문이었다. 이렇게 바그너의 실험은 경제적인 타격을 크게 받았고, 1882년 7월 26일 ‘파르지팔’의 세계 초연으로 재개관하기 전까지 6년 동안 극장은 문을 굳게 걸어 잠그고 침묵했다. 파르지팔의 초연은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는데, 무려 16번이나 재 공연 되었으며 시즌의 유일한 오페라였다.
정치로 얼룩진 축제
리하르트 바그너는 1876년 ‘니벨룽겐의 반지’를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초연하고, 1882년 제2회 음악제에서 필생의 대작 ‘파르지팔(Parsifal)’을 초연한 후, 휴식을 위해 베네치아로 갔다가 그곳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1883년 바그너 사후 그의 아내이자 리스트의 딸인 코지마는 축제의 모든 운영을 인수했다. 그녀는 필생의 사명으로 바그너를 기리기 위한 페스티벌을 보존하는 것이었고, 마치 전제군주처럼 페스티벌 운영을 통치했다. 축제극장은 ‘신전’으로 그곳에서의 공연은 ‘종교적 의식’으로 변형되었다. 심지어 코지마는 개인적으로 공연 중간에 지휘자의 해석을 좋아하지 않는 부분이 있을 때마다 지휘자의 포디움으로 메시지를 보내서 시정을 요구했다고 한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유일한 아들인 지크프리트 바그너가 1908년부터는 페스티벌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가 22년 동안 운영했던 기간 중 단지 10회의 페스티벌만이 열렸다. 그의 영향력은 페스티벌을 위해서 결과적으로는 이득이 되었는데, 페스티벌 자체를 ‘종교적 의식’에서 ‘바그너 작품의 재탐구와 재해석’으로 변모시켜 놓았다. 1930년 지크프리트가 죽자, 그의 미망인 비니프레트가 축제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녀는 정치적으로 인종차별주의자로 아돌프 히틀러의 열렬한 숭배자였다. 히틀러가 페스티벌을 나치의 정치적 선전의 포럼으로 전환하는 것을 그녀는 지지했고, 축제극장을 제3 제국의 문화 메카로 만들었다. 히틀러는 루드비히 2세처럼 재정적으로 축제극장을 지원하였고, 유태인 예술가들이 축제극장에서 공연할 수 있도록 특별한 사면을 해주기도 했다. 매년 여름 비니프레트는 페스티벌 주위를 나치문양으로 장식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나자 페스티벌은 나치의 오명으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축제의 새로운 예술적 콘셉트 ‘연출가의 시대’
바이로이트 축제는 리하르트 바그너가 만든 작품의 원점에서 출발, 전쟁과 히틀러와의 관계를 거쳐 이후 다소 삭막(?)하고 간소한 무대와 현대적인 시대 설정을 재구성하며 변천하게 된다. 독일의 패망과 함께 비니프레트의 두 아들 볼프강과 빌란트가 운영을 맡으면서 바이로이트페스티벌은 ‘파르지팔’로 다시 문을 열게 되었다. 빌란트는 새로운 예술적 콘셉트를 시도함과 동시에 추상적인 이미지로 페스티벌의 국수주의적인 심벌을 대신했다. 이러한 시도는 나치의 치욕을 제거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특히 빌란트의 천재성은 제1차 대전 후 독일 연극계의 하나의 조류였던 상징적인 무대 연출로 표현되었다. 당시 그의 탁월한 연출 솜씨는 세계에 ‘바이로이트 방식’이라고 선전되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다시 바그너 순례의 메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상징적 연출 기법을 도입 완성한 손자 빌란트의 위대한 재능에 의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6년 빌란트가 죽은 후 그의 동생 볼프강 혼자서 페스티벌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그는 에버딩, 프리드리히, 셰로, 쿠퍼 등 새롭고 자유로운 창의력을 보이는 젊은 연출가들을 적극 영입하였다. 1970년대 이후 오페라 계를 ‘연출가의 시대’로 만드는데 기여한 것이다. 그는 특히 국적에 관계없이 세계적으로 저명한 예술감독을 바이로이트로 초청하였다. 이때부터 논쟁의 여지가 많은 작품들 역시 공연되었다.
