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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애라 May 22. 2024

에세이즘과 에세이스트 - 아무 말이나 해. 그게 너야.

읽고 쓰다

이따금 도서관에서 책등만 보고 뽑아든 책에서 희열을 느끼곤 한다. 그런 경험은 흔치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책등에 있는 정보라고는 책 제목뿐인데, 한 단어 혹은 두세 단어로 이루어진 짧은 문구가 전달하는 것의 대부분은 그 단어를 나만의 방식으로 독해하는 ‘오해'이다.

이따금 그 오해가 뒷발로 쥐를 잡을 때가 있다.



큰 쥐를 잡은 경우 중 대표적 사례는 C.S.루이스의 <오독>이었다. 제목이 오해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어서 끌린 책이었지만 정작 내용은 오독과 별 관련이 없었으며, 심지어 영어 원제는 전혀 다른 것이었는데, 아무튼 한국어판 제목이 ‘오독'이라서 집어들긴 했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감이 왔다. 아, 오늘 큰 건수를 올린 것 같다! 책에는 문학을 읽는 각종 취향에 대한 보석 같은 통찰들이 가득했다. 나는 그 책을 소중히 들고 도서관을 나왔고 완독했고 전자책으로 구입했다.



지난 주말에 도서관에서 <오독>을 발견했을 때와 버금가는 희열을 느꼈다. 톨킨과 C.S.루이스가 몸 담았던 ‘잉클링스'라는 문학 클럽에 관한 책을 찾다가 그 곁에 놓인 작은 책 하나에 눈이 갔다. 작고 하얀 하드 커버 책등에 이렇게 쓰여 있었다.



<에세이즘> 브라이언 딜런 김정아 옮김



근래에 내가 에세이집을 출간해서 그런가(‘내가’ 출간했다기에는 공저자 8인 중 한 명이라 민망하지만) 제목에 확 꽂혀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런데 이 책은 진심으로 보물이었다. 에세이라는 글에 대한 에세이라는 점에서 이 책은 매우 독특하다. 책의 성격은 도입부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첫 챕터인 ‘에세이와 에세이스트에 관하여'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방의 죽음에 대한, 굴욕에 대한, 후버 댐에 대한, 그리고 글 쓰는 법에 대한 글이 있다. 어느 저자가 책상 위 물건들을 적은 일람표가 있고, 안경을 쓰지 않는 그 저자의 안경 착용 설명서가 있다. 또 다른 저자가 말에서 떨어져 정신을 잃은 날 자기 자신에 대하여 배운 것이 있다. 코에 대해, 식인종에 대해, 방법에 대해 쓴 글이 있다. ‘럼버lumber'라는 단어에 깃든 다종다양한 의미가 있다. 작가 본인일 수도 있고 작가가 우아한 대역일 수도 있는… (중략)  카오스를 기록한 글이 있다. 고백에 대한, 차가운 기억에 대한, 모래 수집에 대한 글이 있다. 진귀한 수집품들에 대한 글이 있다. 가구의 철학을 다룬 글이 있다. 근래에 관측한 일식을 서술한 글이 있다. 비행이… (이하 생략) pp.11~15.



열거로 글을 시작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열거가 무려 4페이지에 걸쳐 계속 될 수도 있나? 안 될 게 뭐 있나? 이 글은 에세이인데.


도입부에 대한 규정을 엿 먹이는 이 책에 나는 반해 버렸다. 덧붙이자면 첫 4페이지의 하단에는 레퍼런스를 밝힌 각주가 빼곡하다. 본문의 열거에 이어 각주의 열거까지 더해지면 ‘금기'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기백을 느끼게 된다. 석사 논문을 지도 받을 때, 서문에 각주가 늘어지지 않도록 하라는 주의를 받았다. 서문은 가볍게 시작해야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면서 무거워져야 한다는 것이 ‘논'하는 글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에세이에서 대체 누가 그런 걸 신경 쓴단 말인가? 이 글이 에세이라는 것을 이토록 선명하게 밝히는 글은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각주의 레퍼런스 전체가 에세이 명저들의 목록이라니… 보청기 낀 귀에 확성기를 들이대고 외쳐주는 느낌이었다. 정신이 번쩍 들게 에세이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글이었다.



에세이는 그런 것이다. 누가 에세이를 두고 ‘이러이러해서 이것은 에세이의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글은 에세이에 미치지 못한다.’ 라고 하는가? 그 반대로 ‘이 글은 에세이에 지나지 않는다.’ 라고 종종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뭐 하러 잘 쓴 에세이라는 규정을 만든단 말인가? 에세이를 쓰기 위한 규칙이라면 어문 규정 하나로 충분하지 않을까?



이 책은 옮긴이의 말조차 보물이다. 옮긴이 김정아는 자신이 소설을 읽지 못하고 에세이를 읽기 시작한 시점에 대해 이렇게 쓰고 있다.



