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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와 봉준호, '지금/여기'에 대한 먼 곳의 이야기

- <미키17>을 보고 쓰다

by 서애라

봉준호 감독 <미키17> 관람 후기


* 관람일 : 25년 3월 1일

* 요점: 현실 유비의 농도 짙은 블랙 유머가 담긴 잘 만든 SF 영화이다. 영화적 SF 특유의 현란한 영상미가 아니라 SF적인 스토리텔링에 더 초점을 맞추었다. 봉준호와 SF의 현실비판적 주제의식은 잘 맞는 한 쌍이다. 단, 이 영화의 관람등급은 함정이므로 유의할 것. 15세에게 보여주기에는 폭력, 약물, 선정의 요소가 두루 포진해 있다. 세상의 매운맛을 이미 아는 어른이라면 관람을 추천한다.




원작인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7>을 재미있게 읽어던 터라 봉준호 감독의 <미키17>이 개봉하기만을 기다렸다. 봉준호는 이전에도 <설국열차>를 SF 작가 김보영의 감수를 받아가며 만든 적이 있었고, 그런 봉준호라면 메탈릭한 느낌과 알록달록한 빛들, 광선이 날아다니며 구현하는 SF가 아니라 '스토리'로서 충실한 SF를 만들어 주리라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지역 CGV에서 <미키17>이 상영하자마자 관람했다. 결과는 “역시 봉준호”였다. “역시 봉준호”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함의가 있는데, 네임 밸류에 맞는 재미와 완성도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고 봉준호 특유의 감수성과 주제 의식이 확연히 드러났다는 뜻이기도 하다. 봉준호 영화는 블랙유머 색채가 짙고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서 우울감이 밀려오는 특징이 있다. 이 영화도 그랬다.


영화관을 나서니 날이 잔뜩 흐려져 있었다. 비가 한두 방울 떨어지는 듯했다. 영화관까지 가는 동안에도 아슬아슬하게 날이 흐려지고 있었지만,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에 더욱 흐려져 비가 듣기 시작한 것이다. 점퍼의 후드로 머리를 덮고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걷는 동안 우울은 슬픔이 되었다.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며 서 있을 때 퀵배달부가 오토바이를 슬금슬금 이동시켜 교차로의 거의 중앙까지 진출하고 있었는데, 그 모습마저 안쓰러워 보였다. 저렇게 3~4미터씩 앞으로 밀어서 얼마나 빨리 가시는 걸까?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들여 돈으로 바꾸어야 하는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들인가? 현실 세계는 영화의 세계관과 연결되어 있었다. 알레고리와 유비(아날로지), 메타포. 잘 만든 SF에는 항상 존재하는 요소들이다.


사실 그런 요소들은 원작에 이미 상당 부분 존재했다. 이 스토리가 영화화될 수 있었던 결정적 요소 역시 그러한 현실 유비적 알레고리였을 것이다. 예전에 한 국내의 하드SF 전문 작가분과 애슈턴의 원작 소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는데, 그 분은 <미키7> 스토리의 가치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토리가 어째서 현실을 유비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그 필요성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분은 SF가 자연과학의 법칙을 충실히 구현하기만 하면 하드 SF가 된다고 믿고 계셨다. 안타깝지만 그 분은 문학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셈이었다. 그런 상태로는 문학계의 고급 독자들에게 인정받기 힘들 것이다.


어쨌든 이야기(스토리)란 우리의 ‘지금/여기’를 불러내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이야기에 끝에서 공허함을 느낀다. 대체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소비했는가? 단순히 자연과학적 지식이나 세계관 짜맞추기 퍼즐 놀이를 하려고? (공학자나 자연과학자가 아닌 대중에게 외면 받는 이야기를 써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써도 된다. 아마 내가 만난 그 분도 그런 심정으로 쓰고 계실 것이다.)


애슈턴이 만든 세계관 속에 녹아 있던 ‘지금/여기’의 경제적 불평등, 노동 시장의 잔혹함을 봉준호는 더 짙은 색채로 가공했다. 애슈턴이 역사 서술 형태를 빌려와 구상한 가상의 행성 시나리오들은 삭제되고 미키의 행적 주변으로 이야기는 압축되었다. 단지 ‘멀티플’의 금지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한 부분만이 액자식으로 삽입되어 있을 뿐이다. 삽입된 이야기 역시 박진감과 속도감이 있고 화면으로 느끼는 쾌감을 위해 잘 가공되어 있었다. 애슈턴의 것이 SF 특유의 두뇌 게임(설정의 확장)에 가까웠다면 봉준호의 것은 그보다 미스터리 스릴러에 가깝다. (원작도 액자 밖은 스릴러 플롯을 지니고 있다.)


인물들 역시 성격적 특성이 극대화되었다. 영상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만큼 인물들의 역할이나 임무, 성별, 종교적 신념보다 한눈에 느껴지는 퍼스널리티(개성 및 인격)에 많은 공을 들였다. 특히 악역인 케네스 마샬(마크 러팔로)과 일파 마샬(토니 콜레트)의 캐릭터는 과장되고 우스꽝스러운 요소를 잔뜩 넣어 부풀렸다. 소설이였다면 유치하게 변해버렸을 요소들도 봉준호의 영상에서는 미려한 블랙 유머로 기능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미키의 연인인 ‘나샤(나오미 애키)’의 캐릭터와 ‘크리퍼’이다. ‘나샤’는 <미키7>에서 그다지 인상적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러나 <미키17>에서는 스토리 구성에 핵심적인 기능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이 시대의 이야기가 요구하는 여성상에 완벽하게 부합했다.