패트리스 쇼로우(Patrice Chereau)에 의해 연출된 그 유명한 1976년도 페스티벌 100주년 기념 링 사이클은 단연 화제작 중의 화제작이었다. 우선 원작의 신화적인 시공간을 산업사회로 가져와 자본가와 노동자 대립의 갈등 구조로 전체적인 연출 구도로 설정했다. 이렇게 자본의 시대를 배경으로 설정했던 패트리스 쇼로우의 링 사이클은 모든 이들의 상상을 초월한 작품으로 당시 커다란 사회적 방향을 일으켰다. 12년 후에는 하리 쿠퍼(Harry Kupfer)는 링 사이클을 핵전쟁 후의 홀로코스트로 배경을 설정했고, 관객들은 야유를 보내기도 했었다. 하이너 뮐러의 연출로 제작된 트리스탄과 이졸데는 오페라의 핵심(죽음으로 통한 사랑의 완성)을 잡기 위해 평면과 상징적인 방식의 조명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대담한 작품이었다.
다만, 보수적인 오페라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음악과 가사만은 그대로 두고 원작의 스토리를 현대풍으로 설정하는 연출가의 발상과 공연은 ‘유로트래시(eurotrash)’로 평가 절하 되기도 하였다. 최근 들어 축제의 전통이 깨지고 있는 점도 특징이다. 2022년은 페스티벌 사상 최초의 여성 지휘자인 옥사나 리니브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으로 무대에 오른다. 그녀는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보수적인 축제의 암묵적 금기를 깨는 시도가 2022년 시즌에는 다양하게 시도된다.
축제 프로그램 구성 방식
바이로이트 축제의 프로그래밍은 단순하지만 나름 원칙이 있다. 우선, 바그너의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인 ‘라인의 황금’ ‘발퀴레’ ‘지크프리트’ ‘신들의 황혼’이 4부작 연속으로만 공연된다. 4부작의 개별 작품 단독 및 분할 공연은 없으며, 원칙적으로 4부작 모두 동일한 지휘자·연출가가 담당한다. 4부작은 통상 5년 연속으로 공연되고, 바그너의 다른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 인’ ‘탄호이저’ ‘로엔그린’ ‘트리스탄과 이졸데’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파르지팔’ 6 작품 중 3 작품이 선택되어 매년 총 7편의 작품이 공연된다. 한편,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은 5년 공연 후 1년은 새로운 연출을 위해 공연이 중단되는데, 이때는 다른 6 작품 중 5 작품이 공연되는 프로그래밍 방식을 따른다. 이른바 바이로이트 프로그램 방식이 원칙과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다만, 예외적으로 축제극장의 개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바그너 자신의 지휘로 베토벤 교향곡 제9번을 연주한 유래에 근거, 바그너 이외의 작품에서는 유일하게 베토벤 9번 교향곡이 특별히 연주되는 경우가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에 베토벤 9번 교향곡이 공연되는 경우는 독일이 정치, 사회, 경제, 문화적으로 위기의 시기에 대체적으로 연주되는 경향이 있다. 제2차 대전으로 축제가 중단된 후 1951년 재개되었을 때 최초의 연주도 빌헬름 푸르트벵글러 지휘에 의해 베토벤 9번 교향곡이 연주되었다. 이 연주는 금세기 최고의 연주로 평가받았으며, 당시 라이브 녹음된 연주가 오늘날까지도 CD로 감상 가능하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여타 다른 오페라 축제와 달리 축제 네트워크를 통한 공동 제작, 해외 투어 공연을 실시하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편, 바이로이트 축제의 첫 공연은 공연 방송의 주관방송국인 바이에른 방송을 포함, 유럽의 많은 국가의 클래식 전문 FM 라디오국에서 생중계된다. 2008년부터는 인터넷 라디오 스트리밍에 의해 전 세계에서 생중계로도 청취 가능하게 되었다.
