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쓰기를 위한 사전 준비인 자판필사를 한 지 2주일이 지났다. 이제 새벽에 눈을 떠서 졸린 눈을 비비며 책의 긴 길을 베껴 내려쓰는 자판필사의 시간은 익숙해졌다. 필사는 보통 30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머릿속에 두서없이 마구 튀어 오르는 날것의 생각들을 나만의 정제된 문장, 글의 형태로 표현하는 과정은 책의 문장을 그대로 베끼는 일보다 더 어렵다. 필사속도에 맞추어 내 생각이 쭉쭉 펼쳐질 때는 감상문이 잘 써지지만 그렇지 못한 날에는 한참을 빈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도 있다. 나의 글을 쓴 다는 것은 500자 전후의 짧은 감상문을 쓸 때도 쉽지는 않다.
세상에는 글을 쓰는 방법도 많고 글쓰기를 배울 수 있는 루트도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글쓰기 강의를 위해 유료강의를 듣기도 하며, 내가 몇 달 동안 그랬듯 자신만의 글을 매일 쓰는 사람도 있다. 어떤 방식이든 글쓰기 실력을 올릴 수 있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으면 된다. 나는 책 쓰기를 위한 글쓰기 준비를 하는 요즘, 글 쓰는 요령을 익히기 위한 여러 방법 중에 자판필사와 매일 글쓰기를 병행하고 있다. 공저책 쓰기 지도를 해주시는 멘토작가님의 《내 인생 첫 책 쓰기 비법은 필사이다-작가: 나애정》라는 책을 따라 써 내려간 2주간의 자판필사과정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을 쓰고자 한다. (참고사항: 공저책 쓰기라는 분명한 목표가 있으니 이 경우 필사는 책쓰기, 글쓰기와 관련된 책을 선정해야한다. )
자판필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것들
1. 긴 글에 대한 감
일반적으로 필사하면 책을 읽고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췌하여 손으로 적는 손 필사를 떠올린다. 나 또한 독서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몇 년 전부터 손필사를 꾸준히 했었다. 독서기록용 흔적 남기기처럼 해오던 손 필사는 독서가 쌓이자 어떻게든 책의 내용을 나의 글로 바꿔야 한다는 결심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그 결심은 개인 블로그에 독서기록의 형태로 남기기 시작했다. 서툰 글이지만 어쨌든 나의 생각을 글로 바꾸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독서기록은 몇 가지 문장을 따라 적을 때보다 시간도 더 걸리고 힘들지만, 손필사를 할 때보다 훨씬 더 재밌고 내 글이 완성되었을 때 만족감도 크다.
그런데 필사 자체를 자판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동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굳이 책을 다 베끼기 위해 타이핑을 해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처음부터 책 한 권을 통째로 베껴 쓰라고 했다면 아마 시작도 전에 지쳐 떨어졌을 것이다.
단어가 모여 문장이 되고, 문장이 모여 문단이 된다. 문단이 모여 한 꼭지의 글이 만들어진다. 30~40개 꼭지의 글이 모이면 드디어 책이 된다. 한 꼭지의 글은 보통 A4 2장의 글로 이루어진다.
Copilot 제작
우리가 한 달 동안 하는 자판필사는 바로 한 꼭지 분량의 긴 글을 매일 따라 적는 과정이며, 책 쓰기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다. 30~40개의 꼭지를 공저 작가 5~6명이 쓴다고 생각했을 때 한 사람당 대략 6~8 꼭지 분량의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를 평소에 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한 꼭지의 글을 써내라고 한다면 바로 쓸 수 있을까? 긴 글 쓰기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아마 몇 문장을 쓰다가 지쳐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판필사는 마치 따라 쓴 글이 내가 쓴 긴 글인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매일 필사를 하기 전 그날 필사해야 할 한 꼭지 분량의 글을 살펴본다. 필사가 몸에 배이니 대략 훑어보면 이 정도는 A4 2장이 될지, 2장이 넘어가는 길이가 될지, 그리고 뒤이어 쓰는 내 감상문도 이 정도면 대략 500자 일지 1,000자쯤 되는지 점점 감이 오기 시작했다. 내가 직접 쓴 글은 아니지만 한 편의 잘 짜인 글을 따라 쓰다 보면 평소에 쓰지 않았던 긴 글 쓰기에 익숙해진다.
