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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상혁 Jan 06. 2023

페롱이 오페르트 도굴을 사주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


1. 오페르트가 조선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오페르트는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상인으로 19 세에 이미 홍콩으로 건너와 장사를 하고 있었다. 아시아 사정에 밝았던 그는 중국 상인들로부터 조선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그가 작성한 조선기행에 따르면 그는 조선과의 무역에 큰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동아시아 유일의 미개방국인 조선을 개항시키고 처음으로 무역을 열면 큰 돈을 벌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1866년 3월 영국 상인 제임스 휘톨의 도움을 받아 상선 로나호를 빌려 조선을 방문한다. 상하이를 출발한 로나호는 3월 27일 조선 해안에 도착하였고, 28일 충청도 해미현 조금진에 정박한다. 이때 평신첨사 김영준과 해미현감 김응집이 문정을 시도하자, 오페르트는 조선과의  통상을 요구하였다. 당연히도 문정관들은 이를 거절하였고 오페르트는 잠시 배를 빌려 조선으로 온 것이었기 때문에 곧 조선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페르트가 조선과의 통상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오페르트는 약 250톤의 외륜기선 엠페러를 구매한 후 무장을 갖추고 다시 조선으로 향한다. 7월 31일에 상하이를 출항한 페러호는  8월 6일 해미현 조금진에 도착하였다. 오페르트는 해미현감 김응집에게 서한을 보내 다시금 통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조선은 통상 불가 방침을 통보하였다. 이때 오페르트는 리델 신부로부터 구조를 요청하는 서한을 받는다. 당시 리델 신부는 병인박해를 피해 숨어 있던 상황이었다. 오페르트는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를 구출해서 길 안내를 받으려 했지만, 그들이 약속한 날짜에 오지 않아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11일에 북상을 시작한다.

    북상을 시작한 페러호는 20일에 강화도 월곶진까지 이르렀다. 오페르트는 이곳에서도 조선의 지방관에게 통상을 요구했지만, 조선은 청과 협의해야 한다는 구실로 이를 거절하였다. 교섭에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석탄마저 바닥나자 오페르트는 결국 철수를 결정한다. 이렇게 두 번째 항해도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게 된다.


2.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의 도굴을 결심한 이유는?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결심한 이유는 페롱 신부와 조선인 신자들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페롱 신부는 병인박해 시기에 조선을 탈출해 청으로 와 있었다. 탈출 이후에도 조선으로 돌아갈 것을 희망했던 그는 주청 프랑스 공사 랄르망의 외교 교섭과 함께 탈출했던 칼레 신부의 조선 입국로 개척 사업에 기대를 걸었었다. 하지만 청에 중재를 요청한 주청 프랑스 공사 랄르망의 외교 교섭은 성과가 없었고, 칼레 신부의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때마침 상하이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 때문에 미국 군함이 조선으로 출병할 것이라는 소문이 퍼진다. 이 소식을 들은 페롱 신부는 미국 군함에 통역관으로 동승하여 다시 조선으로 들어갈 계획을 세운다. 이미 그는 미국영사관의 통역관 젠킨스와도 교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페롱 신부의 계획은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고, 그는 다른 방법을 찾기 시작한다. 새로운 계획을 모색하던 그에게 도움을 준 인물들은 조선을 탈출해 청으로 와 있던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최선일을 비롯한 천주교도들이 페롱에게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 도굴을 제안한 것이었다. 남연군 묘 도굴이 대원군과의 교섭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다고 판단한 페롱 신부는 이를 받아들였고 곧바로 오페르트에게 남연군 묘 도굴을 제안한다. 당시 페롱 신부는 남연군의 유해를 약탈하는 것이 조선에 문호개방과 신앙의 자유를 가져오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설득했다고 한다. 오페르트 역시 이 제안을 수락하였고 조선으로 출항할 준비를 시작한다.


3. 남연군 묘 도굴이 실패한 이유는?

    오페르트는 이 계획을 위해 68톤의 증기선 차이나호를 빌리고 서양인 8명, 말레이시아인 20명, 중국인 100명을 고용한다. 페롱 신부 및 조선인 최선일이 통역 겸 길잡이를 맡았으며, 상하이 주재 미국 영사관의 통역관 젠킨스도 동승했다. 4월 30일(양력) 출항한 이들은 도중에 나가사키에 들려 화승총 10 상자를 구매하였다.