축제를 만드는 최고의 예술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연중 상설적으로 운영되는 공연장이 아니다. 출연자(오페라, 관현악단, 합창단)나 무대, 음향, 조명, 의상, 소품, 디자인 스태프의 대부분은 독일을 중심으로 전 세계에서 모여 임시 편성된다. 그러나 이렇게 일시적으로 모였다고 해서 이들의 실력을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우선 바그너 오페라에서 중요시 여기는 코러스 합창 단원은 유럽 각지에서 오디션을 통해 가장 실력 있는 성악가들을 모집한다. 교향악단 멤버 역시 독일의 프로 오케스트라를 중심으로 모집하고 있어 연주자들의 역량은 매우 우수하다.
볼프강이 총감독일 때 솔로 가수는 그가 스스로 전 세계 가극장에 정보망을 펼쳐 유망한 가수를 주로 픽업하였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의문의 여지없이 전 세계 바그너 가수의 등용문이다. 이러한 축제의 명성은 유럽의 다른 축제에 비해 매우 싼 출연료에도 바이로이트 무대에 오르고자 하는 전 세계 예술가들로 축제는 문전성시를 이룬다. 3대 테너 중 한 명인 플라시도 도밍고 조차도 그의 평소 출연료 비해 저렴한 금액을 받고도 흔쾌히 출연한 것은 지금까지도 회자되는 유명한 일화다.
지금까지 바이로이트를 거쳐 간 예술가들의 면면을 보면 이 축제의 위상을 알 수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토스카니니, 빌헬름 프루트 벵글러, 헤르버트 폰 카라얀, 피에르 부레즈, 카를로스 클라이버, 다니엘 바렌보임, 제임스 레바인 등 당대 최고 지휘자의 무대가 된 곳이 바로 바이로이트 축제이다.
축제 운영의 정점에 있는 후원 조직
바이로이트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Freunde von Bayreuth eV)는 약 5,500명의 회원을 보유한 바이로이트 축제의 후원 단체다. 놀라운 사실은 이중 10% 이상이 독일 국적이 아닌 외국인이라는 점이다. 1949년 바그너의 손자 빌란트와 볼프강의 발안으로 설립되었다. 바이로이트 축제의 재정적 기반을 확립해 1944년 이래 중단되었던 축제를 1951년 재개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협회의 목적은 바이로이트 축제의 재정 지원에 있다. 또한, '리하르트 바그너 장학금 재단'에 금전적 기부를 통해 저소득층 젊은이들의 바이로이트 유학과 축제 감상 지원을 하는 활동도 활발히 벌이고 있다.
현재까지 후원된 재원은 6,500만 유로(한화 863억) 이상으로 최근 몇 년간 협회의 연간 후원액은 매년 300만 유로 이상(한화 40억 상당)을 차지한다. 2001년 이후 '바이로이트 악우회 재단'(Stiftung Freunde von Bayreuth)으로 병설되어 재단 자산의 증대를 위해 협회의 기부금 형태로 재원이 들어가는 구조다. 2009년부터는 기업 후원 및 협찬의 중요성을 감안 「바이로이트 악우회 서비스 유한회사」(Servicegesellschaft der Freunde von Bayreuth GmbH)가 설립되었다. 이러한 협회의 재정 지원에 의해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과 병설 역사적 건축군의 보존 활동 및 개보수 공사의 주요 재원이 되고 있다. 한편, 협회는 지원의 대가로 축제 측에서 매년 14,000장의 입장권을 우선적으로 제공받고 있으며, 단체 구매 할당량으로서는 최대 규모이다. 한편, 2008년 축제부터는 바이로이트 청년 악우협회(Jungen Freunde von Bayreuth)가 결성되어 300명 이상의 청년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회원은 바그너 음악에 관심이 있는 35세 이하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며 연회비는 100유로다. 축제 역시 바그너 음악을 통해 청년들이 교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기 위해 드레스 리허설 참관, 교류 모임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다.