2. 쓸 수 있다는 자신감
필사를 마치고 A4 2장의 완성된 필사본 사진을 찍을 때면, 저것이 내가 쓴 글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그 생각은 내가 필사를 하는 책을 덮고 나만의 글을 A4 2장으로 쭉쭉 거침없이 써 내려가는 모습으로 이어진다. 행복한 상상이다. 전혀 불가능한 상상이 아니다. 처음에는 막연했고 도전불가능이라고 생각했던 책 쓰기가 자판필사를 하는 시간 동안 일단 A4 2장을 쓰면 된다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생각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쓰는 감상글을 500자에서 1,000자로, 그리고 A4 1장의 분량까지 늘려보며 나도 하다 보면 책을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조금씩 차오른다.
책 쓰기 첫 모임 후 자판필사가 시작되면서 어떤 날은 잘 쓸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넘친다. 또 어떤 날에는 무엇을 어떻게 써야 할지, 가까운 사람들에게 책 쓰기에 도전하겠다는 큰소리를 쳐놨는데 실패를 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운 마음이 솟는다. 매일 아침 조용히 필사를 하고 내 생각을 다듬으면서 두려워하지 말자고 혼잣말을 한다.
그럴 때마다 따라 자판필사로 따라 써 내려간 글들이 나에게 말을 건다.
내가 책 쓰기를 잘하지 못해도 나는 잃을게 하나도 없다. 하다가 포기해도 아무도 욕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가 책 쓰기를 포기하지 않을 거란 사실도 너무 잘 안다.
그러니 잘 쓰지 못해도, 실패의 두려움이 있더라도 그 마음을 꼭 안고 하루하루 걸어가는 것이다.
자신감과 걱정 사이에서 일보일 퇴하면서도 앞으로 조금씩 나가보는 거다. 생전 해보지도 않던 자발적 새벽기상을 하는 요즘, 내 삶은 벌써 앞으로 한 보 내딛고 있다. 어떤 날은 걱정과 두려움으로 다시 반걸음 뒤로 빼겠지만 다시 필사를 하면서 책 쓰기에 대한 바람을 키우며 앞으로 한 걸음 크게 내딛는다. 정말로 내가 책 쓰기를 성공한 모습을 매일 상상하면서 말이다. 내 인생의 내 책 한 권을 향해 이렇게 조금씩 앞으로 나가본다.
3. 함께 하는 사람이 있다면 배움과 성장까지
책 쓰기를 위한 자판필사를 함께 하는 동료가 있다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 지금 나와 함께 하는 선생님들 중에는 글쓰기를 제대로는 처음 해보는 작가(우리는 서로를 작가라고 부르기로 했다-(2) 작가의식 갖기 참고)님도 있으며, 한때 글쓰기를 좀 해보신 작가님도 있다. 다양한 경력과 연령, 삶의 경험을 가진 동료들이 매일 올리는 감상글은 나에게 또 다른 배움의 기회가 된다. 요리를 좋아하시는 어떤 분은 음식과 글 쓰기 경험을 잘 버무려 재치 있는 감상글을 쓰신다. 신앙, 학교경험, 어린 시절의 추억, 운동, 가족이야기, 개인의 체험, 읽었던 책과 관련된 자신들의 경험을 풀어내는데 다양한 관점과 생각, 통찰력을 엿볼 수 있어서 작가님들의 감상글을 읽는 것이 매일 기대된다.
(나를 포함하여) 감상문을 쓰는 게 쉽지 않을 때가 많다며 힘들어하는 글을 쓰는 경우도 있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의 글들이 처음보다 발전하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보다 점점 길어지는 감상글들을 볼 수 있고, '어떤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어요' 하면서도 각자의 추억 서랍에 잘 모아둔 경험들을 엮어내는 모습을 보면 함께 하는 훌륭한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척 감사할 따름이다. 날이 갈수록 선생님들의 놀라울 만큼 날카롭고 풍부한 이야기들에 내가 먼저 푹 빠지고 있다. 이분들과 함께 쓰게 될 책은 어떤 모습일까? 벌써부터 너무 설레고 기대된다. 이럴 때는 두려워했던 내 마음을 언제 들었냐는 듯 한 구석으로 밀어버릴 수 있다. 우리는 이 책 쓰기 모임을 시작한 날부터 글쓰기 역량을 한 단씩 쌓아 올리며 매일 성장하고 있다.
4. 글쓰기 요령,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
내가 쓰려고 하는 글은 소설이나 시가 아니다. 나의 생각과 메시지를 논리 정연하게 써서(까짓 거 논리가 좀 부족할지라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이 목적이 될 것이다.
