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찮게 넷플릭스 예능 <신인가수 조정석입니다>(이하 <조정석>)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이하 <보헤미안>)를 거의 동시에 보았다. '우연치 않다'는 말은 넷플릭스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대로 봤다는 뜻이다. 알고리즘은 두 작품을 '음악'이란 공통 카테고리로분류해 연이어 추천했겠지만, 두 작품을 모두 감상한 뒤의 나는 다른 유사성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것은 창의력의 집단성 즉 집단 창의력에대한 것이다.
'집단 창의력'은 '집단 지성'이라는 말과도 상통하는 면이 있는데, 다른 지점도 있다. 집단 지성에는 규범과 윤리 도덕적 면을 더 강화시키기 위한 규제와 제약까지 포함하고 있지만(예: 법률의 제정, 다수의 법률안 심의, 단체들의 윤리위, 청문회 등), 내가 말하는 집단 창의력은 그와 반대되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다. 가치를 쳐내는 게 아니라, 가지를 더 뻗어나가기 위해 틀을 깨부수는 과정을 말하고 있다.
<조정석>에서의 집단 창의력은 매우 극적으로 드러나 있다. 조정석이 빈손으로 시작해 정규앨범 발매까지 100일만에 해내는 미션을 수행하는 동안, 조정석이 만나는 모든 사람은 그가 틀을 부수고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가지를 뻗도록 유도하는 자극원이 되어준다.
<보헤미안>에서의 집단 창의력은 <조정석>에서보다 훨씬 짧은 장면으로 나타나 있다. 첫 음반의 녹음 과정, 브라이언 메이의 주도로 <We will rock you>를 작곡하는 모습, 그리고 머큐리의 고백을 통해서이다. 솔로 앨범을 만들겠다며 팀을 나갔던 프레디 머큐리는 돌아와 멤버들에게 다시 함께하자는 제안을 하며 이렇게 말한다. "(새로운 세션 멤버들이) 내가 시키는 대로 하라고 했더니, 정말 그렇게만 하더라고. 나에게는 너희들이 필요해." 프레디 머큐리는 팀을 나가고 나서 '퀸'이라는 그룹의 저력을 깨달았다. 틀을 깨는 창의력은 함께 했기에 가능했음을.
그런데 집단 창의력이란 것은 마냥 모이기만 한다고 발휘되는 것일까? 능력이 출중한 사람을 많이 모아놓으면 집단 창의력이란 게 무조건 생겨나는 것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조정석의 작업이나 퀸의 작업은 마냥 모두의 의견을 받아들인 집단 창작을 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 협력하여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면 조정석 프로젝트는 악평을 일삼거나 조정석의 음악이 "너무 평이하다"는 식의 애매한 비판을 하는 사람들을 다루지 않는다. 퀸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퀸은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실험적인 타이틀곡에 대해 혹평을 하며 '상업성'을 운운하는 제작자, 비평가들의 조언을 개의치 않는다. 퀸의 작업은 프레디 머큐리와 퀸 멤버들의 작업 방향성을 이해하고 지지하는 그룹 안에서 이루어진다.
우리가 흔히 '대중성'이라고 말하는 심미적 감상 기준은 때로 모두의 비평을 수용해 버려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일 때가 많다. 대중성은 새로운 미감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자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대중은 새로운 것을 선뜻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대중은 새로운 것에 항상 목말라 한다. 그러므로 정말로 모두가 납득할 만한 것을 내놓았을 때는 열광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하거나 넌더리를 내는 것을 내놓았을 때에야 열광이 서서히 번져 나간다. 혹은 그 넌더리를 발판으로 또 다른 '영리한 대중 예술가'가 탄생하기도 한다. 보수적 미감과 타협해 대중이 열광할 만한 합의점을 재차 내놓는 중간 상인 같은 존재들이다.
AI가 내놓는 예술 결과물들이 점점 구리게 변하는 이유는 AI를 학습시키는 대중의 데이터들이 더 방대하고 더 보편적인 방향을 향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집단 창작물의 창의성은 데이터가 방대해지면 보장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데이터의 섬세한 선별로 보장된다. 사람을 무작정 많이 모은다고 일이 잘 돌아가는 게 아니고, 각 분야의 최고 성취를 이룬 사람들을 무작정 모은다고 일이 잘 돌아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모아두느냐가 핵심이다.
<The New Yorker>지 8월호에 테드 창이 쓴 글 "AI가 예술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에 따르면, 예술품은 무수한 '선택'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 선택의 조합이 예술의 본질이다. AI는 그 점에서 예술과 근본적으로 대립한다. 구동 원리 자체가 인간의 선택 과정을 단순화시키고 거칠게 생략해 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테드 창의 의견을 확장시켜 보자. 이 의견에 따르면 사람이 모이는 현상은 AI 작동 방식과 완전히 반대편에 있다. 사람은 그 자체로 수많은 경우의 수의 집합체이다. 사람은 개체 하나만 놓고 봐도 방대한 선택의 집합체이다. 인간은 다면적이고 비일관적이며 고정적이지 않다. 시간 앞에서 혹은 대상 앞에서, 타인 앞에서 무수히 많은 선택을 행하며 살고 있다. 이들이 모여서 서로의 선택에 영향을 끼치는 과정을 수학적으로 환산하면, 현재의 AI 기술이 따라잡을 수 없는 방대한 수준이 될 것이다.