사실, 바이로이트 축제의 재정적 후원 조직의 구상은 이미 1871년 바그너 자신이 제안하였다. 당시 1,000장의 후원증서(Patronatsschein) 발행을 통해 축제극장 건설과 첫 시즌 예산을 확보할 계획이었다. 아쉽게도 결과는 3분의 1 수준에 머물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루드비히 2세가 사제를 제공했다. 1921년 다시 후원증서가 발행되어 예정된 매출액을 달성했지만 1차 세계대전 후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독일의 화폐가치 절하에 따라 축제 예산을 전부 확보할 수 없었다. 이때 후원자들은 후원단체로 '바이로이트 동맹'(Bayreuther Bund)을 결성하였다. 제3제국 시대에는 히틀러와 나치의 비호 아래 축제는 국가예산으로 운영되었고, 패전과 함께 축제는 중단되었다. 나치에 협력했다는 멍에를 짊어진 축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 것은 바로 후원자들의 지지와 지원이었다. 그 중심에 바이로이트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Freunde von Bayreuth eV)가 있었다. 당시 협회의 창립 멤버로는 독일 산업계를 중심으로 뭉친 유력인사들이었다. 이들은 40만 마르크의 기부금과 무이자 대부금의 제공을 통해 당시 150만 마르크에 달하던 축제 전체 예산의 27%에 해당하는 재원 조성에 크게 공헌했다. 1953년 악우협회도 주요 멤버로 합류한 축제 실행위원회(Festspielkuratorium)가 설립되었다. 여기서 협회는 향후 축제 예산의 3분의 1을 바이로이트시와 공동으로 부담하기로 결정하였다. 나머지 3분의 2는 국가와 바이에른주에 할당되었다.
바이로이트 축제의 독특한 거버넌스 구조
축제극장과 부속 건물인 리허설 무대, 워크숍 공간, 레스토랑의 소유자는 1973년 설립된 리하르트 바그너 재단(Richard-Wagner-Stiftung Bayreuth)이다. 시설의 운영관리는 1985년 설립된 바이로이트 축제 유한회사(Bayreuther Festspiele GmbH)에 임대되었다. 바이로이트 축제 유한회사는 실질적으로 축제와 축제 극장을 운영관리하는 총괄 집행의 역할을 담당한다.
유한회사의 주주 총회는 4개의 공적기관 대표자들로 구성되는데, 독일 연방정부의 문화·미디어부, 바이에른주정부, 바이로이트 악우협회가 각각 2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으며, 바이로이트시가 13%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2008년 오랜 기간 동안 음악제 총감독을 맡은 볼프강 와그너가 퇴임하면서 바이로이트 축제 유한회사의 조직 개혁이 단행되었는데, 바이로이트 음악협회도 4인의 집행임원(Gesellschafter) 중 1인이 되었다. 국가(독일연방공화국), 바이에른주, 바이로이트시에서도 각각 1인의 집행임원을 보내고 있다. 4명의 집행 임원은 관리위원회(Verwaltungsrat)와 임원 총회(Gesellschafterversammlung)에서 대등한 의석과 의결권을 가지고 있다. 또한, 유한회사의 운영관리를 위한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는 각 기관의 대표와 대표 자격을 갖춘 2인, 총 8인의 멤버로 구성된다. 한편, 축제 프로그램의 디지털 영상 작업이 활발해 짐에 따라 바이로이트 축제 유한회사는 전액 출자한 자회사로 BF Medien이라는 회사를 2008년에 설립하여 축제의 디지털 영상 관련 사업을 총괄하고 있다.
민간 주도로 축제를 운영하겠다는 리처드 바그너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초기부터 재정난을 겪어 왔고, 점점 불가능한 현실이 되었다. 결국, 1953년에 설립된 축제 실행위원회((Festspielkuratorium)에 의해 국가, 주정부, 지자체의 공공 참여로 결합하는 독특한 거버넌스 구조를 갖추며, 오늘날까지 축제가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있다. 축제 실행위원회(Kuratorium)가 회원총회(Mitgliederversammlung)를 대표하여 축제 운영을 실행한다. 실행위원회는 10명 이상으로 구성되며 위원장은 주로 재계인사들이 담당한다.
