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어는 켄타우로스나 판, 스핑크스, 메두사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반인반수이다. 공격성이 현저히 낮은 괴물이라고나 할까. 전설 속의 세이렌은 직접 사람을 해치기보다는 사람을 현혹하는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들은 사람들은 물에 빠져 죽는데, 인어는 원래 물에 사는 존재이므로, 어떻게 보면 사람을 해치려는 의도를 가지고 부른 노래라기보다는 그저 자기들 입장에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을 수도 있다. 좋은 구경을 시켜줄 테니 바닷속으로 놀러 오라는 가사를 담아서 말이다. 황진이가 철벽 치는 남자를 붙들려고 "삼천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니 쉬어간들 어떠리."를 읊은 것처럼.
인어는 다른 괴수들과 다르게 특별히 옹호해주고 싶은 마음이 자꾸 드는데, 그 이유는 아무래도 안데르센에게 빚진 바가 클 것이다. 인어를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전환시킨 결정적 이야기꾼이 바로 안데르센이다. 인어공주 이야기를 알게 되면 인어를 사람을 유혹해 잡아먹는 괴물과 인어를 겹쳐 보는 일은 힘들어진다. 이야기의 인어공주가 너무 애달프고 불쌍하기 때문에.
이야기의 전통에서 '비련'은 거의가 여성들의 차지였다. 그래서인지 슬픈 이야기의 주인공인 인어는 자연스럽게 여성으로 재현되었다. 남성적인 비극 서사와 다르게 인어공주에는 마이너리티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신들의 서자로 활약했던 영웅들을 보라. 자기 종족을 떠나서 인간계로 오면 특출한 능력을 지닌 엘리트들이 된다. 그런데 인어공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물고기일 뿐이다. 헤엄을 좀 잘 치긴 하는데, 그래서 물에 빠진 왕자를 구해줄 수 있긴 한데, 그래도 물고기는 물고기이다. 해양생활에 특화된 선천적 핀(fin)을 타고난 게 아니라, 다리가 없는 것이다.
안데르센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인어공주에게 다리를 주며 목소리를 빼앗았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기만 해도 이주자인 인어공주는 충분히 마이너리티 했을 텐데, 아예 말을 못 하게 만들어 버렸다. 게다가 인어공주는 하반신이 물고기일 때조차 성별이 여성이다. 로맨스의 전통에 의해 누군가가 결혼해주지 않으면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성이 결혼도 못하고 노처녀로 살면 사회적 죽음을 선사하던 시대가 한때 존재했으니, 지난 시대의 여성들이 읽었던 인어공주 이야기에서 왕자에게 딱지 맞는 슬픔은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물거품’급의 공포였으리라.
그런데 나는 전부터 인어의 성별에 상당한 의심을 가지고 있다. 아니, 인간 남자를 보고 사랑에 빠지면 반인반어 여성인가? 가슴 부위에 지방세포가 많으면 여성인가? 머리가 길면 여성인가? 생물학적 성별 구분에 상체의 지표를 사용하는 것은 얼뜬 짓이다. 상체의 지표들은 대개 생물학적 성별이 아니라 사회적 성별을 나타낸다.
주성치 감독의 영화 <미인어>를 보면 인어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꼬집는 경쾌한 장면들이 나온다. 아주 대놓고 인간이 다른 인간의 상체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깨닫게 하는 그림이었다. 남성의 하체와 물고기 꼬리를 결합한 상상이 등장하고, 상하가 아니라 좌우로 결합시킨 반인반어도 등장한다.
주성치 영화에는 인어가 다리를 얻는 마법이 등장하지 않는데, 인어는 육지 보행을 위해 꼬리지느러미를 성형(?)하고 특수 훈련을 받는다. 판타지 장르의 요소를 SF 쪽으로 전복시키고 무협의 요소를 더했다. 이렇게 해석하고 보니 거의 매트릭스급 장르 믹싱인데, 결과물이 B급 감성으로 나온 것은 주성치의 역량이겠다. 존경한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짜 존경한다. 진심으로 그 능력이 탐난다.)