    차이나호는 5월 8일 서해안의 남양만으로 들어왔고 10일에는 충청도 홍주군 행담도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작은 기선으로 갈아타고 삽교천을 거슬러 올라가 덕산군 구만포로 상륙했다. 이때가 오전 11시경이었다. 오페르트 일행은 최선일의 아우 최성일과 교인 김여강의 안내를 받아 오후 5시 30분경 남연군 묘에 도착했다.  예상보다 늦어진 시간이었다. 이들은 5시간에 걸쳐 묘의 봉분을 파헤치기 시작했지만 곧 난관에 부딪쳤다. 봉분 안쪽이 단단한 석회로 덮여 있었던 것이었다. 이는 조선 양반들이 묘를 조성할 때 쓰는 일반적인 방법이었지만 오페르트는 이를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별다른 장비가 없었던 오페르트 일행은 결국 도굴을 포기하고 간조 시간이 오기 전에 철수를 단행한다. 오페르트 일행은 5월 11일 6시경 작은 배로 돌아왔고, 다시 삽교천을 타고 내려가 12일 행담도에서 차이나호로 옮겨 타고 남양만을 떠나갔다.

    하지만 바로 중국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그는 다시 한번 조선과 교섭할 생각을 가지고 북상하여 5월 13일 영종진 앞바다에 도착한다. 영종첨사가 내항한 이유를 묻자, 오페르트는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내용의 서한을 대원군에게 전달한다. 이 서한에는 도굴 사건이 전적으로 서양인을 살해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는 내용과 4일 안에 사신을 보내 교섭을 하자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당연히도 대원군은 답서를 보내 오페르트의 제안을 거절한다. 답서에는 조선은 서양의 침략을 충분히 방어할 수 있고 앞으로는 표류한 서양 선박에 대해 우호적으로 대하지 않겠다는 대원군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오페르트는 답서가 오기도 전에 수십 명의 선원과 함께 상륙해서 영종진 입성을 시도하였다. 이때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고 필리핀 선원 2명이 사망하자, 그는 차이나호로 돌아가 상하이로 떠나갔다.


4. 오페르트 도굴 사건 당시 조선과의 교전은 있었는가?

    조선과 오페르트 일행의 기록이 서로 달라 이는 확인할 수 없다. 관찰사 민치상의 장계에는 오페르트 일행이 덕산군 관아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다는 내용과, 이들이 남연군 묘로 향할 때 덕산군수 이종신 등이 이를 저지했지만 화력의 차이로 실패했다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오페르트의 증언과 젠킨스를 대상으로 열었던 미국의 영사 재판 기록에는 해당 내용이 없다. 다만 이들이 남연군의 묘로 직행할 때 조선 군병들이 저지했으나 간단한 위협사격만으로 이들을 물리쳤다는 기록만이 있을 뿐이다.

    양측 모두 거짓을 이야기할 개연성은 충분하기에 누가 사실에 가까운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다만 정식 군인도 아닌 중국인 잡부 등을 동원해 빠르게 이동하던 그들이 굳이 덕산군 관아를 습격할 이유가 있었는지는 의문이 든다. 애초 이들의 목적도 약탈이 아닌 남연군 묘 도굴이었기 때문에 덕산군 관아 습격은 그 이유가 충분치 않다. 또한 구만포 상륙 후 남연군묘까지의 이동 시간과, 철수 시의 이동 시간이 거의 비슷하다는 점도 관아 습격이 없었다는 점을 뒷받침한다. 관아를 습격하고 묘에 도착한 시간과 철수만 했던 시간이 동일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5. 내포의 천주교도들이 탄압받은 이유는?

    조선 정부는 도굴 사건의 원인 중 하나가 국내 천주교인들이 서양인들을 유인하는데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국내 천주교도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명령한다. 그 결과 도굴 사건이 일어난 1868년 5월부터 약 5개월간 231명의 천주교도가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특히 오페르트가 내항했던 내포 일대의 해미와 공주 지역에서는 수십여 명의 천주교 신자들이 생매장을 당하거나 대들보형을 받는 등 철저하고 극단적인 탄압을 당하였다.

    또 조선 정부는 청에 자문을 보내 이 사건을 알리고 청으로 도망간 천주교도들의 송환을 요청하였다. 이에 청은 천주교도들의 체포 명령을 내림과 동시에 서양 각국 공사관에 공문을 보내 사건의 처리를 요구하였다. 미국의 경우 이 요청을 받아들여 자국민인 젠킨스에 대한 영사 재판을 열었지만, 젠킨스가 자신은 도굴 계획을 몰랐다고 항변하여 결국 무죄로 풀려나게 된다.


※ 참고문헌 

 「덕산 사건과 프랑스 선교사 페롱」, 조현범, 2017 

 「오페르트의 덕산굴총사건과 내포 일대의 천주교 박해」, 원재연, 2000

 『흥선대원군 평전』, 김종학, 2021 

 「오페르트의 조선 인식」, 노혜경, 2014 

 「1868년 ‘남연군묘 도굴사건’과 조선 신자」, 방상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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