2021년 기준 바이로이트 축제의 전체 예산은 대략 3,250만 유로(한화 437억 정도)이다. 수입 예산은 바이로이트 축제의 독특한 거버넌스 구조에 따라 결정된다. 즉, 총회의 4개 기관에 의해 공적 지원 예산이 규정되어 있어, 독일연방공화국, 바이에른주정부가 29%에 각각 해당하는 540만 유로(한화 73억 정도)와 바이로이트시가 13%에 해당하는 240만 유로(한화 32억 정도)를 지원하고 있다. 또한, 바이로이트 악우협회의 기부 역시 29%에 해당하는 540만 유로를 차지하고 있으며, 바이로이트시 오버프란켄 지구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41만 3천 유로(한화 5억 5천만 원 정도)가 모금되어 수입 예산에 기여하고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는 이렇게 공적 지원과 악우협회, 지역 모금에 의한 예산이 전체 1,900만 유로(한화 257억 정도)로 총예산 중 58.5%를 차지하며, 티켓 판매 수익 등 자체적으로 조성한 수입예산은 1,350만 유로(한화 180억 정도)로 그 율은 41.8%에 해당한다. 한편, 다른 축제 조직에 비해 좋게 이야기하면 ‘전통유지’ 나쁘게 이야기하면 ‘폐쇄적’이라는 비판을 받는 바이로이트 축제는 공연제작, 출연료, 홍보비 등 지출예산을 자세히 공개하지 않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축제 개최를 위한 코로나19 대응책과 성공적 마무리
2021년 바이로이트 음악제는 코로나19 감염 방지 대책을 철저히 하기 위해 예년과는 완전히 다른 변칙적인 스타일로 공연이 이루어졌다. 비말 감염을 막기 위해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서는 합창단이 무대 다른 곳에서 노래했다. 오케스트라는 집단 감염 발생 대비, 연주자의 분산을 통해 연주가 가능하도록 '마이스터징거'와 '탄호이저'를 담당하는 오케스트라와, '네덜란드인'과 '발퀴레', '파르지팔', 넬슨스 지휘의 콘서트를 연주하는 오케스트라로 나누어 편성한 점도 주목할 만한 코로나 대응책이다. 다만, 이로 인해 단원들 간 소통의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즉, 오케스트라 멤버 상호 간 대면으로 전혀 만나지 못한 경우도 발생하는 초유의 상황도 일어났다. 관악기 연주자 이외는 전원 의료용 마스크를 착용해 연주하는 것이 의무화되었다는 점도 중용한 예방 대책 중 하나다. 코로나19에도 불구하고 축제가 개최된다는 안도감에 취하기도 전 연주자들은 오케스트라 피트 안에서 마스크를 착용한 채 연주하는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인터미션 중 관객들의 밀집을 피하기 위해 극장 내 관객용 실내 화장실은 폐쇄되어 대신 넓은 부지 안에 가설 화장실이 여러 개 설치됐다. 축제 극장에 인접한 레스토랑과 카페는 좌석 수와 메뉴를 줄이는 등 대응을 하였다. 이러한 엄격한 감염 방지 대책이 효과를 거두며, 8월 25일 폐막까지 1개월 이상 경과한 시점에서도 출연자 상호 감염이나 객석에서 집단 감염 발생 등은 확인되지 않았다. 공연 결과도 성공적이었다. 코로나 19 이전과 같이 25회 공연 전석 매진이 이어졌고, 22,300명 이상의 관객이 참석했다. 오페라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 7회,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거‘ 7회, ’ 탄호이저‘ 6회 공연이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또한, 3회의 발퀴레 콘서트 공연, 크리스티안 틸레만 지휘의 파르지팔 콘서트, 현재 가장 핫한 젊은 지휘자 안드리스 넬슨스가 지휘하는 2회의 콘서트도 축제의 프로그램을 더욱 풍성하게 했다.