사실 나는 인어를 소재로 한 단편소설로 등단했는데, 소설로까지 쓴 걸 보면 알겠지만 인어 이미지를 너무나 사랑한다. 그 사랑의 시작은 안데르센이 아니라, 론 하워드 감독, 톰 행크스와 대릴 해나 주연의 1984년 작 로맨틱코미디 영화 <스플래쉬>이다. 토요명화나 주말의 명화 중에 어느 곳에서 처음 봤을 텐데(명절 특선으로 봤을 수도 있다.), 한동안 영화 장면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했다. 이 영화의 결말은 생물학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스스로를 여성이라 인식하는 내게 매우 흡족했다. 데릴 해나가 데릴사위급 카타르시스를 선사해 주었다고나 할까?
주성치의 영화도 일정 부분은 이 영화에 빚졌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주성치는 당대의 <스플래쉬>가 내게 준 상쾌함 같은 건 주지 못했다. 주인공의 안타고니스로 운명이 아니라 여성 빌런이 전면에 등장하고, 인어의 계급성이 ‘공주’가 아니라 ‘미인’으로 조정되었으며, 주인공의 육체성이 마법에서 벗어나 SF로 선회하면서 전투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진보적이라 할 수 있지만, 결말의 카타르시스는 좀 약했다.
이런 나의 감상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으로 사람마다 견해는 다를 수 있다. 무엇보다 세 스토리(안데르센, 스플래쉬, 미인어)가 모두 사랑에 목숨 거는 ‘인어공주’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게 그거지, 크게 다른가?’하고 의문을 표할 수도 있겠다.
그러고 보면 최근에 읽은 최의택의 단편소설은 매우 멀리 나갔다고 볼 수 있다. 이 이야기는 안데르센의 인어공주에 숨어있는 전통적 가치관들을 전부 비틀고 뒤집는다. 인어공주는 사랑에 목숨 걸다가 희생하는 축소된 여성이 아니다. 인간과 비인간으로 나뉜 두 세계는 서로 대립하고 있는데, 두 세계 사이에 끼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방식이 안데르센식 서사이고, 사랑하는 사람만 선별해 비인간 세계로 편입시키는 방식이 앞의 두 영화였다면, 이 소설은 그 어느 편도 아니다. 이 소설의 인어공주는 정치 감각(?) 같은 게 엿보이는 인물이어서 향후 인어 여왕이 될 재목이 아닌가 싶었다. 내가 본 중 가장 자존이 튼튼한 인어공주였다. (자세한 것은 직접 읽어 보시길.)
또 하나, 이 소설의 특이한 점은 서양 전설을 기반으로 창작된 안데르센의 동화에 동양의 인어 전설이 살짝 가미되어 있다는 점이었다. 동양에서는 인어를 ‘식용 생물’쯤으로 보았다. 인간과 성교하는 존재로 보지는 않았다. 인어와 다르게 호랑이와는 성교를 하고 여우와도 한다. 이러면 동양인이 서양인보다 포유류 카테고리 정립을 먼저 했나 싶을 수 있지만, 웬걸, 우렁이와도 한다. 호러 쪽이긴 하지만 지네와 구렁이와도 한다. 그러니까 물고기만 유달리 무성의 존재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겠다.
기록으로 남아있는 반인반어의 동양적 존재들은 이러하다. 19세기 초, 이옥(李鈺)의 《백운필》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다. 황해도로 유람을 떠난 사람이 우연히 빈집에서 아름다운 여성과 어린아이들이 몸을 하얗게 드러내고 빈집에 갇혀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말을 하지 않았지만 수줍어서라고 여겼다. 그런데 돌아온 집주인은 자신이 잡은 물고기라면서 손님 접대용으로 요리하려 하였다. 인어를 불쌍하게 여긴 손님은 집주인을 설득해 인어를 풀어주게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어우야담》에는 인어를 창으로 찔러 잡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기름을 짜서 쓰기 위해서였다. 인어기름은 고래기름과 달리 상해도 냄새가 나지 않는 품질 좋은 기름이었다고 한다.
