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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롭게 초연하게

러시아 미팅, 나도 한 기 하거든

러시아의 굵직한 기업들은 푸틴의 학연 지연에 얽힌 사람들이 이끌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나는 무기와 에너지 산업을 주도하고 있는 대기업들의 모스크바에 본사 디자인에 여러 번 참여하였는데 그 기업의 체어맨들을 소개받을 때마다 마다 푸틴의 누구라는 그와의 관계가 소계의 한 파트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많이 화두 되는 푸틴을 떠올리면 상남자, 강한 남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리고 내가 만난 모스크바의 모든 남성들이 바로 그랬다.  그리고 어느 정도의 남성 우월주의 마저 느껴지는 러시아 남자들..


 

억센 말투나 근육질의 몸집에서 오는 힘센 남자의 이미지도 있겠지만 나라 자체에서 오는 문화적 마초이즘을 나는 여러 번 느꼈다.  회의실에 들어오는 남자들은 100 % 남자였으며 이메일이나 전화 통화 중 느껴지는 그들의 생각이나 방식에서 남성을 우월한 존재로, 우선순위로 둔다는 느낌을 받았다. 남녀 차이를 배제하고 동일 선상에서 대하는 게 일반적인 우리 사회의 방향인 반면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몇십 명이 몇 달에 걸쳐 매진한 프로젝트를 발표하러 모스크바에 간 적이 있다. 철갑 차를 연상케 하는 KGB 무기고 같은 사옥 디자인들 들고 드디어 그 결실을 맺으려 모스크바에 다다랐다. 동행하는 6명 중 유일한 홍일점이었던 난 인테리어팀 책임자로서 비장한 각오로 냉기가 흐르는 회색빛 미팅룸에 들어섰는데 난 내 눈을 믿을 수 없었다.  매우 고급스럽고 프로페셔널한 회의실 한편에 복싱 펀치 연습을 하는 마네킹이 떡 하니 서있었기 때문이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미팅 시작 전 나누는 인사 속 나를 비서나 조수 정도로  보았는지 악수를 건너뛰는 것이다.  아 이게 바로 성차별인가? 아니면 인종차별? 연령차별?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순간 몸이 얼어붙었다.  



그 순간 나를 데리고 간 파트너의 조언이 떠올랐다. "YJ, 무슨 일이 있어도 그냥 이쁘게 웃어야 해, 어차피 YJ의 노력과 수고는 우리들이 아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그냥 예쁘게 앉아서 웃어요."

난 이 말이 별로 듣기 좋진 않았다.  이쁜 외모로 방실방실 웃기만 하면 된 가는 건가?

그제야 이런 상황을 미리 예감한 그의 선견지명이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나를 무시했다는 기분이 매우 불쾌했지만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아야 함 했다. 불같은 성격에 왈가닥이었던 나지만 수백억 달라가 걸려 있는 프로젝트를 물거품 같이 날려 보낼 순 없으니까.



미팅이 시작되었고 나는 인테리어 대표로 프레젠테이션을  시작하였다.  험상궂은 얼굴들이었지만 난 그 기에 눌리지 않으려 보란 듯이 더 초연한 자세로 발표를 이어갔다.  우리 팀원들의 영혼이 담긴 결과물이었고 나는 자신 있었기에 성공적인 발표를 마칠 수 있었다.  미팅 후 방을 나서면은 처음과는 반대로 회장단은 나에게 프레젠테이션이 인상 깊었다며 매우 강한 악수로 호의를 표현하며 화기 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회의실을 나왔다.



호텔 도착 후 회사 파트너에게 온 메일에는 성공적인 모스크바 미팅이 축하한다는 메시지가 쓰여 있었다.  그쪽에서 다음 미팅부터는 꼭 나를 참여시켜 달라고 했다나?  나는 가장 비싼 캐비아와 샴페인을 주문하고는 나를 위해 축배를 들었다. 외국에서 오랜 기간 일을 하면서 여러 문화에서 오는 선입견과 차별에서 자유로워질 순 없다. 하지만 거기에 좌절하지 말고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는 거,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화를 참고 그 불공평함에 억울하기보다 초연하게 대처하는 것, 내 마음의 여유를 보여주며 내 갈길을 가는 게 대인배의 길이라는 걸 느낀 일화이다.



만약 내가 악수받지 못했을 때 그 무시 감에 당황하거나 덜컥 화를 냈으면 어땠을까? 숨을 가다듬고 여유롭게 초연하게 담대하게 일을 마쳤기에 그 순간은 몇 배 더 큰 승리감으로 돌변할 수 있었다. 중정심을 잃고 세게 나오는 것보다 부드러운 초연함의 중요성을 느꼈다. 

초연함이란 팍팍한 현실에 아랑곳하지 않는 의젓함이라고 한다. 내면에서 차오르는 초연함을 연마하기 위해 외부에서 맞이하는 예측할 수 없는 상황들 속 수준 높은 의식과 결심을 필요로 한다

보편적인 반응을 뛰어넘는 성품과  그릇을 갖기 위해 오늘도 부단히 노력해야 할 듯하다.

모스크바 미팅 이후 나는 복싱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때 그 파란 눈의 KGB 에이젼트 같은 클라이언트들을 생각하며 퇴근 후 휘날리는 펀치, 땀을 흘리고 나면 그때 내 머릿속 그 험악한 얼굴들은 사라지고 귀여운 펀칭 마네킹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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