엄격한 축제의 분위기와 독특한 객석
축제 극장에는 로비가 없어 인터미션에는 관객은 좌석에 앉아 있거나, 건물 밖으로 나가게 된다. 휴식은 1시간으로 공연 개시 전에는 팡파르 부대가 발코니에 서서 그날에 공연되는 오페라에서 인용한 부분을 15분 전, 10분 전, 5분 전 3회에 걸쳐 연주한다. 관객의 기본적인 복장은 정장이나, 남성은 턱시도, 여성은 이브닝드레스가 다수를 차지한다. 물론 이는 강제적인 ’ 드레스 코드‘는 아니나 가벼운 복장으로 축제를 관람하는 이들에게는 다소 소외감을 느낄 수 도 있다. 특히 축제 첫날은 바이로이트 축제의 열성 팬인 앙게라 메르켈 전) 총리를 비롯한 유럽의 정치가, 예술 관계자 등 저명인을 초대하고 있어 경비·경호로 인해 엄격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최근 이러한 엄격한 분위기도 지구 온난화와 함께 관객 복장이 다소 캐주얼 해지는 것도 사실이다. 축제 극장의 객석은 냉난방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지 않다. 그동안은 독일 여름의 선선한 날씨 덕에 큰 문제가 없었으나, 지구 온난화로 인한 이상 고온 현상은 자연스레 관객들의 드레스 코드의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객석이 어두워지면 관객들은 상의를 벗거나, 처음부터 셔츠 차림으로 입장하는 남성 관객들의 모습도 이제는 특별하지 않다. 때로는 더위와 공연의 지루함(?)을 참지 못하는 일부 관객들은 휴게소에서 마련된 거대한 모니터로 중계되는 공연을 관람하는 모습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최근에는 객석 내 송풍 장치가 설치되어 중간 휴식 시 신선한 공기가 흐르게 된 점은 그나마 위안이 된다.
축제극장의 구조는 바그너가 직접 고안했는데, 기존의 오페라 하우스와는 전혀 다른 극장 구조는 바로 바그너의 무대예술 이론을 구체화시킨 것이다. 바그너의 무대예술 이론은 먼저 축제극장의 좌석 배치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보통의 좌석배치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가로·세로 복도가 배치되는 것이 관례이나, 바그너는 음악을 연주하는 동안 관객들이 객석에서 자주 나가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의 축제극장에서는 중간의 복도를 완전히 없애버렸다. 이러한 좌석배치는 관객들이 연주시간 중에는 도저히 객석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고, 오늘날까지도 그 전통을 축제극장은 고수하고 있어 극장 입장 시 관객들에게 다소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또 다른 특징은 발코니석과 박스석이 없는데, 모든 관객들은 계급과 빈부에 관계없이 딱딱한 의자에 똑같은 불편을 감소하고 앉아야 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 시민들이 원형극장에 민주적으로 앉던 모습을 연상케 한다. 그리스 원형극장을 기초로 만든 객석은 부채모양으로 경사지게 되어있어 어느 좌석에서도 무대는 잘 보인다. 또한, 극장건축 역사상 공연 동안 처음으로 공연 중에 객석의 불을 전부 소등하기도 했는데, 공연이 시작되면 박스의 불빛이 보이지 않아 관객들은 무대로만 정신을 온전히 집중할 수밖에 없게 된다. 아울러 바그너는 극장의 장식을 원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를 하나의 실험으로 간주했다. 축제극장은 좌석도 그렇지만 오케스트라 피트의 위치도 혁명적인데, 좋은 음향조건을 유지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칼 브란트는 그 유명한 ‘신비로운 깊은 구멍(Mystic Gulf)’을 고안했는데, 바로 오케스트라 피트는 관객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무대 밑으로 깊게 경사지도록 설계되었고 지붕으로 덮여 있다. 이로 인해 그때까지 오페라 하우스와는 완전히 다른, 독특하며 신비로운 음향이 창조된 것이었다.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티켓 구하기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꼭 보고 싶어 하는 음악팬들의 가장 큰 이슈는 그 어렵다는 티켓을 구하는 방법이다.
