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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Nov 27. 2023

감자싹과 치유의 돌봄

살고 쓰다

나의 새로운 돌봄 대상이 된 감자들


다용도실에 두었던 감자들이 무르고 있었다. 무른 것은 버리고 싹 난 것은 싹을 도려내고 먹을까 하다가 더 살게 두어 보기로 했다. 싹이 제법 많이 올라와서 감자알이 말랑해지기도 했고, 이만큼이나 올라온 생명인데 잘라내려니 마음이 독해졌기 때문이었다. 


두 알을 각자 유리컵에 넣어서 물을 받아 창가에 두었다. 그렇게 두었더니 초5 큰애가 물었다. 


"감자싹은 왜 키우는 거야?"


왜냐고? 나는 별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귀엽잖아."


큰애가 그 말을 듣더니 몸서리를 쳤다. 


"헛. 귀엽다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감자싹을 귀여워하다니 이상한 취향이라고 했다. 


"엄마가 감자싹까지 귀여워 하는 취향이 아니었으면 너희를 낳지도 않았어."


나는 그렇게 대꾸했다. 아이는 수긍한 듯하더니 제 방으로 가 버렸다. 


혼자 남겨져 생각했다. 내가 한 말로 아이를 설득했는지는 몰라도, 그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감자싹조차 귀여워 하는 사람도 아이 없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감자의 먹을 수 없는 부분에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아이를 낳아서 키울 수 있다. 


인간이 인간을 양육하는 일은 무엇을 귀여워 하느냐의 문제와는 관련이 없다. 감자를 두면 싹을 내는 것처럼 사람도 사람을 낳는 일은 생태의 순리이다. 


다만 자본주의 문명 속에서라면 양육에 대해 한 가지 결심이 더 필요하다. 자기 삶의 큰 부분 혹은 거의 대부분을 '돌봄 노동'에 희생 시킬 각오가 되어 있느냐, 아니면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만' 집중할 것이냐 선택이 필요하다. (사실 후자는 말장난이라고 생각하지만, 감정 자본주의 사회의 쏟아지는 출판물들에서 그런 것이 존재하는 양 말하곤 하니, 빌려와 문장의 라임을 맞추어 보았다.)


얼마 전에 읽은 책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 책을 읽은 후 다시 본 영화 <신과 함께>


얼마 전에 낸시 폴브레의 <돌봄과 연대의 경제학>을 읽었다(서평단 신청을 해서 받은 도서이다. 알라딘 리뷰: https://blog.aladin.co.kr/742016184/15069795). 


그 책을 읽고 아이들과 함께 <신과 함께> 1편을 보았는데, 돌봄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책을 읽은 뒤에 다시 본 영화에서는 그 전에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김자홍, 김수홍 형제는 엄마를 돌보는 일에 각각 역할 분담을 맡고 있었다. 김자홍은 돌봄에 필요한 '돈', 화폐를 공급하는 역할을 하고, 김수홍은 직접 어머니를 돌본다. 마치 가부장제 경제에서 아이를 키우는 아빠와 엄마처럼 역할이 나누어져 있었다. 중요한 것은 합의하여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김자홍이 집을 탈주하여 그렇게 된 것이란 사실이다. 홀로 남겨진 수홍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머니를 돌보며 할 수 있는 일-고시공부에 매달리는 수밖에 없다. 


영화는 자홍에 초점을 두고 진행되기 때문에 수홍의 희생은 부각되지 않았다.


물론 자홍이 집을 탈주해서 이루어진 역할 분담이라서 수홍은 가부장제의 어머니가 남편에게 하듯이 자홍을 돌볼 의무는 없다. 자홍의 의식주는 혼자 해결해야 한다. 부양가족을 위한 돈벌이를 위해 투잡을 뛰어야 한다. 반면에 수홍은 자홍이 보내는 돈으로 어머니만 돌보면 된다. 


그러면 엄마를 죽이려다 실패하고 탈주한 뒤에, 열심히 돈을 벌어 보내준 자홍의 그 과도한 노동들은 '속죄'에 값할 만한 것이었는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자홍이 어머니에 대한 속죄 의식에는 시달리면서, 어째서 수홍에 대한 속죄 의식은 희미한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머니'라는 말은 줄곧 외쳤으나, 수홍이 원귀가 된 후에야 그 존재를 떠올린 것만 봐도 그랬다. 


이 모든 게 마치 우리 사회가 '돌봄 노동'에 대해 얼마나 가치 평가 절하하는 중인지 드러내는 것만 같았다. 


By Bing Image Creator / 프롬프트: Two potato sprout girls are proud of their sprouts.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이란 말의 어폐는 +와 -의 주체와 객체가 모두 같은 존재라는 데에 있다. 그것은 웃으라고 만든 말장난처럼 느껴진다. '나 자신에게 선물을 해 보았다.' 같은 문장처럼 말이다. 


자신을 돌보는 일, 그게 진짜 돌봄 '노동'의 영역인지도 잘 모르겠으나, 일단 그렇다 치자. 그때에 우리가 계산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주체인 나'의 힘과 노동 대신에 돌봄을 당한 '객체인 나'의 회복에만 초점을 둔다. 사실은 그게 아니다. 돌봄은 돌봄을 행하는 주체에게도 일정한 치유의 효과를 남긴다. 내가 감자싹을 돌보거나 16살 된 늙은 개를 돌볼 때에 얻는 치유의 힘이 그러하다. 자기 자신을 돌보는 일에는 직원의 임금을 삭감하고 회사 순수익을 늘리는 것과 같은 꼼수가 존재한다. 돌보고 돌봄을 당하는 두 가지 영역에서 모두 이득만을 취한다. 


사람이 사람을 돌보는 일에는 식물이나 동물을 돌보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에너지가 든다. 돌봄 가치가 평가 절하되는 것에는 그런 이유가 있다. 자기 자신이 아닌 사람을 돌볼 때에는 꼼수를 부려 삭감할 수 없는 마이너스 항목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더 계산적이 되고 더 영리해질수록 타인에 대한 돌봄 가치는 추락할 것이다. 내가 혜택을 입을 수 없는 영역에서 도망치는 대신에, 그 영역 자체를 평가 절하해 도덕적 부채감에서도 달아나려는 심리가 사람에게는 존재한다. 


나는 감자와 개와 사람을 키우는 중이다. 그 중에 책임이 가장 큰 것은 사람을 키우는 일이고, 요즘 가장 즐거운 일은 감자를 키우는 일이다. 감자싹이 귀여워 죽겠다. 그렇지만 어느 날 감자들이 물컹해져 죽어 버린다고 해도 심리적, 사회적으로 크게 타격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당장의 귀여움을 비교하면 감자싹들이 승리자이지만, 상실감을 비교하면 상대도 되지 않는다.  


사실 돌봄 노동이란 그런 것이다. 내 노력과 시간을 퍼부어서 잃고 싶지 않은 존재를 키워 가는 일이다. 내 곁에 더 오래 곁에 두는 것,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 남겨질 존재를 위해 사는 것, 그 목표를 위해서 나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는 일이다. 주는 것이 너무 커서 돌보는 이가 받는 치유의 힘이 미미하게 느껴지더라도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작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작정을 하는 사람들이 자꾸 줄고 있다. 사람을 돌보는 일에 더 많은 사회적 가치 부여가 필요하다. 


매일 감자의 물을 갈아주고 싹이 자라는 것을 관찰하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치유의 놀이이고 사회적 재생산을 위한 돌봄 노동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 


많은 경우에 해내야만 하는 의무는 즐거움과는 관계가 없지.


By Bing Image Creator / 프롬프트: A potato sprout is smil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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