세상은 혼돈이 아니라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이야기라는 믿음, 이야기여야 하지 혼돈이어서는 안 된다는 믿음, 고통스러운 내용이더라도, 심지어 비극적 결말이더라도 이야기를 알게 되는 것 자체는 유익하리라는 믿음, 그런 믿음을 감당할 수 없게 되는 것, 약해지는 것, 무너지는 것이 늙음이라고 나는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게 노인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고부터는 소설 대신 에세이를 읽기 시작했다. p.244.



세상이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믿음, 선과 악이 있고 경계가 있다는 믿음, 의도에 따른 결말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전적으로 젊은이들의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평생을 젊은이처럼 살아간다. 그들의 이야기에는 순진한 믿음이 가득하고 그런 글을 읽는 독자들은 함께 젊음을 향유한다. 그런 작가들은 에세이조차 소설처럼 쓴다.



그 외의 많은 사람들이 옮긴이와 비슷하다. 소설을 거쳐 에세이처럼 늙어간다. 무난한 삶들이다.



무난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어떤 작가들은 미리 늙어버려서 소설조차 에세이처럼 쓴다. 그런 글을 읽는 독자들은 늘 죽음을 생각한다. 열역학적으로 평형을 이룬 상태처럼 경계가 뚜렷하지 않고 잔잔한 글은 ‘죽음'을 표현한 것이다. 에너지의 죽음, 우주의 죽음, 도덕의 죽음 등등.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젊은 독자들은 그런 글을 ‘지루하다’는 말로 표현한다. 죽음은 꽤나 지루한 일일 테니 틀린 말이 아니다. 안 죽어봐서 확신은 못하겠지만.



(물론 내 추리가 아주 뇌피셜은 아니다. 나는 관에 누운 사람을 본 경험이 두 번이나 있다. 두 번 다 생전의 성격이 온화한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죽은 모습이 매우 지루해 보였다. 죽지만 않으셨어도 버럭 화를 내며 일어나셨을 텐데. 그렇게 꽁꽁 묶여 있는데도 그렇게나 얌전하다니.)



이전 회차에서 삶을 공격하는 치명적인 감정은 지루함이라는 글을 썼다. (링크: 외로움과 지루함에서 도망칠 수 없는 직업) 그 글에 덧붙여 말하자면, 인생의 여정이란 아이러니를 실현하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지루한 인생을 열심히 견디고 나면 최종적으로 절대적 지루함에 이르게 된다.


에세이의 처음과 끝도 인생과 비슷하다. 딜런의 <에세이즘>은 시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이름마저 에세이즘인 에세이스트: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의 <버지니아에 대한 에세이>를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해 같은 책으로 끝을 맺는다.


언제든 확고하게,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정해져 있다는 점에서 에세이는 가장 사람을 닮은 문학 형식이다. 다른 것에 의해 손상되지 않는 문학 형식. 갑자기 멈출 수도 있지만, 그러한 멈춤도 당연히 완결이기에 완결성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더 살지 못하는 아이와 마찬가지이다. p.231



브라이언 딜런은 시인이 묘사하는 기이한 이미지들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에세이란 죽은 아이와 같다는 특이한 이미지”, “이 이미지의 사용자가 시인이자 가정의임을 감안하면 그렇게 이상한 이미지는 아니지만, 이 대목은 완결성만으로 설명될 수 없을(완결성이지 통일성이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자) 의외의 차원, 즉 폭력과 애도와 회상의 차원을 에세이에 더한다.” p.232. p.231.



에세이의 시작과 끝이란 그런 것이다. 어린 채로 죽어버린 삶처럼 에세이는 끝난다. 통일성에 대해 논할 겨를도 없이 결말이 툭 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완결이다. 에세이의 끝은 미진하고 아프고, 그것이 끝임을 믿을 수 없다.



때문에 이 글 또한 여기서 끝나야 한다. 의미 없는 연명 치료를 중단하는 보호자처럼 비장한 심정으로 이 글을 맺어야겠다.



그렇지만 이렇게 끝낸다면 정말로 진부한 결말이 되겠지. 끝이 끝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브라이언 딜런이 첫 챕터의 마무리로 인용구를 가져와야겠다.


지성의 진부함을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 보이는 것으로 일관성만 한 것이 없다. 좀처럼 관심이 가지 않는 하찮은 것으로도 일관성만 한 것이 없다. 모든 글에는, 그게 무슨 글이든, 일관성이 있기 마련이다. 미숙한 글이나 못 쓴 글은 특히나 끔찍할 정도로 일관적이다. 그러나 에세이가 가진 능력은 다중화하는 것, 무한히 파열시키는 것, 상충하는 힘들을 교차시켜 구심점들을 끝없이 만들어내는 것이다. pp.20~21.



세상에 에세이를 내놓은 사람들은 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시작해도 결국은 글쓰는 이의 정체성을 드러내고야 마는 글. 아무리 끈을 조여 봐도 오므려지지 않고 속이 빤히 보이는 투명한 주머니 같은 글. 전달하고 싶은 주제에 집중하는 순간 부자연스러워지는 춤사위 같은 글.



있는 그대로의 당신을 발가벗겨 세워두는, 자비 없는 폭로의 글이 에세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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