최근에 이런 식용 및 생물자원형 인어 세계관을 다룬 콘텐츠를 몇 개 접했다. 타카하시 루미코의 애니메이션 <인어의 숲>, 차인표의 장편소설 《인어 사냥》 같은 작품들이다.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인어는 서양적 인어상과 결합되어 있어 매우 끔찍하게 느껴지는데, 사실 동양에서 생각하던 인어는 코펜하겐에 있는 인어공주 동상 같은 모습이 아니다. (영어 명령어만 취급하는 AI 생성기인 미드저니 MIdjourney가 생각해 내는 인어도 서양 세계관의 인어였다. 표지 그림 참조)
동양에서 인지하는 인어의 형상은 약간 코믹하게 생겼다. 중국 《산해경》에는 ‘인어(人魚)’라는 존재가 나오는데, 이름만 같을 뿐이고 우리가 아는 인어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인어(人魚)라는 이름은 예어(鯢魚), 제어(䱱魚)와 같은 개념으로, 발이 네 개 달린 물고기이다. 우리가 아는 반인반어와 엇비슷한 것을 찾아봐도 얼굴만 사람인 형상이다.(심해어를 연상시킨다.) 심지어 머리카락도 없다. 정말 얼굴만 사람이다(互人(호어), 魚婦(어부)). 한국에서 아름답고 측은하게 여긴 인어조차 우리가 아는 인어공주 형상은 아닌 모양이다. 한국의 강원도 통천 전래에 의하면 헤엄치는 모습이 거북을 닮았다고 한다.
이러한 반인반어에 대한 동양적 인식과 목소리를 잃은 인어공주 사이에는 유비적 상관관계가 있다.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존재로서의 반인반어이다.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존재는 아무리 아름답고 측은하고 성정과 태도가 예를 아는 듯해도 연민의 대상은 될지언정 사랑과 성애의 대상은 못 되는 것이다.
동양 전설에서 “서방님, 절대 밤에 일어나 제 얼굴을 보시면 안 됩니다.” 정도의 대화는 지네도 하고 구렁이도 하고 우렁이도 할 줄 아는데, 인어는 그렇지가 못하다. “그 사람이랑은 말이 안 통해.” 할 때의 그 말(대화)이 아니라, 아예 원천적으로 말을 못 하는 존재이다. 그렇게 보면 안데르센의 인어공주가 다리와 목소리를 교환한 것은 엄마 재봉틀을 들고 나가서 강냉이로 바꿔 먹은 것에 필적하는 처사다. 사랑에서 육체성을 과대평가한 인어공주는 정신적 소통의 중요성을 놓치는 우를 범했다.
<스플래쉬>와 <미인어>, <멀리서 인어의 반향은>이 해피엔딩이 될 수 있는 기저에는 말 잘하는 여주인공이 기본 전제로 깔려 있다. <스플래쉬>의 인어는 TV를 하루동안 보는 것만으로 인간의 언어를 완벽하게 습득하고, <멀리서 인어의 반향은>의 인어 역시 새로운 세계에 대한 탐험 욕구로 인간 세계에 자주 나간 덕분에 인간의 언어를 할 줄 안다. <미인어>의 인어 역시‘말’을 건네며 남자주인공에게 접근한다.
주성치의 SF적 상상력은 사회과학적으로도 근거가 있어서, 미인계에는 ‘아름다운 인간 형상’이라는 표피보다 중요한 본질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다리를 마법으로 얻을 수 있나 없나의 문제를 넘어서서 어학적 훈련이 미인계의 핵심일 수 있다. 작전상 유혹에 성공하면 뭐 하나? 의도한 방향으로 설득이 불가능한데.
반면에 이 영화의 웃길 정도로 급진적 지점은 사랑의 육체성을 아예 소거해 버렸다는 것에 있을지도 모르겠다. 정신적인 소통이 있으면 침대 위의 로맨스는 없어도 그만이다. <스플래쉬>와 비교하면 더 뚜렷이 보인다. 영화 <스플래쉬>의 로맨스는 진한 육체성을 가지고 있고, 이 육체성을 위해서 주인공 인어는 반드시 다리(인간의 하반신)를 소유해야만 한다.