작가의 책을 필사하며 익숙해진 것은 바로 자기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이다. 멘토 작가님의 저서 한 권을 필사하면서 느낀 것은 책 속의 글들은 절대 어려운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떤 문장도 이해가 되지 않은 문장은 없다. 생각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글로 풀어쓴다면 얼마든지 책을 쓸 수 있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쉬운 문장으로 간결하게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글쓰기, 어렵게 본인조차 이해 안 되는 단어와 미사여구로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쉽게 털어놓는 글이야말로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온다.
또한 필사를 하다 보니 한 꼭지의 구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서론에서 이 꼭지에서 말하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지 소개한다. 본론에 그 이야기를 뒷받침할 작가의 경험이나 근거가 되는 글들을 나열한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메시지를 강조한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서론-본론-결론’, ‘주장-근거’를 잘 배치하여 문단을 마무리하면 한 꼭지의 글이 되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동안 이 기본적인 글쓰기 요령을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글들을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그냥 써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름의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을 갖춘 긴 글을 써보고 평가를 받았던 건 임용고시 때 교육학 논술시험이었다. 문단의 형식을 갖추어 주장을 쓰고 그것을 뒷받침하는 논거들을 쓴다. 이것이 학원강사에게 배운 논술요령의 전부였다. 글쓰기는 나에게 너무 막막한 것이었고, 나는 그때 전공과목에 더 힘을 주고 교육학은 기본만 하자는 것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 정도로 글쓰기에 자신이 없었다. 교사가 되어서도 글을 써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계획서나 보고서, 가정통신문은 전임자가 해둔 것을 수정하거나 공문을 참고하여 수정해서 사용했다. 필사를 하면서 다시 한번 구조와 형식을 갖춘 글, 기성작가들은 어떤 식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지 글의 논리적인 형태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 강사에게 배웠던 논술 답안 작성하는 방법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글 쓰는 방법을 익히고 있다.
얼마 전 우리 모임 예비 작가 중 한 분은 우리 중 처음으로 A4 2장짜리 감상문을 쓰셨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분은 벌써 자신만의 글을 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필사를 하면서 500자가 좀 넘는 감상문을 쓸 때도, 미니북 쓰기를 할 때도 나는 한 번도 한 꼭지의 글을 쓸 수 있다는 생각을 왜 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그렇게 자신의 글을 쓰신 그 작가님이 정말 멋있어 보였다. 우리가 필사를 통해 스스로 그런 경지에 오르길 바라 매일 이 훈련을 하고 있는 것인데 말이다.
나는 조급하지 않았다. 아직 나에게는 필사할 챕터가 많이 남아있고,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 말이다. 필사 파일이 하루씩 쌓일 때마다 나의 자신감도, 쓰는 실력도 그렇게 천천히 쌓이게 될 거라 생각한다. 연휴기간 동안 평소보다 감상글을 쓸 시간여유가 있었다. 나는 천천히 짧은 서론-본론-결론의 형식으로 글을 써보았다. 아직도 글 자체는 많이 서툴렀지만 완성된 A4 1장의 글을 보며 다음에는 2장 분량까지 쓸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지금 이 글도 쓰다 보니 상당한 분량의 글이 되었다. 처음부터 이렇게 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매일 자판필사와 글쓰기를 하면서 나에게도 이만큼의 글 근육이 생긴 것이다.
간호사로 일하던 시절, 병원 전체 간호사들에게 고객 만족 교육을 한 적이 있다. 우연한 기회에 병원 지원을 받아 관련 연수를 들을 기회가 있었고, 연수를 들은 후 나의 역할은 배운 내용을 토대로 그대로 전체 간호사들에게 전달하는 것이었다. 전체 간호사를 소규모로 쪼개어 교육을 하다 보니 연수는 수일에 걸쳐 반복되었다. 당시 나와 함께 전달 연수를 하는 간호사가 한 명 더 있었다. 그 간호사는 앞에 나와서 이야기를 워낙 재밌게 하는 사람이라 처음부터 자신만의 강의를 했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강의가 서툰 내가 그 연수들을 준비하면서 처음 했던 것은 바로 내가 들었던 연수의 강사처럼 따라 하는 것이었다. 프레젠테이션 방법과 내용, 말투, 심지어는 중간에 끼워 넣는 유머까지 말이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 날부터는 점점 나만의 스타일이 나오기 시작했다. 여전히 서툴렀지만 따라 하다 보니 점점 나만의 강의가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하는 필사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남이 쓴 책을 따라 쓰지만, 그렇게 따라 쓰는 글과 생각이 쌓이면, 어느 순간 나만의 글이 탄생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