두 영상물은 음악에 관한 이야기이다. 음악은 얼굴을 마주보고 집단 창작을 해나갈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예술 장르의 종사인이 보았을 때, 매우 부러운 특성이다.
흔히 작가들은 홀로 골방에서 작업한다고 여겨진다. 작가들 자신도 종종 그렇게 오해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 역시 의식하지 못한 채로 집단 창작에 가담해 있다. 단지 그 집단 창작의 의사소통 과정이 글에서 글로 연결될 뿐이다. 그러므로 음악처럼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게 불가능하다(혹은 불가능했다. 요즘의 SNS를 이용한 짧은 글도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면, 그들은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소통을 하고 있다.)
<촛불의 미학>에서 가스통 바슐라르는 "스트린드베리는 절대 고독 속에서 쓰면서 고독한 독자들이라는 커다란 타인과 교류하는 것임을 알았다"라고 했다.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은 어딘가에서 글을 읽을 사람과 홀로 된 외로움을 공유하는 셈이다. 해당 문장은 공포에 대해 말하기 위해 쓰여졌지만, 나는 고독의 공유에 초점을 두고 싶다. 글의 세계에서 '슬픔'과 '외로움'이 보편 감수성인 이유는 다른 감정에 우선해 먼저 공유해야 하는 감정이 고독이기 때문이다. 고독을 공유하고 있다는 인식, 그건 매우 중요하다. AI에게 나의 단어 선택과 문장 선택을 위임하는 순간, 고독의 공유도 포기하는 셈이 된다.
이제 다시 <조정석>과 <보헤미안>으로 돌아가보자. 저들의 집단 창의력이 만들어낸 창작물은 좋은 예술인가? 어떤 것은 시간을 초월할 위대한 예술이고 다른 것은 오락물일 뿐인가? 둘 다 결국은 오락물일 뿐인가?
모두를 만족시키는 예술이란 없다. 다수를 만족시키는 예술이 좋은 예술일 리도 없다. 그것은 다수라는 집단의 가치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 다수의 만족이라는 시점의 부정에 가깝다. 누구도 '언제' 다수가 만족할지 그 시점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당대에 다수를 만족시켰으나, 이후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작품도 있고, 당대에 소수만을 만족시켰으나 세월이 가면서 점점 더 많은 다수를 만족시키는 경우도 있다. 혹은 당대에도 다수를 만족시켰고 세월이 지나도 여전히 다수를 만족시킬 수도 있다. 그리고 당대에 소수를 만족시켰고 지금도 소수를 만족시켰지만이상하게도, 언젠가 그 미감이 다수의 것이 되리라는 예감을 느끼게 하는 작품도 있다. 소수가 만족한 작품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소수만 만족시킬 것 같지만, 그 소수를 너무나 확고하게 만족시켜서 그 향유 집단이 절대로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작품도 있다.
그러므로 한때 잠시 향유 집단이 있었으나 곧 사라지리라는 예감을 주는 작품도 당연히 존재한다. 그 일시성을 알면서도 다수가 잠시 향유하는 작품도 존재할 필요가 있다. 그 작품을 매개로 대중은 동질감을 느끼고 같은 것을 공유한다는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술의 기능 중 하나이기도 하다. 프로파간다는 예술이 아니라고, 선전, 선동, 광고는 예술이 아니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 모두가 예술이다. 세계에는 다양한 예술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조정석이 온 우주의 도움을 받아 완성시킨 음악은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는 아니었다. 특히 그의 어쿠스틱 랩은 다이나믹 듀오에 해킹 당한 조정석을 보는 기분이었다.
아름다움은 때로 결함의 흔적에서 뿜어져 나온다. 같이 밥을 먹고 부대끼며 영향을 주고받는 동료 예술가는 서로의 결함을 아름다움으로 바꿀 방법을 찾아줄 수 있다. 결함을 틀에 끼워 없애려 하지 않고도 말이다.
+)
오롯이 혼자 만들어낸 새로움이라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작가들이 받아들일 때, 더 나은 예술가, 더 겸손한 예술가, 더 위대한 예술가가 되지 않을까 한다. 자기 창작물은 아무도 인용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인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태도는 자본주의가 부채질하는 침탈 윤리에 매몰된 착각이다. 뻔히 존재하는 공유지를 모른 척하며 자기 울타리만 주장하는 것이다. 영향 받고 영향 준 과정을 직시하려고 노력하고, 그것을 겸허하게 인정할 때, 예술계가 더 발전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나 문제가 '돈'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그건 참 안타까운 일이다.
김경수, <한국 밈의 계보학>, 필로소픽, 2024. p.151. 저작권의 횡포는 때로 새로운 예술을 창조해내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김경수의 패러디 창조력을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