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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J Dec 13. 2020

다시 태어나는 법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사전적인 의미의 '재탄생'이라면 현대 과학기술로는 당연히 불가능하겠지만,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다른 사람이 되는 개념'의 재탄생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배신과 그에 대한 극복의 고통스러운 과정을 통해서 말이다.


뜬금없는 이 생각은 일요일 저녁 어느 '보수 크리에이터'의 영상으로 인해 발화되었다. 평소 다른 정치성향으로 인해 불호하는 자였지만, 내용 자체가 흥미로운 까닭에 멍하니 봤던 20분가량의 영상이 일주일 내내 가치 쳐가며 내 뇌리에 남았다니 역시 일요일 저녁은 참 묘한 순간이다.


그 영상의 핵심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2000년대 중반 20대 후반의 그는 주호민, 이말년 등 1세대 웹툰 작가들과 함께 한 크루에 속해 있었다고 한다. 당시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던 웹툰이라는 장르를 개척한 사람들이라는 동료애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같은 일을 하는데서 나오는 공감과 유대로 뭉친 그 크루는 웹툰 활동뿐 아니라 사적으로도 굉장히 친한 단체로 성장해 나갔다고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크루원들이 '가족처럼'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그가 그렇게 소속감과 애정을 느끼며 활동하던 그의 크루 활동은 한 사건을 발단으로 이변을 맞이한다. 바로 '천안함 피격 사건'이었다. 대부분 좌파 성향을 갖고 있던 크루원들은 그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 따라 사건에 대한 정부의 해명을 쉽사리 믿지 못했다. 그리고 의심이란 땅엔 음모론이라는 꽃이 피기 마련이라 크루원들 대부분은 천안함에 대한 여러 음모론들을 믿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뚜렷한 정치성향이 없던 그는 그런 음모론을 믿을 수 없었고, 그런 생각을 친한 크루들에게 털어놓기 시작하자 그 순간부터 조금씩 크루에서 걷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저녁, 크루원들 중에서도 가장 친한 두 명의 웹툰 작가들과 함께한 저녁식사에서 그는 인생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네가 우리 크루에서 나가주었으면 좋겠어'라는 말을.


그리고 이 사건은 그의 인생의 궤적을 완전히 바꿔놓는다. 

정치에 큰 관심 없던 웹툰 작가에서 보수의 대표적 스피커가 된 것이다.


이 사건이 왜 그를 보수 정치에 집착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게 했는지는 어렵지 않게 유추 가능하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배신당한 순간, 살아내기 위해서 배신감과 분노가 나에게 쏟아지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으리라. 그렇게 그는 관계의 수많은 양태와 이유들을 모두 진보와 보수라는 정치 논리로 나누어 취사선택했고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반복되며 생겨난 자기 확신과 신념은 그를 '잘못된 이념의 순교자', '보수의 투사'로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비록 내가 그와 다른 정치성향을 갖고 있고 평소 그를 좋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이야기에 대해서는 그를 비웃고 조롱할 수 없었다.


한때 사랑했던 이들에 대한 절절한 배신감을 이야기하는 그의 표정은 너무나도 아팠을 뿐 아니라 우리가 살다 보면 수도 없이 맞이하게 되는 배신과 상처에 대한 흔하지만 슬픈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배신과 배신감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때로 내가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할 때 항상 나는 산타페의 풍경을 형형색색의 색으로 담은 조지아 오키프의 그림을 떠올린다. 배신감을 극복하는 옳은 방법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있다면 그건 조지아 오키프의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조지아 오키프는 20세기 미국의 대표 화가이다. 추상 환상주의 화가로 유명한 그녀는 자연의 풍경을 내면화해 환상적으로 표현한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유럽의 미술사조와 대비되는 미국만의 대표적 화풍을 개발해낸 대표적 화가로 꼽힌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비루한 배신의 이야기는 존재한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운이 좋게도 부농의 딸로 태어난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씩 미술과외를 받을 만큼 충분히 풍족했고 결국 고등학교 졸업 후 시카고 예술대에 진학해 화가의 길을 걷는다. 하지만 화가로서 주류 미술계에서 빛을 보진 못했고 마침 기울어가는 가세로 인해 그녀는 전문 화가의 길을 포기하고 미술교사의 길을 걷게 된다.


하지만 인생은 얄궂게도 그녀를 내버려 두지 않는다. 친구에게 선물한 그녀의 그림이 우연한 계기로 미국의 대표적 사진가이자 미국 미술계의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291화랑'의 경영자인 스타글리츠에게 넘어가게 되고, 그녀의 그림에 강렬한 인상을 받은 그는 그녀를 뉴욕으로 부르게 되고 곧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는 그는 이미 결혼을 한 유부남이자 그녀보다 20살이 넘게 많았다는 점이었다. 곧 사람들은 그녀를 출세를 위해 유부남을 꼬신 악녀의 이미지로 가두기 시작했고, 스타글리츠 또한 그녀와 사랑을 나누며 찍은 그녀의 초상과 누드 사진들을 통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 이런 시선을 가속화시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키프는 그의 곁을 지킨다. 세간의 끔찍한 평판보다 그와의 사랑이 그녀에겐 더 소중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녀를 배신한다. 6년간의 연애 후 혼인신고를 하지만, 3년 후 스타글리츠가 오키프보다 18살이나 어린 정부와 바람을 피기 시작한 것이다.


이 배신의 영향은 엄청났다. 그녀는 우울증에 빠졌고, 병을 얻었다. 하지만 그 절망의 끝에서 떠난 뉴멕시코 여행에서 그녀는 또 다른 희망을 보게 된다. 끝도 없는 사막, 메마른 사구, 그리고 내리쬐는 흰색의 강렬한 햇빛에서 어떠한 예술적 계시를 받은 그녀는 평생을 산타페에 정착하게 된다.


황무지 한가운데 흙으로 지은 작은 움막 안에서 기거하며, 명상과 미술만을 반복하는 절제된 생활이 계속되자 묘한 현상이 일어난다. 뉴욕 한가운데의 루머와 화제에서 벗어나자 그녀의 그림이 오롯이 인정받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의 명성은 산타페의 햇빛처럼 끝없이 퍼져나갔고 98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그 명성은 바래지지 않았다. 그리고 과거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색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폄훼받던 그녀의 흰 꽃 그림은 2014년 소더비 경매에서 500억이 넘는 가격에 낙찰된다.



이처럼 배신과 배신감이 밀려올 때 대응하는 방식은 개개인마다 모두 다르다. '모 보수 크리에이터'처럼 배신감과 분노 속에서 자신을 피해자로, 자신을 배신한 모든 사람을 가해자로 설정해 관계의 비루함 속에서 자신을 구제해내는 사람도 있는 반면, 조지아 오키프처럼 배신과 분노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혼자의 길을 끊임없이 걸어 결국 스스로를 구원하는 사람도 있다.


누구나 후자의 방법이 이상적이란 건 알지만 그게 '나의 일'이 되었을 때 조지아 오키프의 길을 따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순결한 피해자의 위치에 안분지족 하며 나를 배신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양분 삼아 살아내는 소시민적 삶이, 물론 위대하지는 않겠지만 나와 같아서 아프고 서글퍼지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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