사랑에 있어서 육체성보다 대화의 중요성이 더 부각되기 시작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에서이다. 사랑에서 물질성을 뚜렷하게 자각하게 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물질성이 없는 ‘대화’의 낭만성에 더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에바 일루즈는 『낭만적 유토피아 소비하기』에서 ‘대화’에 ‘낭만적 아비투스’를 투영한 것을 근대적인 현상이면서 자본주의적 계급 현상이라고 해석했다. ‘대화’를 낭만적으로 인식하는 현상은 근대적 자유연애 사상의 보급과 함께하고 있으며(그 예로 에바 일루즈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에서 대화를 낭만적으로 묘사한 부분을 가져오고 있다.), 계층적으로는 현대적인 지식인 계급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이다.
말하자면 자본주의 이전의 사회에서라면 <미인어>의 두 주인공 관계는 우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의 관계를 ‘연인’으로 (좀 더 뚜렷이) 느낄 수 있게 된 것은 현대사회가 만든 ‘대화’의 낭만성 때문이다. 대화의 낭만성은 사랑에 빠지는 상대와의 정신적 교감을 드러내고, 자본주의가 휘두르는 물질성에 오염되지 않았다는 결백성을 드러낸다.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염없이 더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이 글은 인어에 대한 것이므로 ‘반인반어’로 다시 돌아가 보자.
르네 마그리트, <집단적 발명>
현대의 로맨스에서 인어의 상반신에 집착하게 된 기저에는 대화의 낭만성도 한몫을 한다. 우리는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누는 한 쌍의 연인을 스크린의 한 장면처럼 상상하곤 한다. 영화와 영상물의 보급은 대화와 함께 ‘키스’의 낭만성도 보급하였고, 겹쳐지는 연인의 육체를 담은 상반신 샷은 로맨틱함을 상징하게 되었다. 육체성과 본능, 말초적 자극, 물질성에 오염된 하반신을 낭만적 상반신과 분리했다고도 할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 <사랑의 노래>
르네 마그리트의 회화 <집단적 발명(L'invention Collective)>(1934)과 <사랑의 노래(The song of love)>(1948)를 볼 때 느껴지는 불편함의 실체도 거기에 있다. 낭만적 상반신을 물고기로 대체하고, 육체성과 물질성의 하반신을 인간인 채로 남겨두었기 때문이다. 집단적 발명의 대상은 다름아닌 '아름다움'이다. 인간 공동체가 창조한 '아름다운 인어'의 상/하반신을 전복시킨 <집단적 발명>의 인어는 기괴하다. 하늘을 보고 있는 한 쌍의 물고기 상반신 반인반어와 <사랑의 노래>라는 제목이 만나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이 반인반어의 연인은 손을 잡을 수도 없고 90도로 허리를 꺾지 않는 이상 눈을 마주 볼 수도 없다. 포옹을 할 수도 없다. 대화는 가능할까? 남녀의 육체가 나란히 붙어 있으면 ‘사랑’일까? 왜 이 사랑은 계속 보고 있으면 애처로워지는 걸까?
근래에 읽은 최의택의 소설에서 인어공주와 샤샤가 나누는 감정은 이러한 맥락에서 인어 서사가 내포한 현대적 로맨스, 현대적 낭만을 잘 포착한 결과이다. 내가 쓴 단편소설은 그다지 급진적인 성애관을 담고 있지는 않은데, 인어의 공간적 정체성에만 주목해서 바다에서 땅으로의 ‘이주자’로만 해석했기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아무래도 이 아쉬움을 해소하려면 ‘본격 인어 2세대 문학’을 써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인어가 낳은 딸들이 바다와 땅을 자유롭게 다니며 연애하는 ‘백합물’ 정도면 어떨까? 어머니의 명을 받아 땅에 남겨져 있던 아버지를 소환하러 가는 인어 전사 이야기도 괜찮을 것 같다.
<참고문헌>
유광수, “유광수 교수의 우리 고전 비틀기 〈27〉 김현감호(金現感虎)-여자는 탑을 돌며 무엇을 빌었나?”, 월간조선, 2018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