(주의! 지금부터는 스포일러의 요소가 있습니다.)


나는 나샤가 <퓨리오사: 매드맥스 사가>에서처럼 전사로서의 정체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서 좋았다. <매드맥스: 분노의 도로>의 퓨리오사에게서도 전사 외의 다른 면은 찾을 수 없었지만, 샤를리즈 테론이 연기한 퓨리오사에게서는 ‘흔들림’이 있었다. 인간적 고뇌와 헛점들, 고민들, 자기 결정에 대한 책임감에 눌리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엄밀히 따지면 그건 스토리가 아니라 연기로 구현한 것이었으므로 <퓨리오사> 개봉 때 염려가 많았다. 그리고 그 염려가 스크린에 거의 실현된 것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


그에 비해 ‘나샤’는 훨씬 입체적이고 다채로운 인물이었다. 미키의 연인으로, 전사로, 사랑과 분노를 한 몸에 지니고 있는 ‘진짜 여성’에 가까웠다.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약간 얼빠진 듯하고 허약한 미키를 보완하는 역할이 또 다른 미키인지 나샤인지를 고민하게 만들어서 재미있었다. 영화를 본 분과 이 토픽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 정도였다.


각색 과정에서 봉준호가 자기 색채를 입힌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크리퍼’에 있었다. 원작의 생명체와 많은 부분이 각색된 이 생명체는 ‘평화주의’와 ‘지구의 자연’에 대한 알레고리 그 자체였다. 크리퍼는 공격력이 거의 없고(물론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부분은 너무 스포일러 농도가 짙으므로 쓰지 않겠다.) 방어력만 잔뜩 있는 존재인데다가 ‘마마’ 크리퍼를 중심으로 거대한 집단을 구성한다. 인간의 침공에 속수무책인 듯 보여도 사실은 기후 변화라는 느린 보복을 수행 중인 가이아 지구를 연상시켰다.


게다가 크리퍼가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는 유일한 무기는 상당히 피식 웃음거리인데, 결말까지 보고 나면 <어린왕자>에 나오는 장미의 대사가 떠올랐다. 자신에게는 가시가 있다는 장미의 말과 같은 내용을 한껏 블랙유머를 넣어 하드보일드하게 가공한 느낌이랄까.


크리퍼의 외양은 "똥물에 튀긴 크루아상"(영화 속 대사)처럼 생겼다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곰벌레(물곰)와 매머드의 합성처럼 보였다. 움직임은 성체는 코끼리, 유체는 강아지를 연상시켰다.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유체는 벌레스러운 외양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귀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이 느낌은 스토리 전개상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다. 아마 그 느낌이 없었다면 영화의 후반부 스토리는 관객 설득에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미키의 오랜 친구 티모(스티븐 연)의 캐릭터도 더욱 입체적으로 가공되어 있었다. 원작에서 가장 얄미운 인물은 사령관이라기보다는 절친인 베르토였는데, 그 얄미운 특성을 잘 살리면서도 티모는 약간 다르다. 영화는 그 역시 미키와 다를 바 없는 경제적 계급이라는 점을 주지시킨다. 스티븐 연은 인물의 그러한 양면성을 완벽하게 소화했다.


양면성과 입체성에 대해서라면 주인공 미키 반스를 빼놓을 수 없다. 영화는 원작의 미키를 어리버리한 하층민, 육체 노동자 계급의 인물로 해석해 현실을 연상시킬 수 있도록 구현했다. 순하고 순진한 비지식인 저소득 계급의 미키 반스는 가슴을 후벼팔 정도로 '지금/이곳'을 연상시켰다. 주변에서 흔히 보이던 착한(고용주는 '착실하다'고 표현하는) 노동자들이 겹쳐 보였다. 저렇게 어리버리하고 순한 맛인 사람이 어떻게 스토리를 박진감 있게 끌고 갈 수 있을지 걱정될 정도였다. 성격 특성에 반하는 행동을 하면 관객 설득에 실패하고, 자기 성격을 극복하지 못하면 스토리텔링에 실패한다. 그러한 딜레마를 해결해 주는 것이 소설 <미키7>의 핵심 설정이자 영화 <미키17>의 핵심 설정이다. 미키는 한 사람이지만 여러 사람일 수 있고, 동시에 두 가지 인물 유형이 될 수 있다. 스토리를 공부한 사람으로 그 부분이 매우 흥미로웠다. 쾌감을 느끼는 스토리 구조와 그런 스토리 법칙에서는 품을 수 없는 색다른 인물 유형을 결합시키기 위해 SF 요소를 차용할 수 있다. SF 설정이 두 요소를 맞물리게 하는 접합부로 기능했다.


영화관을 나오며 느꼈던 우울을 상쇄시켰던 것은 결말부에서 날아오르던 미키의 모습이었다. 두 미키 중에 어떤 미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게 스포일러라서 말하지 않는 게 아니라 중요치 않아서 말하지 않겠다.

미키는 쓰이고 버려진다. 이용 당하고 죽고 다시 태어난다. 그렇지만 그가 마냥 당하는 것만은 아니다. 반복되는 착취 속에서 미키의 속에는 ‘분노’가 새록새록 자라나 차곡차곡 누적 저장된다. 그래서 미키는 결국 날아오른다. 칼을 든 채로.


현실의 울분을 달래주기 위해 영화가 존재하고 있다. 25년 3월에는 <미키17>이 존재했다. 머나먼 곳의 이야기를 빌려와 ‘지금/여기’를 이야기해 주려고. 당신의 슬픔과 분노를 달래주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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