좁은 국토에 살면서 한쪽은 가뭄에 시달리고 한쪽은 건물이 잠기는 2022년 여름을 보내고 나니 기후위기를 실감하게 된다. 실제적인 위협 앞에선 저항할 수 없이 나의 일상에 큰 부분을 '환경 보호'라는 명목으로 내주었다. 사실 이 위기감은 나뿐만이 아니라 주변 친구들도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 독서 모임 주제로 환경 관련 도서가 선정된 건 예정되어 있는 수순처럼 느껴졌다.
'화..환ㄱ...겨..ㅇ' 말을 꺼내는 순간 삶이 피곤해진다는 걸 알기에 모두 머뭇거리고 있는 틈에 곽재식 교수의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가 다음 도서로 선정되었다.
책의 도움을 받아, 거시적인 관점에서 환경 문제를 조망하면서 지금껏 집단으로서의 인류는 얼마나 이기적인지 한 번 더 몸서리쳤다. 제로섬 게임에 참가한 국가나 기업들이 '성장'의 금자탑을 세우기 위해 멈추지 않고 있는데, 그 앞에서 무슨 노력이 소용이 있을까 싶다.
결국 전체는 개별의 합이므로, 개인의 변화가 그 시작이라는 말을 안 할 수 없다. 10월 1일에 있었던 모임에선 이 책에서 출발한 여러 (답 없는) 쟁점을 약간의 두려움과 막연한 낙관주의에 휩싸여 얼레벌레 끝내고, 개인의 입장으로 다시 돌아왔다.
용기 있게 환경 도서를 선정한(발제자는 아무래도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의무를 더 느낄 테니...) 친구가 마지막으로 2022년 10월 한 달 동안 각자 환경 보호를 위한 실천을 하자고 제안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나는 어떻게 하지?'라는 질문의 답을 생각해왔던 것이다. 바로 각자의 목표를 말했다. 나는 이러했다.
: 운동할 때마다 집 가는 길에 물을 사 먹고 있었다. 10분만 참자.
: 회사에서 가끔 사 먹는 커피 일회용 잔의 개수가 꽤 많다. 텀블러가 두 개나 있으면서도.
그리고 한 달 동안 틈날 때마다 기록했다.
10월 1일 토요일
작심한 지 하루? 아니 3시간 만에 어~쩔 수 없이 2L 물을 두 병 샀다. 캠핑을 하러 가는 길이었기 때문.
10월 2일 일요일
화장실엘 가고 싶어서 어~쩔 수 없이 카페에서 아메리카노를 한 잔 테이크 아웃으로 시켰다.
★ 10월 3일 월요일
하루 종일 내리는 빗소릴 들으니 칼국수가 너무 먹고 싶어졌다. 배달 어플을 30분 구경하다가 내려놨다. 배달 용기 때문이 아니라 음식 사진을 보다 보니 먹고 싶은 욕구가 조금 해소됐기 때문이었다.
★ 10월 4일 화요일
동료들이 커피를 사는데, 텀블러를 안 들고 나와서 참았다. 이건 에코 별 하나 받아야 한다.
★ 10월 5일 수요일
점심시간에 텀블러를 들고나갔다. 종이컵을 쓰는 식당에서 텀블러로 물을 받아먹고, 커피도 그 텀블러에 담아 먹었다. 아주 뿌듯했다. 하지만 바로 이 날 저녁, 발트해 메탄가스 누출 사고 뉴스를 보고 나서 내가 느낀 뿌듯함이 허탈함으로 바뀌었다. 어차피 다 죽을 건데 막살아?라고 대상이 없는 협박을 뱉고 나서 문득 감명 깊게 읽은 또 다른 환경 관련 도서에서 본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도 한다. 게으른 허무주의에 유혹당해서는 안 된다고. 한 가지 해결책이 우리를 구해주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중요하다. 우리가 먹는 모든 끼니, 우리가 여행하는 모든 여정, 우리가 쓰는 한 푼에 지난번보다 에너지가 더 사용되는지 덜 사용되는지를 고민하며 선택해야 한다. 우리는 힘을 갖고 있다.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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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 자런 [나는 풍요로웠고 지구는 달라졌다, p235]
★ 10월 6일 목요일
무지출과 함께 무플라스틱! 적은 소비가 환경 보호의 지름길이다.
★ 10월 7일 금요일
두 차례 카페 방문의 위기가 있었으나 한 번은 텀블러에 한 번은 텀블러가 없어서 그냥 동료들이 마시는 걸 구경했다.
★ 10월 8일 토요일~10월 9일 일요일
위기의 주말...분명 텀블러는 챙겼으나 차에서 놓고 다녀 정작 필요할 땐 없었다. 게다가 매장용 컵을 사용하지 않는 관광지 카페라 어쩔 수 없이 종이컵 1회 사용. 게다가 이마트에서 플라스틱에 포장된 음식을 너무 많이 구매했다. 하지만 토요일의 실패 이후, 일요일엔 텀블러를 잊지 않고 챙긴데 칭찬을 하고 싶다.
