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영업자입니다.
어느 날 나는 벤치의자에 앉자 있었다. 그러다 무심코 나의 발 옆을 걷고 있는 개미들이 보였다. 개미들은 열심히 식량을 나르고 있는 터라 나의 시선 따윈 안중에 없었다. 나는 개미들을 자세히 보기 시작했다. 개미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일렬로 식량을 나르고 있었다. 아마 근처에 곤충의 사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개미들의 행렬에도 개중 몇 마리는 대열을 이탈해 각기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런 개미들을 보니 엉뚱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개미 사회는 처음 식량을 찾은 개미에게 어떤 보상을 해줄까? 그리고 각기 다른 식량을 나르는 개미들 중 가장 큰 식량을 나르는 개미에게는 어떤 보상을 해주는가?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자면 개미사회는 '넌 오늘 식량을 찾았으니 관리부장으로 특진시켜 줄게'라든가, '넌 큰 짐을 날랐으니 내일 하루 쉬어'
이런 상상에 개미사회나 내가 속한 사회나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가?
처음은 가족, 두 번째는 사회일 것이다. 나는 항상 누군가를 위해 삶을 살고 거기에 행복을 느끼려 한다. 그래서 사회에 인정을 받길 원하며 개미들처럼 열심히 식량을 나르는 삶을 살고 있다. 나는 그런 삶을 살아가며, 아빠로서의 인정, 남편으로써의 인정, 자식으로서의 인정과 내가 속해있는 사람들에게서의 인정을 받기 위해 열심히 식량을 날랐다.
나는 매일 무의식적으로 '힘들다'라는 말을 자주 한다. 내 의지와 관계없이 밥 먹을 때도, 샤워할 때도, 운전할 때고, 누워있을 때도 '힘들다'라는 말이 흘러나왔다. 심지어 '힘들다'라는 말을 나 자신도 모르게 할 때도 많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힘들다'라는 말은 고스란히 아이들에게까지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어느 날 지친 나의 모습을 보고 큰아이가 말했다.
"아빠 힘들어?"
나는 큰아이의 말을 듣고 적잔이 놀랐다. 큰아이 앞에서 당황한 얼굴을 감추려 애썼다. 그리고 말했다.
"괜찮아"
나는 아이들에게 아빠는 힘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도 모르게 주입을 시킨 것이었다. 물론 모든 아빠의 삶은 힘들다. 하지만 그런 모습을 본 아이들은 어른에 되어서 사회의 인정을 받으려 더 큰 노력을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도 나와 같이 '힘들다'라는 말을 무의식적으로 뱉을 것이다.
나 다운 삶은 무엇인가? 나는 이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내가 지금 좋아하는 일은 무엇인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가? 그날 끊임없는 질문들이 내 머릿속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나의 질문에 대한 나의 삶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런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았다. 하지만 그럴수록 지나온 삶에 대한 후회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사실 그렇게 내가 잘못된 삶을 산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내가 후회의 이유는 이렇다. 이제껏 살아온 나를 부정하는 것이고, 무엇보다도 사회를 위해 희생한 나 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나에게도 질문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에 대해 나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고 싶은 일도, 좋아하는 일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부정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 대한 질문을 할수록 그것이 지금 나의 현실임을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를 위해 자신이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는 것이라면 내 앞에 큰 빙하가 가로막혀 있더라도 나는 지금 이 자리를 지키려 노력할 것이다. 그러다 빙하에 부딪쳐 내 배가 침몰하면서 지키려 했던 것에 후회를 할지도 모른다. 그런 후회는 처음에는 내 탓으로 시작해 점점 그들의 탓으로 돌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까지 그들의 탓이 된다. 마침내 나는 침몰하는 배안에서 모든 것을 품는 결정을 하고 고귀한 희생자가 되려 한다.
인생의 변화는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들로 나타나진 않지만 나는 늘 그것을 꿈꾼다. 편하고 고통스럽지 않게 어느 날, 갑자기 눈떠보니 부자가 된 자신을 바라며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을 위해 그들의 삶에 들어가 고귀한 희생자가 되려 한다.
성공한 사람들은 그들의 위대한 도전과 노력덕에 그 위치에 있다. 그들은 수많은 좌절과 고통 속에서 과도기가 만들어낸 공백기를 거쳐 끊임없는 위대한 도전을 통해 그 자리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위대한 도전 따위는 관심을 가지진 않았다. 단지 그들이 족집게 과외처럼 무언가 콕 집어주길 바랐다.
이 모든 것은 지난 10년 전 나의 이야기다. 수많은 강의를 들으면 그들과 같이 부자가 되고 싶었다. 그 열망이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나의 인생이 그들의 삶 속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나는 그들의 마음을 얻기 부단히 노력했다. 그 결과 하루빨리 부자가 되려 한 마음에 가짜 부자들의 현란한 말에 그릇된 선택을 했다. 몇 번의 좌절을 맛본 뒤로부터는 내가 내릴 수 있는 선택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원래 나의 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라도 가지'라는 속담이 가슴에 맺히는 순간이었다. 그 후로 다시는 중간이라도 차지하기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나는 사회의 인간으로서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3년 동안 읽은 수많은 책에서 죽음 근처까지 경험한 저자들의 절박한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극히 중간의 삶을 살아가는 일반인 자영업자이다.
종이를 반을 접으면 선명하게 중간의 선이 이어진다. 종이 위아래가 바뀐다고 해도 중간은 절대 바뀌는 법이 없다. 그래서 나는 중간을 살기로 했다. 무언가로부터 절대 흔들리지 않아 내가 원하는 안락한 삶을 살 것 같았다. 그러나 중간의 삶을 사는 나는 안락한 삶을 살지 못했다. 중간의 삶은 종이 중간의 선처럼 가느다란 외줄 타기와 같다. 항상 중간정도의 치임과 관계의 위태로운 외줄 타기의 연속이었다. 혹여 떨어질 것이 두려운 나머지 나의 몸과 외줄을 감아 고정시켰다. 덕분에 나는 바람으로부터 떨어질 위험을 감소시켰지만 움직이지 못했다. 어찌 보면 중간의 삶은 올라가기는 힘들고 떨어지기는 쉬운 곳이 아닐까?
분명한 것은 중간의 삶에는 내가 원하는 안락한 삶은 없었다.