먼저, 온라인과 우편으로 11월부터 다음 여름의 페스티벌의 티켓을 주문할 수 있는데, 홈페이지 주소는 https://ticketshop.bayreuther-festspiele.de/이며, Festpielhaus Kartenbüro Postfach 100262 8580 Bayreuth 1, Germany로 우편 신청하면 된다. 전화로는 티켓 예매를 할 수 없다.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의 티켓 구성은 상당히 자세히 구분되어 있고, 가격은 좌석의 열과 섹션에 따라 세부적으로 차이가 난다. 같은 열이라도 무대가 잘 보이는 정도에 따라 가격은 달라진다. 티켓가격은 13유로에서 208유로까지 다양하다. 만약 티켓 없이 바이로이트 축제에 과감히(?) 도전한다면, 실오라기 같은 한 올의 희망을 가지고 먼저 매표소로 가봐야 한다. 매표소는 축제극장의 왼편에 위치해 있다. 축제기간 동안 매표소는 오전 10시부터 12시까지만 문을 열고, 오후에는 공연 1시간 전에 다시 문을 연다. 보통 50~100여 명의 사람들이 매표소가 문을 열기도 전에 벌써 줄을 서있는 장면을 흔히 볼 수 있다. 일단 매표소가 문을 열면 모든 사람들은 몇 남지 않은 티켓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밀고 당기는 일대의 소란이 일어난다. 사실 이런 티켓마저도 제한된 좌석으로 무대가 잘 보이지 않는 티켓들이다.
매표소에서 표 획득에 실패한다면 다음 할 일은 ‘표구함 (Suche Karte)’라는 푯말을 만들어 표 구하기 작전에 들어가야 한다. 이리저리 좋은 위치를 확보하며 누군가가 표를 팔기를 기대하며 서 있어야 한다. 한 2-3일 정도 그렇게 시간을 투자하며 열정을 보인다면 매표소의 직원이 어여삐(?) 여겨 표를 구하는 데로 줄 가능성도 있다. 이렇게 구한 표 역시 제한된 좌석으로 좋은 자리를 기대하기는 힘드나, 일단 축제 극장으로 입장한다는 것에 만족해야 할 것이다. 바이로이트에도 암표시장이 역시 존재한다. 암표상은 주로 파란색의 옷을 입고 있으며 “Tauschen(교환함)’이란 사인을 가지고 다닌다. 페스티벌 장소에서 티켓을 사거나 파는 것은 불법이므로 암표상들은 티켓을 ‘교환’한다고 하며 법을 피해 간다. 암표 가격은 정가보다 엄청나게 비싼데, 암표상들은 표 몇 장 팔고 1년을 놀고 지낸다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라고 한다. 공연은 포기하고 극장 내부라도 보고자 하는 이들은 축제극장의 내부견학 투어 프로그램에 참가해 보자.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아침 10시와 오후 2시에 극장 투어 프로그램이 있으나, 아쉽게도 독일어로만 진행된다.
코로나 19의 영향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관람 문화도 바꾸고 있다. 독일의 코로나 확진자가 연일 기록적인 수를 나타내어도 7월 25일~8월 25일까지 2022년 축제의 정상 개최가 결정되었다. 다만, 좌석 수를 공연당 900석의 상한을 두고 있다. 바이로이트 축제 극장은 1,925석으로 객석 수를 50% 줄여 축제를 개최한다. 전체 공연수는 총 25회이므로 2022년 시즌 가용한 좌석은 22, 500석인데, 발매 2시간 반 만에 전석 매진되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 관한 유용한 정보
건축 연도 : 1876
건축가 : 리하르트 바그너, 오토 브뤼크발트, 칼 브랜트
초연 : ‘라인의 황금 Das Rheingold’
객석 : 부채꼴모양
객석 수 : 1,925
프로시니움 : 폭 13m, 높이 12m
무대 : 폭 27m, 높이 26m, 깊이 22m
홈페이지 : http://www.bayreuther-festspiele.de
주소 : Bayreuth Festspielhaus Postfach 100262 D-95402 Bayreuth, Germany
전화 : +49 (921) 78 78 0
시즌기간 : 7월 24일 – 8월 27일(20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