10월 10일 월요일
가족들과 식사 후 갑자기 스타벅스엘 갔다. 테이크아웃 커피 구매로 인한 플라스틱 사용. 하지만 (동생) 집에서 (동생이) 과일 담는 통으로 장기 사용할 예정이다.
★★★ 10월 11일 화요일~10월 13일 목요일
우수했던 주중의 나. 팀장님이 커피를 사준대도 텀블러가 없으면 얻어먹지 않았다. 대단한 의지 아닌가?
10월 14일 금요일
하지만, 다른 팀원이 갑자기 사들고 온 커피는 거절하지 못했다.
10월 15일 토요일
식물들 월동 준비를 위해 다이소에서 온실 만들 재료를 사보았다. 눈대중으로 대충 샀는데 플라스틱으로 만든 물건을 너무 많이 사고 또 잘못 샀다. (다시 사야 한단 말이다)
★10월 16일 일요일
방구석 백수는 환경 보호라는 팻말 앞에서 가장 우수하게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아주 깊은 휴식과 함께 탄소 발생을 최소화한 하루를 살았다.
★★★★★10월 17일 월요일~10월 21일 금요일
의식적인 노력이 좀 더 쉽고 간결하게 이어졌다. 습관이 되려나?
10월 22일 토요일 ~ 10월 23일 일요일
야외 활동이 잦은 날엔 어쩔 수 없이 일회용에 손이 간다. 최대한 다회용기에 포장해온 음식을 나누어 먹었지만 아예 사용하지 않긴 어려웠다. 맥주도 좀 사 먹고, 물도 샀다. 공원에 쌓인 수많은 일회용 컵 더미 위에 내가 사용한 컵을 슬쩍 얹어 두고 돌아섰다.
★★★★★ 10월 24일 월요일 ~10월 28일 금요일
점심시간에 혹시 커피를 사 먹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텀블러를 챙긴다. 외투를 입게 되면서 더 불편함이 적다. 다만 누가 사주는 커피를 먹을 때 조금 민망하다. 냉큼 내미는 텀블러가 마치 커피를 얻어먹기 작정한 사람처럼 보일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ㅎㅎ).
10월 29일 토요일
선물로 받은 쿠폰을 사용해야 하는 기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배달을 시켰다. 다행히 음식은 대부분 종이 박스에 왔지만, 배달을 왕복하며 발생한 오토바이의 배기가스를 잊으면 안 된다.
10월 30일 일요일
오전부터 러닝을 했는데,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출발한 터라 목말라죽을 것 같았다. 여차저차 집 앞 까지 다 와서, 결국 참지 못하고 탄산수를 사 먹었다.
10월 31일 월요일
마지막 날이어서 그런가. 바짝 당기고 있었던 정신줄이 흐물흐물 풀렸다. 텀블러를 챙기지 못해서 팀장님이 사주는 커피를 냉큼 일회용기에 받아먹고 말았다...
31일 중 20일을 목표 달성했다. 64.5%의 달성률은 높다고 평가하기도 낮다고 평가하기도 애매한 수치인 듯 하나, 목표를 말할 때 의식적으로 너무 어려울 것 같은 목표들은 목구멍으로 삼켰기 때문에, 결국 한참 부족한 결과고 생각한다. 이 글을 쓰면서 다시 훑어보니 조금만 참았으면 굳이 쓰지 않아도 될 플라스틱이 꽤 많다.
게다가 난 한 달 동안 다른 에너지를 절약하는 데는 무심했다. 렌터카를 빌려 여행을 두 번이나 다녀왔고, 멀티탭엔 늘 빨간 불이 켜져 있으며, 전기 매트 끄는 걸 까먹은 적도 있다. 적은 양의 빨래도 세탁기를 썼고, 우리 집엔 1인 가구 평균 이상의 소형 가전이 늘 켜져 있다. 점심시간에 텀블러를 놓고 와 혼자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문득 에너지에 있어서 나의 이런 방만한 생활이 떠올랐다.
선택적인 태도에 모순을 느낌과 동시에 내가 하는 노력들이 무용지물로 느껴지는 순간, 호프 자런의 그 문장이 떠올랐다. '게으른 허무주의에 유혹당하면 안 된다고!!'
게으른 허무주의를 벗어나려 노력했던 시월의 나를 칭찬하고 싶다. 그렇다고 썩 멀리 가진 못 했고, 성실한 환경 운동가가 되기 위한 연습생의 후보자의 도전자쯤 된 것 같다. 11월의 지금은 10월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텀블러를 주머니에 넣는다. 늘 처음은 있는 거니까!
사진 출처 : Photo by Volodymyr Hryshchenko on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