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다
나방의 죽음에 대한, 굴욕에 대한, 후버 댐에 대한, 그리고 글 쓰는 법에 대한 글이 있다. 어느 저자가 책상 위 물건들을 적은 일람표가 있고, 안경을 쓰지 않는 그 저자의 안경 착용 설명서가 있다. 또 다른 저자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은 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배운 것이 있다. 코에 대해, 식인종에 대해, 방법에 대해 쓴 글이 있다. ‘럼버lumber'라는 단어에 깃든 다종다양한 의미가 있다. 작가 본인일 수도 있고 작가가 우아한 대역일 수도 있는… (중략) 카오스를 기록한 글이 있다. 고백에 대한, 차가운 기억에 대한, 모래 수집에 대한 글이 있다. 진귀한 수집품들에 대한 글이 있다. 가구의 철학을 다룬 글이 있다. 근래에 관측한 일식을 서술한 글이 있다. 비행이… (이하 생략) pp.11~15.
세상은 혼돈이 아니라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이야기라는 믿음, 이야기여야 하지 혼돈이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고통스러운 내용이더라도, 심지어 비극적 결말이더라도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 자체는 유익하리라는 믿음, 그런 믿음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 약해지는 것, 무너지는 것이 늙음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노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부터는 소설 대신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p.244.
언제든 확고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에세이는 가장 사람을 닮은 문학 형식이다. 다른 것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 문학 형식. 갑자기 멈출 수도 있지만, 그러한 멈춤도 당연히 완결이기에 완결성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더 살지 못하는 아이와 마찬가지이다. p.231
지성의 진부함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일관성만 한 것이 없다. 좀처럼 관심이 가지 않는 하찮은 것으로도 일관성만 한 것이 없다. 모든 글에는, 그게 무슨 글이든, 일관성이 있기 마련이다. 미숙한 글이나 못 쓴 글은 특히나 끔찍할 정도로 일관적이다. 그러나 에세이가 가진 능력은 다중화하는 것, 무한히 파열시키는 것, 상충하는 힘들을 교차시켜 구심점들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pp.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