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열리는 새벽 Dec 12. 2020

양복바지 속 두꺼운 내복

면접을 봤습니다



면접을 봤다.

결과는 아직 모르지만,
면접을 마친 후 의자를 제자리에 밀어 넣고,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밀고 나오면서 ‘여기에서 일하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난번 면접보다 훨씬 더 체계적이었고 무엇보다 두루뭉술함이 없어 그것이 가장 좋았다.

입사하게 되면 내가 할 일은 언론 지원 쪽이 될 것 같다. 대응이라고 해야 맞을까? 아무튼 언론을 컨트롤해야 하는 건데, 70여 명이나 이력서를 내고 면접을 보고 있다니 쉽게 합격할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게 정신건강에 좋겠다.

그러면서도 사실은 보도자료 폼에 대해 생각하고, 알고 지내는 일간지 기자들에게 안부 문자 정도는 넣어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맞다, 나는 좀 앞서가는 스타일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나는 면접관들에게 밝게 웃는 것으로 나를 어필한 것도 같다. 본능적인 일,이었다고 자위한다.

나는 지역신문사를 9년 간 운영하며 대표 자격으로 참 많은 경험을 했다. 오늘 내 입장과는 반대로 누군가를 ‘검증’ 하는 일도 했었는데, 다른 일들이 일회성인 것에 반해 면접관 일은 연속으로 네 번이나 했다. 신문사를 접을 때 아쉬웠던 일 중의 하나는 그것이었다. 마음을 다 해 면접자와 눈을 맞추는 일, 그것을 (내가) 할 수 없게 된 것이 못내 아쉬웠다.

A 공공기관에서는 가가호호 방문하는 공공일자리 개념의 계약직 일자리에 주민들을 채용하기 위해 나를 비롯한 세 사람을 면접관으로 호출했다. 나를 제외한 두 사람은 기관의 특수성에 맞는 전문적인 질문을, 나는 일에 대한 자질이나 인성 체력 같은 것을 살피는, 가령 “B 동네 빌라들은 거의 엘리베이터가 없는데 5-6층을 오르내리시기 힘드시진 않으시겠어요?”라던가 “뭘 할 때 기분이 좋아지세요?”라는 질문을 하는 쪽이었다.  

2월 추운 때에 치러진 그 면접에는 100여 명의 사람이 몰렸다. 첫 해 면접에서 담당자는 “서류 심사에서 이미 2/3가 탈락했을 정도로 지원자가 많은 인기 좋은 일”이라고 귀띔했다. 진짜였다. 세 사람을 한꺼번에 인터뷰하는데도 3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내가 앉은자리는 따뜻했다.
테이블 위에는 모두 새것인 빨강 파랑 검정의 플러스펜과 연필, 지우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옆으로 음료와 과자, 초콜릿, 겨울 과일들이 담긴 일회용 접시가 있었다. 그것들을 맛보는 여유는 3년 차 정도에 생긴 것 같다.

앞에 앉은 이들은 달랐다.
모두가 절실했다. 그래서인지 다들 춥게 느껴졌다. 외투에 수험표를 단 그들은 최대한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걸었다. 자리에 앉아서는 흔들리는 눈으로 우리들을 바라봤다.
벗어두었던 외투를 다시 걸치고 책상에 배를 바싹 붙이고 허리를 세웠다.

내 앞에 앉은 내 이웃들이 긴장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40-60대인 그들은 출산과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 명예퇴직과 같은 이유들로 본래 그들이 잘했던, 잘할 수 있는 일이 아닌 낯선 일 앞에 섰다.

“왜 이 일을 하시려고 하냐”는 질문에 대부분 “절실하다”고 했다. “돈을 벌어야 한다”고 대놓고 말하는 이들도 서너 명 있었다. 그러면 나는 이름 옆에 한 붓 그리기로 별을 새겼다.

청일점이다시피 한 한 60대 후반의 노신사는 집 다림질이 짐작되는 양복 차림이었다. 점잖으신 분이란 걸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역시나, 정중하게 인사하셨다. 나도 책상에 머리가 닿게 인사했다. 고개를 들다가 자리에 앉은 그의 신발을 봤다. 연식이 된 구두에서 빛이 났다. 그리고 올라간 양복바지와 양말 사이에서 두께가 느껴지는 내복을 봤다.

나는 그때,
한 사람의 인생에 대한 정성과 예의를 봤다.

나는 그가 예전에 무슨 일을 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가 왜 이런 공공일자리 일을 하고자 하는지 묻지 않았다. 평소 산책은 많이 하시는지, 건강은 어떠신지,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은 없으신지 정도를 물었던 것 같다. 그 노신사 이후 모든 면접자에게 “추운 날 면접에 와주셔서 고맙다”고 인사했다.

나는 오늘 내 인생에 정성과 예의를 다했다.
예쁘게 화장하고, 좋은 옷을 꺼내 입었다. 향수도 살짝 뿌렸다. 면접 가는 길, 초록색 창에 업체명을 넣어 검색도 해봤다.

무엇보다 나는 오늘 솔직했다.
왜 신문사 운영을 관뒀냔 질문에 “광고영업을 잘하지 못해 회사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나는 기자 일은 잘하는데, 경영은 기자 일 만큼 잘하지 못한 것 같다”고도했다.
앞에 앉은 면접관이 내 이야기를 듣고 활짝 웃으면서 “새벽 씨는 나를 일찍 만났어야 했다”고 하길래 “전화를 하도 안 주셔서”하고 농을 받아치기도 했다.

언젠가 내 엄마는 그랬다.
죽는 순간까지 모르는 거라고. 의정부에 살 때 미군과 친하다는 이유 하나로 양갈보라고 손가락질받던 동창은 부잣집 사모님이 되기도 했고, 그렇게 잘 나가던 누구네 집 둘째 딸은 딸 아들이 다 미국에 가 독거노인으로 20년째 혼자 산다고. 그래도 또 모르는 거라고 아직 죽지 않았으니 언제든 판은 바뀌고 선은 누구든 쥘 수 있는 거라고.

면접 결과는 다음 주 중에 발표된다.

나는 절실한 사람의 이름 옆에는 별표가 그려진다는 것을 경험해봐서 안다. 하지만 오늘의 내 면접은 능력치를 따져 하나에서 다섯 개까지의 별을 받는 자리. 내 이름 옆에 몇 개의 별이 그려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오늘만큼은 아니 오늘의 날까지 나는 절실하게 살고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에 스스로 속이 꽉 찬 별 다섯개를 주고 싶다.

2020년 12월 12일로 
열리는 새벽에,
열리는 새벽


표지 사진은 최경선



작가의 이전글 당신이 떠났다. 내게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