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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토트 May 30. 2024

욕망

창작 단문


세상 모든 금은보화를 가져다 놓는다고 해도 내 목마름을 채울 수 없으리. 향유와 성찬, 미인과 예술로 점칠한 공간이라 해도 빈 곳은 있지 않던가. 이 땅을 오래 밟아온 쪼글쪼글한 발 위로 달린 머리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바닥으로 푹 꺼졌다. 신이시여. 어찌 그릇을 만드시고 그곳에 담을 보배를 주지 않으셨나이까.

둘둘 말아 올린 터번이 묵직하게 목덜미를 누르는 감각이 제법 선연했다. 경배를 마친 남자가 무릎을 세워 걸음을 옮겼다. 모스크 중앙에 자리한 분수대에서 물줄기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몇몇 종을 알 수 없는 새가 그 위에서 목욕을 즐기며 한낮의 뜨거운 태양 빛을 만끽했다. 방랑자는 그 모습을 보며 자신의 생의 끝을 떠올렸다. 그리 긴 시간이 남지 않았다는 건 자명했다. 몇 주 전 찾아간 명의가 담담하게 말했다.


‘준비하셔야 합니다.’


어찌 이 세계를 채 알지도 못하는 머리로 떠날 길을 닦아야 하는가! 잔인한 현실이 남자의 가족을 덮쳤다. 그는 그날부터 자신의 침대에 기어와 잠을 청하기 시작한 손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어쩌면 이것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기어이 답을 찾으라고 종용하는 신의 축복일 수도 있었다. 네게 남은 시간이 짧음을 내 깨닫도록 할 테니 너는 그에 맞춰 잰걸음을 걸어라. 남자는 진단 이후 7번을 더 메카 쪽으로 고개 숙였다. 그리고 8번째가 오기 전날 밤 조용히 짐을 싸서 정처 없이 마지막 방랑길을 떠났다.

며칠 말을 달려 당도한 곳은 신기한 도시였다. 온통 모래뿐인 사막의 작열 위에 신기루처럼 어떤 궁전이 떠올랐다. 노인의 늘어진 살갗이 그 도시의 관문에 닿고서야 그는 이곳이 오늘 밤 거처가 되리란 것을 깨달았다. 붉은 안료가 두텁게 올라간 나무문은 지친 행인을 위해 기꺼이 열렸다.


“마즈라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여행객의 쉼터이며 집. 모든 이들은 환영받으나 모두가 정답을 찾지는 않지요.”


도시의 파수병이 온통 검게 감싼 옷을 걸친 채 노인을 인도했다.


“모두 술탄을 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곳의 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오래 있을 생각은 없네.”


그 말에 중년의 병사가 씩 웃었다. 수염이 코끝에 닿을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이곳에 오는 사람은 이유가 있어서 오게 되죠. 선생님도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런가.”


술탄이라. 오래 전 들었던 말이군. 노인은 생각을 이어가며 병사의 보폭에 맞춰 걸었다. 그도 한때 병사였던 적이 있었기에 그는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자네는 이곳에서 태어났나?”

“예. 그리고 아뇨, 평생 살지는 않았습니다.”

“꿰뚫어보는 재주가 있군 그래.”

“많은 이들을 보다 보니 그들의 생각이 보일 때가 있습니다.”


보기 좋게 꺾인 매부리코가 자신감을 드러내듯 하늘 위로 치솟았다. 노인은 껄껄 웃었다.


“부러운 능력일세.”




술탄은 두 팔 벌려 노인을 환영했다.


“어서 오시게! 타지의 현자는 항상 환영이니 편히 쉬고 음식도 들게나.”


따스한 환대는 오랜만에 겪은 것이라 노인은 심장 아래부터 온기가 차오름을 느꼈다. 모래 언덕에서 느낀 것과는 사뭇 다른 아름다운 감각이었다.

그곳의 술탄은 놀랄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남자가 정원을 산책할 때, 아침 식사를 할 때 그를 불러 함께 즐겼다. 노인은 웃으며 젊은 술탄의 호의를 받아들였다. 자연스럽게 몸에 밴 법도를 지키고 신을 경배하며 지내는 나날은 즐거웠기에 그는 문득 자신이 도시에 온 지 얼마나 되었는지 되새겼다.

기억이 바랜 탓에 그 나날을 셀 수는 없었으나 그는 확신했다. 애초에 계획했던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여기에서 보냈다는 것을.

노인은 고심했다. 분명히 이 도시는 아름다웠다. 궁전 근처로 몇 걸음만 나가면 어여쁜 청년의 합창 소리와 춤사위가 그를 반겼고 시장은 활기찼으며 공기는 맑고 차가웠다. 그가 여생을 이곳에서 보낸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낮의 기도를 올리며 그는 자신이 여전히 텅 빈 존재라는 걸 깨달았다. 내가 찾는 답은 이곳에 없는가. 정찬을 꼬박 챙겨 먹고도 점점 말라가는 팔다리가 그의 고뇌를 증명했다.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소?”

“아닙니다.”


떠나겠다는 그를 말린 것이 젊은 술탄이었다.


“곁에 오랜 삶의 지혜를 아는 이를 두는 게 내 행복임에 선생을 보내기 힘이 드는군. 이해해주시게.”


술탄은 예를 갖춰 노인에게 허리를 구부렸다. 술탄이 허리를 굽혀 인사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에 노인이 그를 만류했다.


“조금 더 지내보겠습니다. 허나 제 여정이 바깥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눈에 띄게 기뻐하는 젊은이의 모습에 노인은 자신의 선택을 무르지 않았다.


“계시오?”


그 날 저녁, 평복 차림의 젊은이가 찾아왔다. 노인은 목소리로 겨우 그가 술탄임을 깨닫고 방문을 활짝 열어 반겼다. 술탄의 손에는 목이 긴 술병이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술을 들이키고 담소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왜 슬픈 얼굴인가.”

“아직 찾고자 하는 걸 찾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묻고 싶었네. 자네가 그토록 찾고자 하는 게 무엇이길래 그렇게 매일 시장과 광장을 맴돌고 있나.”


노인은 손끝에 닿았던 매끄럽고 보드라운 머리칼을 떠올렸다.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을 놓친 것 같습니다. 마치 물거품처럼 말이죠.”

“물거품이라….”


술탄이 붉어진 뺨을 한 채 노인의 등에 손을 올렸다.


“돌아가기에 늦은 시간은 없다네. 이걸 보게, 나는 주변에 찾아오는 이들이 내 원천이니.”

“돌아갈 길이 아직 있겠습니까.”


쓰라린 가슴 속 추억이 덩어리가 되어 뼈에 매달렸다.


“언제나.”

“그렇군요, 그렇구나…그랬군….”


생생하게 기억이 돌아왔다. 자신이 걸어왔던 삶과 궁전 그리고 가족을.


“고맙네.”


청년과 주변의 벽이 천천히 무너져내렸다.


“이미 자네 품 속에 있지 않나.”

“…….”


노인은 청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짧아진 숨결이 천을 간질였다. 손끝에 많은 이들의 온기가 함께 했다.

한낱 꿈으로, 술탄은 그의 가족 사이에서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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